18. 눈부신 추억이 날 아프게 하네
건물 주인이 집을 비우라고 한다. 건물이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것이다. 옥탑방을 지어줄 생각이 없으니 나가란다. 어제 퇴근을 했더니 엄마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전한 내용이다. 그것보다 더한 쇼크도 있다. 주인에게 통보를 받고 망연자실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는 것이다. 빈 방이 많으니 들어와 살라고, 거의 공짜로 세를 얻었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단다. 고깃간 구씨 아저씨가 말이다. 마음속에 오래 간직했던 게 급박하니 툭 튀어나오고 말았을 거란다. 이건 은새가 전한 내용이다. " 오래 간직했던 마음?" 이라고 반문했더니 둔하단다.

" 그럼 아저씨가 엄마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야? 여섯 살이나 연상인데?"

 기가 막혀 묻자 은새가 그랬다.

" 아유, 촌티 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고도 네가 21세기 인간이냐? 암튼 내가 볼 때 이번 제안은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거야. 그냥 결혼하자고 하긴 뭐 하니까 일단 들어와 살라는 거라고. 아저씨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혼자 산다며? 슈퍼 아줌마가 그러는데 2층 양옥인데 꽤 괜찮대. 우리 형편에 그런 전세 꿈도 못 꾸는데 잘됐지 뭐. 엄마도 아주 싫진 않은 거 같고."
" 아주 싫진 않아?"
" 스카프 받아 챙긴 거 보면 모르겠어? 엄마가 아무리 명품에 약해도 마음에도 없는 남자한테 선물을 막 받을 정도로 자존심이 없진 않다고."

 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엄마를 물끄러미 보고 고깃간 구씨 아저씨를 훔쳐봐도 다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분들이었다. 그런데 언제 두 분이 마음이 통했단 말인가!



" 앗, 뜨거!"

 은찬이 손을 움츠리며 펄쩍 뛰었다. 딴생각을 하다 결국 일을 당했다.

" 왜 그래? 데었어? 조심 좀 하지."

 컵이 아니라 손등으로 커피를 받은 것이다. 손등이 순식간에 붉게 부었다.

"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냐?"
" 야, 그러고 있으면 어떢해. 이리 와."

 바쁜 아침 시간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민폐다. 은찬은 얼른 뛰어가 홍 사장이 주는 얼음주머니를 받았다.

"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얼음주머니를 받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면기에 물을 틀어놓고 얼음을 넣고 손을 담갔다. 손등이 찌릿찌릿했다. 은찬은 한숨을 쉬며 거울을 보았다.

" 긴장 좀 하자, 고은찬."

 오늘 제정신이 아닌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며칠 전부터 사장이 우울증 환자처럼 구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물어도 도무지 말을 안 하니 답답하고 신경이 쓰여 미칠 노릇이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실수 연발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집 때문이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구씨 아저씨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림에게 배턴을 받아 가게 바닥에서 자야 할 형편이니까.

 데인 손의 감각이 점점 무뎌질 무렵 거울 속에 한결이 나타났다.

" 손 줘 봐."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에 검은 앞치마를 두른 채 하얀 약상자를 들었다.

" 두고 가요. 바쁘잖아요."

 한결은 말없이 은찬은 돌려세웠다. 손등은 여전히 붉었지만 붓기는 좀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보더니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약상자를 열었다. 그는 정말 말이 없었다. 은찬은 입바람으로 머리를 날리며 말했다.

" 정말 어색해서 못 참겠네. 무슨 일인지……."
" 참아."

 은찬은 말문이 막혔다.

" 에이씨이……."

 한결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화상용 거즈를 꺼냈다. 손등의 크기에 맞게 잘라서 신중하게 붙였다. 말끄러미 보던 은찬은 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알아챘다.

" 왜 웃는데요?"
" ……."
" 나 다 봤거든요, 사장님? 지금 웃었잖아요."
" 자, 다 됐다. 심하지 않아서 오늘 하루만 붙이고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상황 봐서 오후에 병원에 가보든가."

 은찬은 깔끔하게 탄력 붕대를 감아놓은 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음, 한결스럽게 감았군."
" 이제 내 이름에 고맙단 의미도 포함됐나 보지?"
" 아, 고맙습니다. 근데 산재 보험 같은 거 안 들어놨어요? 나 한 1억쯤 청구할 생각인데."
"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게 앞이나 쓸어. 그 손으로 서빙한다고 나대지 말고."

 사장은 그냥 가버렸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할 기분이 아닌가 보다. 그게 며칠씩이나 가다니…….

" 자기만 그런가. 나도 오늘은 영 말할 기분이 아니네요."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도 웃어야 한다니, 직장인의 비애다.

 오후에 잡지책이 배달됐다.

" 와, 죽인다. 사장님 와 보세요. 사진발 죽여요."
" 단체 사진은 뭐 이렇게 쪼그맣게 실었대? 우리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네."
" 이렇게 찍어놓으니까 우리 가게도 제법 괜찮은데?"
" 그렇죠? 특히 요기 입구가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 어, 2장이나 실렸어요. 사장님, 사진을 언제 이렇게 많이 찍은 거예요? 보자."

 잡지책을 가운데 두고 우르르 모여 사진을 구경했다. 은찬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커피를 리필해 주고 있었다.

"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 네. 없어요."

 은찬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물러나려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덩치 큰 남자 둘이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 대낮에 웬 깍두기가……."

 중얼거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네, 맛있는 커피프린스입니다."
[ 사장님 계신가요? 여기 신문산데요. 나라경제신문이오.]
" 아, 네. 잠시만요."

 한결에게 수화기를 넘긴 은찬은 하림의 눈짓을 받고 다가갔다.

" 왜?"
" 이거 알고 있었어?"

 하림이 낮은 목소리로 잡지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을 읽었다.

" 커피프린스의 최한결 사장은, 어 스물아홉? 나이를 한 살 올려놨네? 자, 봐. 동이그룹 국지화 회장의 손자이자 동이건설 최명로 회장의 막내아들로 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한마디로 잘생기고 세련된 외모와 명석하고 날카로운 두뇌를 겸비한 재벌 3세. 재벌 3세래. 동이그룹 회장 손자. 아, 가슴 뛰어. 나 가슴 벌렁거려서 더 못 읽겠어."
"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통 모르겠네. 이리 줘 봐."

 은찬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잡지를 들고 직접 읽었다. 읽어도 내용은 같았다. 동이그룹…… 재벌 3세…… 곱씹어 읽는 순간 징으로 머리를 꽝 내려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띵했다.

" 어쩐지 럭셔리하다 했어. 내가 그랬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 명품이라고. 내가 요즘 동이호텔 빌라에서 잔다고 그랬지? 돈 엄청 깨지겠다 싶어서 미안했는데. 뭐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잖아. 울 사장님한테 진짜 잘 보여야겠네.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지."
" 너는 집에서 쫓겨난 놈이 참 발랄도 하다. 정말 이해가 안가."

 낙균이 핀잔을 줬다. 하림의 아버지는 결국 가게로 연락하지 않았다. 제 발로 나왔다고는 해도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림은 며칠 전부터 사장의 S11호에서 출근하고 있었다. 곧 지하 단칸방이라도 얻을 작정이라고 했다.

" 허, 참……. 살다 보니 재벌을 보기도 하는구나."
" 가게에 너무 투자를 많이 해서 빚 좀 졌겠다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선기마저 허탈하단 표정을 지었다.

" 그러게 말이다."

 은찬은 계속 띵한 상태로 있다가 한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한결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이봐요. 안 한다는데 이유가 왜 필요합니까? 그냥 싫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한결로서는 예의는 차린 편이었다.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한결은 곧장 다가와 은찬에게서 잡지책을 홱 빼앗아 갔다. 휙 훑어보고선 무서운 표정을 했다.

" 이 인간들이 정말!"

 화를 내고선 잡지책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보고 있던 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은찬은 아직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표정으로 한결을 보았다. 한결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한결이 거친 기세로 수화기를 들었다.

" 네, 커피프린스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한결 씨 좀 부탁드립니다.]
" 어디시죠?"
[ 아, 여기 잡지산데요. 경제 주간지…….]
" 사장 없습니다."

 그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직원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한결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기리 뭉쳐서 마치 동물원의 맹수를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한결은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구경났어? 일들이나 해."

 이후로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결은 전화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려댔다. 친구들과 친척들까지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참다 못한 한결은 폭발해 버렸다.

" 이 빌어먹을 잡지사 새끼들!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한결이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퍼부어 대는 동안 은찬은 직원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결이 손님들이 놀랄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서 안에서도 다 들렸다.

" 인터뷰 내용이랑 다르잖습니까! 커피프린스 사장으로서 인터뷰한 거지, 누가 이런 개인사까지 실으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당신 미쳤어? 내가 왜 공인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다 거둬들여! 한 권이라도 내 눈에 띄면 고소할 줄 알아! 그리고 뭐 스물아홉!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할 준비나 해!"

 스물여덟이나 아홉이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홍 사장이 들어왔다.

" 여기서 뭐 해?"

 은찬이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으니 옆으로 다가왔다.

" 왜? 충격 많이 받았어?"
" 정말 재벌이래요?"

 은찬이 망연자실한 채로 물었다.

" 그런가 봐.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잘사는 집인가 보다는 했지. 젊은 사람이 가게에다 돈을 거의 쏟아 붓더라고. 하림이 말처럼 차도 그렇고 시계도 그렇고. 이 가게 말고 전에 뭐 한 것도 없다면서 말이지. 그런 사람이 큰돈이 어디서 났겠어. 집이 좀 사나 보다 했지. 그래도 그렇지. 동이그룹이라니……."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뭐 그런 말도 있지만 사람이 참 간사하네. 사장이 확 달라 보여. 누군 이 가게 하나 꾸려나갈 형편도 안 되는데, 누군 그 큰 회사를 몇 개씩이나 갖고 있고. 사장 보면, 돈이 돈을 번단 말이 뭔지 알겠어. 처음에 사장이 3배 어쩌고 할 때는 속으로 엄청 비웃었거든. 그래 어디 한 번 쫄딱 망해봐라. 네가 아직 세상 쓴맛을 모르는구나. 근데 해냈잖아. 참 나, 사람 빙충이 만드는 게 돈이지 싶다."

 은찬도 동감하는 바였다. 막연히 부잣집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저 엄청난 동이그룹, 재벌가의 상속자라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저 높은 산이라고 하는 것과 에베레스트에서 느끼는 차이처럼 말이다.

" 건물 주인이 나가라네요."

 은찬이 남의 일처럼 말을 꺼냈다.

" 어느 건물 주인?"
" 우리 집요."
" 뭐? 왜? 관장님 가셨다고 쫓아낸느 거야? 그 사람 참 안 되겠네."
" 허물고 새로 짓는데요."
" 아……. 그 건물이 오래되긴 했지."

 잠시 가만있던 은찬이 캐비닛 위에 있는 라면 상자를 보며 말했다.

" 새참라면이 동이식품에서 나온 거죠?"

 은찬의 시선을 따라 본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그럴걸."
" 우리 엄마 드시는 종합 비타민은 동이제약에서 나온 거예요. 내가 매일 사드려서 알아요. 시장 뒤에 짓는 아파트 단지는 어디에서 짓는 건지 아세요?"
" 동이건설이지."
" 빙고."
" 그것뿐이냐? 우리 마누라 좋아하는 퓨전 한식당 체인점도 거기 거잖아."
" 은새가 저번에 오디션 본 D엔터테인먼트요."
" 맞아. 그것도 동이그룹 거지."
" 근데 우리 은새를 떨어뜨렸어요."
" 못된 놈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서민이 재벌을 볼 때 느끼는 자괴감과 무력감, 억울함,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들이 뒤엉켜 그들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 집 구해야지.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아저씨의 말에 은찬은 자조 처린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돈이 없어요."
" 어, 얼마나 있는데?"
" 가진 거라곤 빚뿐이에요. 근데 울 사장은 재벌이라네요?"

 은찬은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게 북받쳐 올랐다. 자신도 몰랐던 어떤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무언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니,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랑 지금……. 세상 참 불공평해요. 난, 정말 열심히 살려고…… 아버지랑 한 약속 지키려고 정말 열심히……."

 결국 은찬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홍 사장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은찬을 알게 된 후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차, 찬아…… 왜 이래……."
"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사람을 까맣게 속이고……. 너무 멀리 있으면서…… 그렇게 멀리 있는 사람인 줄 몰랐잖아요. 정말 모, 몰랐어……."

 은찬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설움이 더 왈칵왈칵 치밀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출 수가 없는 게 또 하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와의 일들. 추억이 영화 장면처럼 하나하나 떠올랐다. 처음 길에서 만났을 때 재수 없고 거만하다고 느꼈던 그의 모습, 호텔에서 그의 맨가슴에 손을 댄 일, 사람들 보는 앞에서 얼떨결에 한 키그, 커피프린스에서의 재회, 그릇을 사러 갔다가 주차장에서 싸웠던 일, 농구를 하고 귀를 뚫고 붕대를 감아주고…….

 충격이 은찬의 머리를 강타했다. 좋아해. 나,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 생각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쳤다. 충격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처럼 아파왔다.

" 어, 어떡해……. 아, 아저씨…… 나 어떡해요……."

 은찬은 오열하고 말았다. 안쓰러워진 아저씨가 쭈뼛쭈뼛 손을 뻗었다. 등을 토닥이며 은찬을 달래려 애썼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은찬의 눈물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안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은찬이 벌떡 일어났다. 창가로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눈물을 급하게 훔치는가 싶더니 휙 돌아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차, 창피해서 그래요. 못 올라갈 나무 쳐다본 게. 울 사장 눈에 나 같은 건 턱도 없잖아요. 저 발밑의 까만 깨 하나 정도로도 안 보일 거예요. 그렇죠?"
" 찬아."
" 아이씨이, 창피해. 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말하면 아저씨 내 아들. 하늘땅 별땅. 아, 아저씨…… 나, 나 좀 혼자 있고 싶어요."

 은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휴게실의 문이 휙 열렸다. 동시에 은찬은 창으로 몸을 돌려 눈물을 감췄다.

" 점심 뭐 드실 거예요? 오늘은 공주싣앙에서 시킬 건데. 형은 불고기덮밥이지?"
" 아, 안 먹어."
" 아저씬…… 자, 잠깐 형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 나, 나가자."

 홍 사장이 멍해 있는 하림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한결은 어머니와의 점심 약속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게실에서 끌려나오던 하림이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얘기했다.

" 야, 낙균아. 은찬이 형이 점심을 안 먹는다네?"
" 만우절 벌써 지났다."
" 정말이야. 안 그러면 내 귀가 맛이 간 거든가. 아저씨. 아저씨도 들으셨죠?"
" 그냥 놔둬. 찬이라고 그럴 때 없겠어."

 순간, 모두 동작을 멈추고 홍 사장을 보았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낙균은 컴을 든 채였고, 선기는 잔을 닦는 동작 그대로, 한결은 재킷을 입던 중이었다. 모두 ' 얼음'을 한 것처럼 꿈쩍도 안 했다. 맨 먼저 ' 땡' 한 건 한결이었다.

" 무슨 일이야? 안에 있어?"

 홍 사장이 직원 휴게실로 들어가려는 한결을 막았다.

" 혼자 있고 싶대요."
" 예?"

 한결은 놀라 홍 사장을 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리는 홍 사장 때문에 문만 바라보아야 했다.



 약속 장소로 들어선 한결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제멋대로 기사를 낸 잡지사의 횡포 때문에 열이 받은 데다가, 은찬이 점심을 안 먹는다고 해서 걱정이 되었고,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두렵기 때문이다.

" 할머니께 말씀 들었다."
" 식사나 하시고 말씀하시죠."
" 어떻게 밥만 먹니? 얘기도 하면서 먹어야지."

 한결은 입으로 들어가려던 포크를 다시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해보세요, 그럼."
" 음, 이거 한 번 먹어봐. 입에서 살살 녹는다."

 한결은 억지로 입을 열어 어머니가 먹여주시는 농어 한 점을 받아먹었다.

" 어때, 맛있지?"
" 같은 얘기 또 하시려거든 좀 참으세요. 할머니와 약속한 시간도 아직 남았고, 저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 그래? 그럼 좀 참지 뭐. 근데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잖아. 나는 너 어렸을 때부터 알아봤어. 할아버님만 알아본 게 아냐. 맺고 끊는 거 분명하면서도 잔정이 있었어. 겉으로는 차고 무뚝뚝하게 굴어도 뒤로 말없이 위로도 하고 의지도 돼줬지. 그래서 내가 딱 생각했지. 이놈은 사람들한테 신용도 얻고 정도 얻겠구나. 기업하는 사람은 신용 못 얻으면 장사 못해. 너는 기본 소양이 되는 놈이다 생각했어."
" 실망 많이 하셨겠네요."
" 아직 기대하고 있어. 어미가 어떻게 자식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버릴 수 있겠니?"
" 데리고 있는 졸개 중에 한 녀석이 집을 나왔어요.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충돌해서요. 제가 나오라고 했어요.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며 사는 건 죽느니만 못한 거잖아요."
" 부모님 속이 말이 아니겠구나."

 한결은 어머니에게 하림의 얘기를 말했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얘기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림의 얘기를 한 건 자신에 대한 변명 같은 거였다.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의 표현 같은 거였다.

" 어려운 문제야.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할 수는 있어도 막상 내가 그 입장이다 생각하면……."

 갑자기 어머니가 혼자서 쿡쿡 웃으셨다.

" 왜요?"
" 나는 너 미술이나 영화 한다고 하면 적극 환영이다 싶어서. 자식 중에 하나는 예술 분야로 진출했으면 했거든."
" 어머닌 자식이 셋이잖아요."
" 그래. 난 셋이나 돼. 얼마나 다행인지."

 한결은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가게가 몹시 잘된다더라? 커피 맛이 꽤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면서?"
" 재미있어요. 손님이 없으면 왜 없을까, 많으면 왜 많을까. 하나하나 분석하며 채워가는 게 꽤 즐거워요."
" 너한텐 소일거리야. 니 밥그릇은 그보다 훨씬 커. 곧 지루해질 거다."
" 생각해 본다니까요."
" 알았다니까요, 최 사장님."

 예상했던 것보다 즐거운 점심 식사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는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 회사로 들어가십니까?"
" 아버지 수배해서 모시고 들어가야 해."

 퇴원하신 후 다시 회사에 출근하고 계신 아버지는 이번 주에 금연, 주5일 근무, 5시 퇴근을 철저히 이행하고 계신다.

" 어머니."

 한결은 차에 오르려는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머니가 돌아보며 한결의 마음을 아는 듯 말씀하셨다.

" 됐네. 퇴근할 때 장미꽃이나 사 와. 새빨간 걸로."

 한결은 목이 메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단 말이 목에서 가슴으로 넘어갔다.

 어머니를 보내고 가게로 돌아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 누구냐?"
[ 사, 사장님! 큰일 났어요, 사장님!]
" 왜 또. 은찬이가 로얄컵 깼어?"
[ 그, 그거요? 그것도 아마…….]
" 뭐야? 그것도라니? 스페인에서 사 온 화분도 깼어?"
[ 그것도 깨졌어요. 그, 근데요! 보, 본인이오! 보, 본인도 다쳤어요!]
" 본인이라니?"

 한결은 차에 오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등골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 차근차근 말해 봐. 뭐라고?"
[ 그, 그게 뭐냐면 선기형을 찾는 놈들이 왔는데…… 깍두기 놈들이 떼거지로 와서 가게 다 부숴놨어요. 선기 형이 호스트바에서 돈을 들고 날랐대요. 선기 형이랑 나랑 점심 먹고 있는데 놈들이 들이닥쳤거든요. 우린 문 잠그고 휴게실에 있었어요. 찬이 형이 절대 문 열지 말라고 해서…….]
" 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낙균이 없어? 낙균이 바꿔!"
[ 나, 낙균이오? 자, 잠깐만……. 야, 너 바꾸래.]

 한결은 답답하고 속이 타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본인이 다쳤다니? 은찬이 다쳤단 소린가? 아침에 손등을 데었잖은가. 그거갖고 그러는 건가? 근데 호스트바는 뭐지? 가게를 부숴놓다니, 누가! 왜!

[ 여보세요?]

 낙균이 전화를 받았다. 한결은 수화기를 움켜쥐고 빠르게 말했다.

" 무슨 소린지 말해 봐. 누가 다쳤단 거야?

[ 은찬 형이 의자로 머리를 맞았어요. 의식 불명이에요. 지금 대한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어요. 빨리 오세요.]

 한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캄캄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있는지 이유도 몰랐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는지도 잊은 채 숨 가쁘게 차를 몰았다. 병원 앞에 차를 대자마자 또 정신없이 달렸다. 이마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늘이 노랗고 땅이 흔들리며 속까지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다.

" 사장님!"

 그때 직원들을 발견했다. 하림은 새하얗게 질려 있고 낙균은 얼굴리 긁히고 옷은 피투성이였다. 홍 사장 역시 다쳤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 이, 이 자식 어디 있습니까?"
" 안에……."

 곧장 수술실로 걸어 들어간 한결은 깜짝 놀란 간호사들의 제지를 받고 쫓겨났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은찬을 보았다. 흰 셔츠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한결을 밀어낸 간호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 보호자 되세요?"

 한결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또박또박 말했다.

" 제 직원입니다."
" 어서 보호자 모셔 오세요. 그래야 빨리 수술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순간 모녀가 울며 복도를 달려왔다.

" 으, 은찬이 우리 은찬이 어디 있어!"
" 아, 아주머니……."
" 우리 은찬이, 우리 찬이 어디 있어요? 아, 찬아……."
" 보호자 되세요?"

 간호사가 다가와 어머니를 붙잡으며 물었다.

" 내 딸, 우리 딸, 어, 어떻게 됐어요? 우리 딸 죽었어요?"
" 엄마! 언니가 죽긴 왜 죽어! 아, 안 죽었죠? 우리 언니 괜찮죠?"
" 뇌출혈이 있어요. 수술이 급하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 뇌, 뇌출혈! 아, 아이고 불쌍한 것! 어린것이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한다고 생고생만 하고……. 아, 아이고 불쌍한 내 딸…… 가여운 우리 딸……."

 오열하는 어머니를 안고 은새가 떠난 뒤 한결은 망연자실해 홍 사장을 보았다.

" 그, 그게……."

 홍 사장은 한숨을 쉬고서 머리를 떨어뜨렸다.

" 딸이라니?"

 낙균의 질문이 번져가는 끄트머리에 하림이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 찬이 형, 아니 찬이 누나, 여자야. 그러니까 더 미치지. 개새끼들! 어떻게 여자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의자로 내려치냐! 노선기 이 자식, 잡히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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