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날

 그날, 은찬은 그가 재벌 3세라는 소식을 접하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순간,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가게에서 부딪치며 옥신각신하는 동안 조금씩 알게 됐다. 그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웃으며, 어떻게 걷는지. 또 그가 얼마나 명쾌하고, 얼마나 재미있으며, 얼마나 멋있는 남잔지. 그의 과거와 가족가 생각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따르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닮아가고, 그를 도우며, 그에게 기댔다. 하늘에 노을이 물들 듯이, 마음에 사랑이 그렇게 번져갔던 거다.

 그날, 노을이 하늘을 걷잡을 수 없이 물들여 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게 사랑인지, 동요애인지, 우정인지, 통틀어 정인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 전부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를 좋아하고 있단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을 느끼고 상실감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누굴 좋아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걸, 좋아하는 게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하단 것도 알게 됐다.

 그날, 그가 나간 뒤 낙균과 홍 사장 아저씨가 식사를 하고 교대로 선기와 하림이 식사를 할 때였다. 은찬은 맥없이 혼자 홀을 지키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때 까마귀 나라 양아치가 들어왔다.

" 야, 한판 붙어! 오늘은 절대 그냥 안 가! 진짜로 한판 붙어, 새끼야!"
" 야! 이 자식이 어디 와서……."

 까마귀 나라 양아치가 술까지 먹고 와서는 횡설수설하며 행패를 부렸다.

" 봐주니까 이 쥐새끼만 한 새끼가 사람을 물로 보고……. 네가 태권도 사범이면 다야! 오늘 제대로 붙어! 붙어서 네가 이기면 내가 형님으로 모신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지껄여서 은찬의 부아를 돋우었다. 그때 갑자기 시커먼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입구를 꽉 막고서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그늘을 만들더니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야, 꼬맹아. 마린보이 어디 있어?"

 웬 잡놈들이 이리 꼬이나.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이구나 하는데 까마귀 나라 양아치가 엉겨 붙었다.

" 이 새끼들은 또 뭐야? 볼일 있으면 뒤로 가. 내가 먼저 왔어, 새끼야."

 그때부터 일이 커진 것이다. 그땐 마린보이가 노선기인지, 노선기를 왜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상황에서 손님들이 놀라 나가고 까마귀 나라 양아치와 깍두기 하나가 가게 안에서 멱살잡이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 없다고 시치미를 떼다가 다 알고 온 것 같아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노선기가 자기 사장의 돈을 갖고 튀었단 소리를 했다. 그게 선기 어머니의 병원비로 쓰인 것은 나중에서야 안 것이다. 어쨌든 그들에게 선기를 내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은찬은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달랬는데 까마귀 나라 양아치가 일을 다 망쳐버렸다.

" 이 새끼들,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알아! 다 죽었어, 개새끼들!"

 객기를 부린 것이다. 어떻게 할 도리 없이 가게 안은 난장판이 됐다.

" 야! 노선기, 나와! 안 나와! 새끼, 죽을래!"

 이때 은찬 역시 꼭지가 돌아 있었다. 감히 이것들이 남의 가게를 부수고 장사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노선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흥분을 못 누르고 거기서 이단 옆차기를 날려버렸다. 선기나 까마귀 나라 양아치를 탓할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때 좀 더 이성적으로 굴었다면 그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느닷없이 불행이 닥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은찬은 수술을 했고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몸이 차츰 회복되어 갈 즈음, 은찬은 통 병원에 들르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데 지쳐버렸다.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다.

[ 누구야?]

 떨리는 가슴을 안고 겨우 전화를 걸었는데 대뜸 튀어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말문이 탁 막혔다.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약해졌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 여보세요? ]
" 나, 나예요. 뇌 수술한 태권브이."

 어떻게 한 번 와보지도 않아요? 서운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지은 죄가 있어 일단 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 자, 잘 지내셨어요? 회사로 들어가셨다더니 되게 바쁜가 봐 요?"
[ 무슨 일이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은찬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은찬은 전화기를 꼭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가 났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냉대받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라면 문병을 오지 않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화, 마, 많이 나셨구나? 에이, 내가 진짜 말하려고 했는데……."
[ 무슨 말?]
" 아이, 왜 또 삐딱하게 나오시나.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요. 호텔에서 술 마셨을 대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때 사장님이 딱 말을 막아가지고……."
[ 네가 여자란 거 숨긴 얘기라면 됐어. 이제 사장도 아니니까. 앞으로 널 쓰고 말고는 홍 사장님이 결정하실 거니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사정하려거든 그쪽에 전화해 봐. 그럼 몸조리 잘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예 받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말도 하기 싫다는 거다. 그는 너무도 사무적으로, 딱딱하고 건조하게 상관없단 말을 했다. 은찬에게 그 말은 사형 선고 같았다. ' 이제 너는 끝이다!' 라는.

 은찬의 짐작은 그날 저녁 문병을 온 한성의 말로 입증됐다.

" 어제 같이 술 한잔했는데 아주 인사불성으로 취했어. 만취해서 그러더군. 농락당했다고. 자기가 진짜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대했는데 여자가 자길 갖고 놀더라고."
" 내가, 내가 갖고 놀았다고요? 와, 미치겠네. 어, 언제요?"
" 배신당했대. 믿는 게 처음이어서 배신도 처음이라더군."

 은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본인은 고인줄도 몰랐건만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 아, 아이씨이……. 나, 나는 정말 배, 배신 안 했는데……. 씨이, 억울해."

 은찬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성에게 하소연을 해댔다.

" 나, 나는 말하려고 했었어요. 기회 봐서 말하려고……. 말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말하면 가게에서 쫓겨날 것 같아서 못했다고요. 이렇게 화낼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말 못한 건데……. 다, 다시 못 볼까봐……."
" 그 녀석이 그렇지. 밸런스가 좀 안 맞아. 신선같이 초탈한 부분도 있고, 속물스런 부분도 있고, 애 같은 면도 있지. 지금은 애야. 삐쳐서 누구 말도 안 들으려고 해."
" 그런 줄 알고는 있었는데……."

 그가 재벌인 걸 알았을 땐 쌓인 감정이 서럽고 아까워 울었다. 그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언젠가는 그가 떠나버릴 거라는 두려움, 다신 보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거라는 불안 때문에 눈물이 났다. 그런데 이제 그게 현실로 닥친 것이다. 막막하다.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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