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모르는 여자
" Raindrops are falling on my head, And just like……."

 출근하는 차 안에서 한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거리는 분홍 철쭉과 붉은 장미가 봄비를 맞아 촉촉하게 젖어 있다. 차 유리에는 수정보다 맑은 빗방울이 미끄러지고 차 안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한결은 핸들을 두드리는 자신이 꽤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쁘니까 가게 일이 점점 좋아지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면 일 때문만은 아니다. 좋아진 게 하나 더 있다. 고은찬. 녀석을 보는 게 즐겁다. 의견 충돌로 말싸움을 해도 재미있다. 서로 말꼬리를 잡으며 티격태격하는 건 심심한 데 최고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불길처럼 화르르 일어나는 성질머리를 놀려먹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다.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즐겁고, 때론 행복하단 생각마저 든다. 귀 좀 뚫었다고 파르르 떨던 걸 생각해 보라. 펄쩍펄쩍 뛰며 화내다가도 금방 풀어지는 단순한 놈. 절로 웃음이 난다.

 한결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머쓱해져 버렸다. 조금 열어둔 창문으로 빗방울 몇 개가 들어왔다. 빗방울 번진 차 문에 한팔을 걸치고 문득 생각해 본다. 이게 뭔가. 이 느낌이 뭔가. 고아란 얘기까지 다 해버리고. 왠지 그 녀석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답답해서였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 대상이 그 녀석이었다는 게 심란한 거다. 그 녀석이어야 했다는게…….

 한결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 될 대로 되라지."

 게이냐고? 그게 뭐? 게이면 어때, 좋으면 됐지. 불륜이나 원조교제보다 낫지 않은가. 어쨌든 남들이 정해놓은 거에 굴할 생각 없다. 사람들 눈치 볼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사내 녀석이 좋아진다고 해서 뭐 나쁜 건가? 당장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그렇다는 건데…….

"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야. 친구끼리도 뭐 껴안을 수도 있고 그런 거니까. 우정이나 뭐 그런 걸로……. 녀석이 워낙 귀엽게 굴기도 하고……. 그게 좀 넘어서면 끌리기도…… 에잇, 빌어먹을!"

 그래. 그렇다고 아주 고민이 안 될 순 없는 거지. 이 몸도 정규 교육을 받은 놈이고, 도덕 점수도 꽤 좋았으니까. 눈과 귀가 뚫려 있는 이상 사회에 길들여질 수밖에 도리가 없는 거지. 하지만 내가 좋고, 그리고 그 녀석이 좋다면 된 거 아닌가? 뭐, 이 몸은 이 몸이 정한 대로 사는 거지. 그래, 그냥 흐르는 대로 가보는 거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골치만 아파.

 가게가 좋아지는 건 직원들도 마찬가지인지 요즘에는 회의를 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을 막 내놓는다. 그중에서 먼저 두가지를 실행해 보기로 했다. 100번째마다 손님에게 예쁜 선인장 화분을 선물하는 것과, 아침 손님들에게 사과 한 알씩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자는 낙균의 제안이고 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은찬의 제안이다. 선인장은 전자파 차단에 좋고 사과는 아침에 먹으면 좋다니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해볼 만하다.

 가게에 거의 다다를 무렵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
[ 엎드려 절 받는 거 싫다. 와서 제대로 인사해.]
" 일이 좀 있어서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요. 외박 사유는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 장부 들고 들어와서 밥 사. 감자 칼국수 먹고 싶어.]
" 아직 석 달 안 됐는데요. 우리 거래에 변동 사항 있습니까?"
[ 두 달 장사한 거 보면 알조지. 5시에 회사 앞에 와서 차 대고 있어.]
" 알겠습니다."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몰라도 회사와 관련된 것인 건 틀림없다. 어제 아버지가 퇴원하실 때는 한규 형이 그랬다.

" 대리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아. 그래야 아버지가 안심하고 물러나시지. 지금은 쉬시고 싶으셔도 불안해서 못 쉬시는 거야. 결국 네가 아버지를 일로 내모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억지가 아니라니까. 난 알아. 말씀은 안 하셔도, 너한테 엄하게 하시는 것도 나보다 더 믿고 계시니까 그러는 거야. 그거 알아? 우리 어렸을 때 모습이랑 지금 바뀐 거. 난 말썽꾸러긴데 넌 말 잘 듣는 애였잖아. 어머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 치 빈틈도 없이 뭐든 잘했지. 침대 정리도 잘해놓고, 책상도 보면 늘 깨끗했어. 아버진 서재 정리도 너한테 맡기셨잖아. 목록까지 다 작성하고. 1mm 어긋남도 없이, 그냥 편편한 벽처럼 매끈하게 꽂아 놓아서, 어머니가 손님들만 오시면 자랑을 하셨지. 열 살짜리가 도서관 사서 같았어. 근데 언제부턴가 변했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면서 부모님께 반항을 하기 시작했지. 사춘기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거냐? 아직도 사춘기야?"

 듣고 보니 머리가 복잡했다. 할머니가 주신 3개월은 다 되어 가는데 승부를 어떻게 결판내야 할지 모르겠다. 매출은 3배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수익으로 따지면 턱없이 부족하다. 할머니께 빌린 채무를 다 갚으려면 적어도 1년은 이대로 장사를 해야 할 것이다. 할머니가 이 채무를 따지시느냐, 그리고 자신이 그걸 받아들이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다. 매출이라고 하셨으니 가게에 투자한 돈은 계산에 넣을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면 아마 할머니가 실망을 하시겠지. 생각할 시간을 3개월이나 줬는데 아직도 달아나려고만 하느냐고 하실 것이다.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다.

 한결이 차 문을 닫는데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은찬이 뛰어나왔다. 손에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들려져 있다.

" 사장님, 이것 좀."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던 한결은 기가 막혔다. 은찬이 한결의 손에 쓰레기봉투를 맡기고 휙 들어가 버린 것이다.

" 야!"

 뒤늦게 소리쳐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한결은 투덜거리며 쓰레기봉투를 지정된 장소에 갖다두고 가게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나오는데 은찬이 커피를 가져왔다.

" 오늘은 테이크아웃 손님이 별로 없을 거 같죠? 비가 와서 어디 줄서서 기다리겠어요? 밖에다 천막을 칠걸 그랬나? 비 올대 대비해서 천막을 치는 게 좋겠어요. 바쁘니까 빨리 드시고 저 좀 도와주세요. 사과 씻어야 돼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한결은 소매를 걷고 은찬과 함게 사과를 씻어 바구니에 담았다.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에 운치가 풍겼다. 왠지 기분이 센티멘털해진다. 녀석과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싶다. 한가로이…….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쓸고 간 뒤 가게 안은 조금 한가로워졌다.

" 커피 맛이 좋아요. 제가 먹어본 것 중에 최고예요. 앞으로도 맛있는 커피 부탁드릴게요."
" 친절하다."
" 달랑? 그게 다야?"
" 최고의 칭찬이죠, 뭐."

 은찬과 낙균이 고객의 소리 카드를 읽고 있다.

" 완전 감동. 바빠서 그냥 가려다가 커피향의 유혹에 져서 결국 줄을 섰는데요. 앞에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손님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더라고요. 역시 은찬 오빠 최고. 어떻게 손님들 입맛을 다 외울까요? 머리도 정말 좋은가 봐요. 호호호."
" 호호호는 뭐예요?"
" 정말 그렇게 적어놨어. 여기 봐."

 둘은 카드를 보며 웃고 분석하며 재미있어 했다.

" 여기에는 샌드위치나 케이크같이 커피랑 어울리는 걸로 아침을 대용할 만한 건 할 생각이 없냐고 적어놨어요."
" 그것까지 만들려면 도대체 아침에 몇 시에 나와야 하는 거야?"
" 다른 데 주문해서 받아야죠 뭐. 그것까지 우리가 다 어떻게 만들어요."
" 우리 엄마가 샌드위치는 기가 막히게 만드는데."
" 어, 그래요? 그럼 한 번 부탁드려 봐요."
" 안 돼. 우리 엄마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손이 워낙 느리시거든. 자, 그리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

 은찬은 카드 수십장을 한쪽으로 밀쳤다.

" 뭔데요?"
" 선기 팬레터. 야, 노선기. 가져가."

 선기가 와서 카드를 들여다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 우리 현수막 같은 거 안 겁니까?"

 은찬이 낙균과 함께 선기를 쳐다보았다.

" 어제 잡지사에서 취재해 갔잖아요. 저기 식당에는 현수막 걸렸던데. 방송에 나왔다고."

 선기는 무안한 표정으로 쓱 사라졌다. 잠시 썰렁한 침묵이 흘렀다.

" 쟨 어느 별에서 왔을까?"

 은찬의 말에 낙균이 쿡쿡 웃었다. 그때 홍 사장이 은찬을 불렀다. 은찬이 돌아보자 가게 입구에 꿩 깃털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은찬은 인사하며 주문을 받을 준비를 했다. 커다란 검정색 우산을 쓰신 할아버지는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못마땅하신 듯 말했다.

" 오늘 추천이 콘파냐야? 그냥 저렇게 써놓기만 해서 어떻게 알아? 그림 같은 것도 붙여놓고 해야지."
" 아,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림."

 은찬은 재빨리 웃으며 적극 동의하고서 조심스레 여쭸다.

" 오늘은 뭐 드릴까요? 그냥 커피……."
" 오늘은 뭐가 당기는지 딱딱 알아채지 못하나?"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채요. 독심술사도 아닌데. 하지만 은찬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 아, 그럼 제가 맞춰볼까요? 음…… 카, 카페라떼 어떠세요?"
" 밍밍해서 싫어."
" 그럼 깔끔하게 그냥 아메리카노."
" 안 내켜. 그것도 딱딱 못 맞추고. 블루마운틴으로 줘."
" 네. 블루마운틴."

 은찬은 얼른 홍 사장에게 주문을 말하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절대로 안으로 들어와 마시지 않았다. 커피를 주문하시고는 바깥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셨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와 의자가 젖어 있다. 가게 앞에 서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은찬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다 결국 앞치마 앞에 수건을 넣고 밖으로 뛰어갔다.

 은찬은 좁은 처마 밑에 의자를 옮겨놓고 물기를 닦았다. 가게 안에선 직원들이 뭐 하나 쳐다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우산 밑으로 은찬을 지켜보고 있었다.

"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은찬은 서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가만히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오셨다. 할아버지가 앉으시는 걸 보고 은찬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커피 나오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말하고 가게로 들어가려는데 할아버지가 문득 말씀하셨다.

" 우리 손자들은 나랑 통 말을 안 해."
" 예?"
" 내가 무섭게 생겼나?"
" 아, 아뇨."

 은찬은 옆에 서서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멋있으세요, 할아버지. 특히 모자가 죽여요."
" 흠, 흠."
" 아, 죽인다는 게 그러니까…… 짱이란… 아니 그게……."
" 따봉?"
" 아, 네! 따봉! 그거예요."
" 쯧쯧, 젊은 놈이 총기가 그렇게 없나. 여기 와서 내가 제일 말을 많이 해. 노인 회관에 가서 늙은 것들이랑 얘기해 봐야 실속이 없잖아. 젊은 사람들이랑 어울려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아는데……. 커피 안 줘?"
" 금방 갖다드릴게요."

 쏜살같이 가게로 달려간 은찬은 얼른 커피를 가져와 할아버지께 건넸다. 먼저 향을 맡으신 할아버지는 한동안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에 대해 얘기하셨다. 서서 듣는 동안 은찬은 뭔가를 깨달았다. 그동안 커피가 정말 마음에 안 드신 게 아니었다는 걸.

 할아버진 블루마운틴의 농도가 옅다고 타박하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가신 뒤 은찬은 뭔가가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행복하고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람도 느껴지고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생겼다.

" 형, 무슨 생각해요?"

 낙균이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은찬을 보며 물었다.

" 아무래도 내가 천직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
" 천직이오? 그럼 태권도 사범은 이제 안 할 거예요?"
" 운동도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이게 더 보람있는 거 같아. 손님들이 우리 커피 마시면서 만족한 표정 지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져. 특히, 월요일 아침에 말이야. 피곤해하던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려고 줄서 있다가 서로 인사 나누고 웃는 거 보면 뭐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한 거야. 넌 안 그래?"
" 나도 그래요."
" 기운 없어 보이면 막 기운 북돋워 주고 싶고. 그렇지?"

 선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은찬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기도 처음보다 표정이 많이 밝아지고 말수도 늘었다. 은찬은 커피프린스가 사람들에게 미소를 주는 공간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 꿩 깃털 할아버지 말이야. 커피에 조예가 깊으셔. 나보다 더 많이 아시더라. 근데, 내가 좋으신가 봐."
"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 할아버진 형만 좋아하잖아요."
" 더 잘해드려야지."
" 더 잘하지 마세요. 우리랑 비교돼요."
" 전에 아저씨가 보시던 커피 책 어디 있지? 할아버지랑 대화 하려면 공부해야겠어. 야아, 고은찬이 공부를 다 하게 되네."

 그때 가게 문을 밀고 누군가 들어섰다. 유리 밖으로 그 인물을 주시하고 있던 한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쳐다봤다. 은찬이 외쳤다.

" 어, 진하림!"

 휙 뛰어 들어온 하림은 곧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세, 세상에!"

 하림은 맨발에 다리를 절뚝거리는 데다 온 얼굴이 멍투성이였다.



 한결이 하림을 데리고 나갔다. 홍 사장이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운동화를 신기고서 차에 태워갔다. 은찬은 심상찮았던 한결의 표정 때문에 걱정이 됐다. 하림이 울면서 말하길 며칠동안 계속 학교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폭발하신 아버지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자기 방에 갇혔단다. 그게 이틀 전인데 그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방문에 못을 쳐버렸기 때문이란다. 그 부분에서 은찬은 흥분하고 말았다. 어떻게 자식을 굶길 수가 있나! 먹는 건 생존가 관계된 문제인데. 그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란 얘기다.

" 네가 대체 뭐라고 했기에!"

 은찬이 흥분해 묻자 하림이 부은 입으로 말했다.

" 내가 잘못하긴 했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 야, 그게 아버지한테 할 소리야?"

 낙균의 말에 하림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 모르면 가만 있어!"
" 자식, 복에 겨워가지고……."
" 뭐!"
" 야, 그만 해."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를 은찬이 막았다. 낙균의 처지로 보면 하림의 분노가 투정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둘이 바꿔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 낙균은 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을 테고, 하림은 의대를 안 가도 됐을 텐데…….

 그때, 가만 듣고만 있던 한결이 말했다.

" 의대를 안 가겠다면 어쩌시겠단 거야?"
" 집에서 내쫓고 호적에서 파겠대요. 오늘 저녁까지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걸 도망 나왔어요."

 하림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서 생각해 봤어?"

 은찬이 물었다.

" 의대가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예대를 가고 싶은 거야. 고2 때까진 나도 의대를 갈 작정으로 공부를 했어. 근데 취미로 시작한 미술이 더 재미있는 걸 어떡해. 회화도 공부하고 싶고 영화도 공부하고 싶어. 내가 되고 싶은 것도 따로 있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냐.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병원, 내가 아니면 아버지 대에서 문 닫게 되니까. 서운하신 거 이해하고,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도 들어. 그렇다고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고 싶진 않아. 난, 내 꿈은……."
" 야, 울긴 왜 울어. 사내자식이……."

 은찬이 다독였더니 하림이 달라붙었다. 은찬은 엉거주춤하게 서서는 하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 일어나."

 한결이 말했다.

" 신발 하나만 갖다 줘. 신고 따라와."

 그렇게 나간 뒤로 한결과 하림은 벌써 몇 시간째 감감무소식이다.

"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 죽겠어요. 따라가 볼걸."
" 그렇게 걱정되냐?"
" 사장 성질이 좀 개떡 같아야 말이죠."
" 그렇다고 하림이를 또 패겠냐, 하림이 아버지를 패겠냐."
" 성질부리다가 본인이 맞을까 봐 그래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은찬은 빤히 보는 홍 사장의 시선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 근데 너 언제 귀 뚫었어? 돈 주고 고통받는 그런 야만적인 행위는 절대 할 생각 없다더니?"
" 그, 그렇게 됐어요."

 은찬은 홍 사장을 피해 유리문 앞에 서서 밖을 보았다. 비가 하루 종일 올 모양이다. 궁금한 사람은 안 오고…….

 저녁 무렵 하림이 반창고를 붙인 얼굴로 들어섰다. 치료를 해선지 얼굴이 훨씬 밝아 보였다. 은찬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

" 왜 혼자야? 사장님은?"
" 저녁 약속 있대. 퇴근 시간 전에 들어오신다고 했어."
" 어떻게 됐어?"

 하림을 다그쳐 묻는데 연이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요즘에는 입 소문이 나선지 손님이 늦은 밤까지 이어져 10시에 문 닫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가게에는 좋은 일이지만 새벽에 나와야 하는 직원들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퇴근 무렵에서야 하림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들어올 때의 밝은 표정이 좀 가라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음이 무거운 모양이다.

" 먼저 병원에 갔어. 치료받고 링거 맞고 진단서 뗐어."
" 진단서? 그걸 왜?"
" 아버지 고소하려고."
" 뭐!"
" 야, 이 미친놈……."
" 사장님이 그런다고 하셨다고. 어차피 고소인은 나겠지만."
" 아이씨이. 내가 따라갔어야 하는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 또라이 사장을 어째야 하나."
" 죽 한 그릇 먹고 아버지 병원에 갔어."
" 니 아버지 엄청 화나셨겠다."
" 병원이 발칵 뒤집혔지 뭐. 나가라고 소리소리 지르시고. 그러니까 사장님이 진단서 내놓으면서 고소하겠다고 하고."
" 완전 분노하셨겠네."
" 아니. 오히려 얼어붙어서 아무 말 못하시는 거야. 그때부터 살벌했어. 아버지는 네가 뭔데 부자간에 끼어드느냐. 꺼져라."
" 사장님은?"
" 자식을 소유물로 보지 마라. 한 번 맞았다고 생각을 바꾸는 바보로 만들지 마라. 법적으로 고소할 수 있는 인간이고 성인이다. 사람 대 사람, 남자 대 남자로 봐라. 자식이 부모한테 효도하는 방법은 착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 아니냐. 그런데 부모들은 가끔 착각을 한다. 당신의 뜻대로 살면 자식이 행복할 거라고. 나중에 하림이가 후회하더라도 그건 하림이 몫이고 진하림 인생이다. 진하림은 이미 성인이니까 제 인생을 선택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그 말을 또라이 사장이 다 했단 말이야? 의외로 차분했네?"
" 표정은 장난 아니었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은 처음 봤어."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 나 집 나와서 가게 바닥에서 잔 얘기했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가까이나 그렇게 한다는 건 하고 싶은 건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거다. 이틀의 시간을 드리겠다. 아들과 시간을 두고 차분히 얘기해 볼 의사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 그리고 명함 드리고 나왔어."
" 아버지가 가만 계셔? 장난 아니게 화나셨을 거 같은데……."
" 무시무시하게 소리치셨지. 다신 나 안 보겠다고."
" 뭐야? 그럼 원점인 거네?"
" 원점은 아닌 거 같아. 무섭게 그러셨지만 아버지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시게 된 것 같고. 나도 좀……."
" 왜?"
" 병원 가니까 환자는 밀려 있고…… 점심도 못 드시고 진료중이라고 그러더라고."

 하림이 머리를 떨어뜨렸다. 은찬은 덩달아 기분이 우울해져 버렸다. 깊이 한숨을 쉬며 하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부모와 자식은 뭘까? 서로 애틋하면서도 상처 주게 되고,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마음 아파하고……. 모르겠다. 무척 복잡한 관계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한결은 할머니의 단골 감자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할머니의 단골 전통 찻집에 앉아 감잎차를 마주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대금 소리를 듣던 할머니께서 작은 핸드백을 여셨다. 거기서 낡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한결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여자를 보고 할머니를 보았다.

" 왜 이러세요? 이러면 약속이 틀리잖아요."
" 선 보라는 여자 아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잠깐 뜸을 들이신 후 나지막한 음성으로 찬찬히 말씀하셨다.

" 너 낳아준 생모란다."
" 예?"

 한결은 미간을 찡그리며 사진을 보았다. 그러다 점점 눈이 커지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 같았다.

" 니 아버지가 동이건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대지. 마산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났어. 그거 수습하느라 한 달 정도 거기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던 모양이야. 클럽에서 노래를 했다고 해. 돌아와서 두 달쯤 뒤였나. 부쩍 술이 잦고 잘 웃지를 않는 거야. 일에도 실수가 있고. 낌새가 수상해 알아봤더니 그 여자가 널 가졌어."

 한결은 충격에 빠져 굳어버렸다.

" 하, 할머니……."
" 너무 갑작스러워 놀랐을 거다. 근데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미안하다, 한결아. 넌 네 엄마가 낳지 않았어. 그래도 어미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너는 알지? 서운해하면 안 된다. 응?"
" 하, 할머니. 나, 나…… 그, 그럼, 저 우리 아버지 아들이에요?"
" 그럼, 당연하지. 니 아버지가 그 확인도 없이 널 데리고 왔겠지? 넌 틀림없이 우리 집안 핏줄이야."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피가 미친 듯이 휘돌아서 몸이 뜨거웠다. 뒷머리로 솟구칠 것만 같았다. 좋아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바보 같았던 자신, 확인 조차 한 번 해보지 않고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분노와 후회 때문이었다.

" 한결아……."
" 이, 이 여자는 어디……."
" 내가 미국에 보냈다. 한국 사람 많지 않은 곳에 터를 마련해 줬어. 근데 미국 가자마자 거의 한 달도 안 돼서 실족사했단 소식을 들었다. 관광하러 산에 갔다가."
" 수, 순순히 자식 떼놓고…… 가는 여자면……."
" 이 아버지 불뚝하는 성질을 제일 빼닮은 네가 더 잘 알겠지. 니 아버지는 평생 살 수 있는 돈 줄 테니 애랑 같이 떠나라고 했던 모양이야. 그런 걸 내가 애는 안 된다고 했다. 넌 우리 집안 핏줄인데, 클럽에서 노래하는 여자한테…… 니 생모한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이 할머니 욕심이었지. 그래서 너 두고 가도록 구슬렸어. 그때 스물넷인가 그랬다."
" 복지원은 무슨 얘기에요? 복지원에서 데려온 거 아니었어요?"
" 너……."
" 그냥, 우연히 그것만 알고 있었어요."
" 그런 줄도 모르고……. 진작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한결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할머니께 물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물 한 잔을 깨끗이 비웠다.

" 언제 알았니? 생각이 많았겠구나."
" ……."
" 네 엄마 때문에 그냥 데려올 수가 없었어."
" 그래서 입양 형식으로 데려오셨어요?"
"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것도 다 허사였지. 어미가 눈치가 워낙 빨라서 금방 알아챘어. 반년도 못 가 내가 다 얘기를 했다. 벌써 각오를 하고 있던 건지 놀라지도 않더구나. 한두 달인가 힘들어했지. 그러고 마음을 잡더구나 내가 네 엄마한테는 백 번, 천 번 절을 해도 모자라지."
" 아버진요?"
" 노발대발해도 지가 죄인인데 할 수 있나. 유구무언이지."

 한결은 다시 사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고 보니 클럽에서 선전용으로 쓰일 법한 사진이다. 짙은 화장에 굽슬굽슬한 머리. 어머니는 화려하고 재미있으면서 쿨한 사람이다. 남편의 외도로 낳은 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워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모르겟다.

" 보고 싶니? 핏줄은 당긴다는데……."
" 아니요. 아무렇지 않아요. 보고 싶지도 당기지도 않아요. 그냥 모르는 여잔데요 뭐."
" 내가 원망스럽니? 생모랑 떼놔서……."

 한결은 고개를 들고 할머니를 보았다. 인자한 얼굴에 회한이 가득했다. 붉어진 눈가가 가슴 아팠다. 한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한결은 고개를 저으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 아, 아니요…… 아니요, 할머니."
" 내가, 내가 이제 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를 알겠지?"

 한결은 빠르게 눈가를 훔치고 할머니를 보았다.

" 회사 때문이에요?"
" 네가 경영에 욕심도 있고 재능도 있다는 걸 안다. 회사에 들어오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문제야. 난 너랑 네 아버지가 좋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네 아버지가 너한테 엄했던 거, 한규나 한희한테 하는 거랑 달랐던 거 안다. 너한텐 작은 실수도 용납 안했지. 한규는 꾀병 부리면서 학원을 더러 빼먹어도 신경도 안쓰고선, 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냈어. 내가 다 알아."

 한결은 회상에 잠겨 말했다.

" 한희 누난 피아노 시간에 자도 놔뒀어요. 전 피아노 시간에 과학책 보다가 아버지한테 종아리를 맞았고요."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측은한 눈길로 한결을 보았다.

" 자격지심이야. 네 엄마가 잘하니까 더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그런 거지. 제 실수를 갚느라……. 한결아."
" 네."
" 세상 어느 아들도 아버지와 친하기 쉽지 않다더구나."

 한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그랬어. 할아버진 네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놈이라고 하셨지. 너한테 한 반만큼도 당신 아들들한텐 안 하셨어. 통 곁을 안 내줘서 네 아버지도 참 어려워했잖니?"
" 네……."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그런 게 있나 보더구나. 어느 순간부턴가 이해를 하고 잘 지냈어. 같이 골프도 하고 등산도 다니고. 나중에는 친구처럼 그렇게 허물없이 다녔어. 너도 그러렴. 아버질 이해하고……."

 한결은 소리 죽여 울었다. 눈물을 손으로 감추며 자신에게 말했다.

 뭐가 서러운 거냐, 바보 같은 놈. 등신…….



 할머니와 헤어진 후 한결은 차를 몰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두어 시간 지난 즈음에 흐르는 강물을 보며 앉아 있었다. 공허한 마음에 한 얼굴이 떠올라 휴대폰을 꺼냈다.

[ 네! 커피프린스입니다.]

 공복만 아니면 언제나 힘찬 목소리다. 한결은 피식 웃고서 일부러 딱닥하게 말했다.

" 인마, ' 맛있는' 은 왜 빼먹어?"
[ 언제는 촌스럽다고 빼라고 하고선, 참 자기 멋대로 한다니깐.]
" 내가 사장인가 그렇지, 인마. 장사는 어땠어?"
[ 궁금하긴 하세요? 열라 바빴어요. 역시 아이스맨이 없으니까 손님이 막 오던데요?]
" 전화라고 막 까불지?"
[ 안 들어오실 거예요? 하림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아, 하림이 문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 근데 애를 아주 나오게 하면 어떡해요?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해결을 봐야지. 고소는 또 뭐예요? 쯧쯧.]
" 그러는 너는 왜 애를 가게에서 재워? 집에 돌려보내지는 못할망정 가게 바닥에서 재우냐? 넌 좀 혼나야 돼."
[ 그, 그건 잘못했네요.]

 은찬이 금세 풀 죽은 목소리로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자 한결은 같이 김이 빠져버렸다. 은찬이 바득바득 대들어야 이쪽에서도 기운이 나는데 말이다. 은찬에게 전화를 한 건 기운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게 차분한 위로보다 더 좋으니까.

[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요. 하림이 어떡해요?]
" 동이호텔로 오라고 해. 나도 지금 갈 테니까."
[ 어, 거기서 재우게요? 자식 좋겠네. 특급 호텔에서 다 자 보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 하다 하다 이젠 목소리 갖고 시비냐?"
[ 아니, 평소랑 좀 다른 거 같아서…….]

 사내놈이 예민하긴.

" 감기 기운이 있나 보다."
[ 밤에 싸돌아다니니까 그렇죠. 쯧쯧. 영양가 없는 클럽 싸돌아 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가서 쌍화탕이나 드시죠. 그 연세에 클럽에서 놀고 싶으세요?]
" 인마, 사장한테 싸돌아다닌다가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이 막 기어오르고 있어."
[ 가게 일 안 돌보고 놀러 다니는 걸 싸돌아다닌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 말뜻도 모르셨어요? 아, 퇴근 시간이다. 이만 끊겠습니다.]
" 야! 이 자식, 너!"

 한결은 성질을 부리며 소리치다가 끊어진 전화기를 보고 싱긋 웃었다. 녀석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녀석과 얘기하면 묘하게 편안함을 느낀다.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이게 된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 귀여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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