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린보이
가게는 가속도가 붙어 점점 더 손님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한가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게릴라 공격을 계속해 댔다. 급기야 제일 왼쪽의 유리를 터서 또 하나의 주방을 배치했다. 그쪽은 홍 사장과 비교적 손이 빠른 낙균에게 맡기고 안쪽의 주방은 한결이 직접 맡았다. 테이크아웃 손님들을 위해 바깥 테이블을 늘리고 밖의 조경과 시설물에도 좀 더 신경을 썼다. 신문과 잡지, 책 등을 배치하고, 우체통에는 고객의 소리를 받도록 했으며,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도록 스피커를 밖으로 빼놓았다. 다음주부터는 주문서 사용을 시범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 은찬 오빠, 나 왔어요."
" 어, 안녕. 카푸치노지?"
" 네. 오빠가 만들어 줘요."

 은찬을 찾는 여자 손님도 많다. 특히 이 여자, 근처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하고 있다는 여잔 오후 4시경에 와서 은찬을 유혹한다.

 한결은 홍 사장의 얘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슴이 깊게 파인 셔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은찬에게 눈웃음을 쳐대는 여자 때문이다. 은ㅊ나이 그 가슴에 눈길을 주는지 계속 체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자신이 싫어 미치겠는데 어쩔 수가 없다.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 오빠, 우리 가게에 놀러 와요. 내가 서비스 많이 넣어줄게요. 아니, 내가 쏠게요."
" 그래. 언제 시간 봐서……."
" 아이 참, 그 언제가 도대체 언제야?"

 고은찬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ㄴ데 꼬박꼬박 오빠라니 어이가 없다. 그 여자를 째려보는 한결을 홍 사장이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도 멎었고 홍 사장이 쳐다보고 있는 데도 한결은 알지 못했다.

" 나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는데. 심야 영화나 보러 갈래요? 재미있는 거 나왔다던데."
" 아, 영화 본 지 진짜 오래 됐다. 난 액션 영화 좋아하는데. 그거 액션 영화야?"
" 그게 오빠, 제목이 뭐더라……."
" 야, 고은찬!"

 한결은 은찬이 카푸치노를 완성하는 걸 보고서 날카롭게 불렀다.

" 네?"

 자신을 부르는 한결을 보고 은찬은 얼른 여자에게 카푸치노를 건넸다.

" 나, 가봐야겠다. 영화는 담에 보자."

 달려온 은찬을 보고 한결이 말했다.

" 손님이랑 시시덕거리지 마."
" 네? 제가 언제……."
" 친절한 거랑 시시덕거리는 건 엄연히 다른 거야. 넌 방금 시시덕거린 거야. 알겠어?"
" 마, 말도 안 돼!"
" 꼭 일 못하는 놈이 문제 일으키게 돼 있어. 그러니까 네가 제일 조심해야 돼."
" 제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고!"
" 시끄러, 자식아."

 은찬이 생사람 잡는다며 펄쩍 뛰었지만 한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을 붙들고 자기가 진짜 시시덕거렸는지 묻고 다니는 은찬을 보며 한결은 자폭하고 싶은 심정에 빠져들었다.

 미쳤냐, 최한결? 대체 왜 이래? 왜 저 자식한테 이렇게 신경을 쓰냔 말이야. 아, 미치겟네, 정말! 저 자식 주위에 있는 인간들이 다 싫다. 남녀 불문, 노소 불문이다. 저 자식이 딴 사람한테 잘해 주는 것도 싫다. 근데 저 자식은 아무에게나 잘해 준다. 헤픈 놈. 헤픈 자식!

 하림을 집으로 보낸 뒤 새로운 아르바이트 직원은 채용하지 않았다. 한결은 일주일 더 기다려 볼 생각이다. 그 뒤에도 하림에게서 연락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직원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날씨가 좋아지니 주말에도 종종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둘째 달의 결산을 봤는데 성적이 나쁘지 않다. 처음 생각했던 것에 비해선 턱도 없는 성적이지만 첫째 달에 엄청난 마이너스를 봤기 때문에 수익이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한결은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걸 보고 말했다.

" 오늘 회식 어때?"
" 정말요?"
" 우와, 이게 얼마만의 회식이냐. 삼겹살 먹어요."
" 그래? 꽃등심으로 하려고 했는데……."
" 꽃등심! 콜! 콜!"

 억울했던 건 어디 가고 금방 좋아라 하는 은찬을 보고 한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덩달아 번지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다.

 요즘 커피프린스는 아침형 가게가 되었다. 새벽같이 문을 여는 대신 저녁 9시면 문을 닫는다. 저녁 식사 후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이 있으면 10시까지 열어둘 때도 있지만 그땐 홍사장이나 한결이 남고 나머지는 퇴근이다. 두 달 동안 일하면서 하루도 못 쉬게 한 게 미안해서다. 한결은 직원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 줄은 미처 몰랐다. 고마움과 미안함 같은 것들이 뒤섞여서 그들에게 더 애정을 쏟게 만든다. 이런 묘한 느낌은 처음이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앞치마를 치우고 문 닫을 준비를 하는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찬과 선기가 머리를 맞대고 쑤군대고 있었다. 불필요한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떤 땐 필요한 말도 아끼는 선기가 그나마 가끔 얘기하는 게 은찬이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고은찬에게는 사람의 말을 끌어내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

 한결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뒤에도 은찬과 선기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뭔가를 들고 누가 들을세라 속닥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상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거의 매일, 고은찬만 보면 피어오르는 이 감정에 휩싸여 혼란스럽다. 오죽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박도헌의 형에게 전화를 했겠는가.

 그 통화는 이랬다.

[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주고 웬일이냐?]
" 죄송합니다, 형님. 한 번 찾아뵙는다는 게 바빠서 이제야 전화를 드리네요. 뭐 하나 하느라고 정신이 좀 없었어요."
[ 아, 도헌이한테 얼핏 들은 것 같네. 커피집이던가?]
" 네. 그냥 심심풀이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 그래, 재미는 있고?]
" 재미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심심하지는 않아요. 전화 드린 건 뭐 하나 여쭤볼 게 있어서요. 친구 녀석 하나가 고민에 빠진 것 같은데, 그게 아무래도 정신과 쪽 문제가 아닌가 싶거든요.
"
[ 증상이 어떤데?]
" 그게…… 그 녀석이 최근에 알게 된 놈이 하나 있는데, 이놈이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겼다는 거예요. 행동하는 거나 말투를 보면 사내놈이 분명한데, 스물넷이나 먹어서 생긴 게 완전 미소년과랍니다. 근데 그 녀석이 이놈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예뻐 보이고, 마, 만지고 싶고…… 암튼 그렇다는 건데. 기가 막힐 노릇이죠. 게이도 아닌데 말이죠."
[ 친구면 너랑 동갑이거나 비슷할 거고.]
" 동갑입니다."
[ 뒤늦게 자아 발견한 케이스인가?]
" 예에? 게이라고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경우가 없었다는 데요?"
[ 속단할 일은 아니고.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으니까 증세가 더 심해지면 우리 병원에 한번 와보라고 해. 야, 근데 얼마나 예쁘게 생긴 놈이기에 그런다니? 네 나이면 차라리 확 진도를 나가보라 그러지. 당연히 여자 쪽 경험도 있을 거 아냐?]
" 있죠."
[ 그런 경우에는 가벼운 신체 접촉 같은 걸 시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걸.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막상 포옹하거나 키스까지 진도를 나가면 뜨악할 수도 있으니까. 일종의 자기 환상의 사로잡힌 걸 수도 있어. 미소년에 대한 호기심 같은 걸 수도 있고…….]

 한결이 상담한 내용을 곱씹어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유주였다. 걸어가면서 전화를 하는 건지 목소리에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 아직 가게에 있지? 나 지금 거기로 가는 길인데.]
" 왜?"
[ 오늘 미술관에 취재 온 기자가 맛집 잘 아는 곳 있으면 소개 해 달라고 하기에 커피프린스를 추천했거든.]
" 쓸데없는 짓 했네."
[ 왜? 장사 더 잘 돼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런 줄 알고 도와주려고…….]
" 아냐. 고마워. 그래서 지금 취재 온다고?"
[ 아니. 소품 몇 개 갖다 주려고. 지난번에 보니까 거기 왼쪽 벽이 좀 허전한 것 같더라. 잡지에 사진도 실릴 건데 잘 나와야 하잖아. 낮에 가려고 했는데 미팅이 이제야 끝났어. 아, 배고프다. 나 밥 좀 먹여줘.]

 그 말을 듣는데 눈앞의 은찬이 클로즈업돼서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파티에서 한성과 같이 온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입바람으로 머리를 날리는 걸 본 순간 고은찬이 떠올랐다. 어, 저건 고은찬의 버릇인데 했다. 일시적으로 여자의 얼굴에 고은찬의 얼굴이 겹쳐졌지만 한성이 안고 가버리는 바람에 흐트러져 버렸다. 유주의 허물어진 표정에 분노가 일어서 잊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은찬을 보니 다시 그 여자가 떠오른다. 그런 글래머의 여자와 고은찬이라니, 생각해 보면 사실 무척 언밸런스다. 그 여자는 긴 머리에 눈이 크고 입술이 육감적이고 가슴이 봉긋했으며, 다리가 길고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고 몸에 탄력이 넘쳐 보이며…… 역시 고은찬과는 거리가 멀다. 이젠 별 상상을 다 하는구나, 최한결. 드디어 미친 거냐? 자기 환상에 빠진 거냐고. 젠장.

" 알았어."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넣는데 은찬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 사장님, 안 가요?"
" 오늘 회식은 니들끼리 해야겠다."
" 아, 왜요!"

은찬은 짜증난 표정으로 대들 듯이 말했다. 한결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도대체 이런 녀석 어디가 예뻐 죽겠단 거야!

" 너는 내가 아니라 카드만 있으면 되잖아."

 한결은 지갑에서 골드 카드를 꺼내 은찬에게 내밀었다.

" 자, 받아. 작작 좀 먹고."
" 어, 이걸 뭘 믿고 날 주시나?"

 은찬은 금세 헤헤거리며 카드를 잽싸게 낚아채 갔다. 한결은 이 식충이를 두고 잠시라도 고민했던 자신을 향해 말했다.

 미친놈.

" 2차에 3차까지 가야지."

 휘파람을 불며 나가는 은찬의 뒤통수를 퍽 쳤다.

" 내일 단체로 지각할 일 있어! 늦기만 해. 다 잘라버릴 거니까."
" 쳇. 어쩐지 순순히 카드까지 준다고 했네."
" 줘도 불만이냐?"
" 그럴 리가요, 사장님. 불만 없이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사장님은 어디 가십니까? 혹시 데이트?"
" 그렇다. 어쩔래?"

 순간 은찬의 표정이 양은 냄비처럼 우그러졌다. 그러더니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뭔가 쏘아올 거라고 기다리고 있던 한결은 허전해서 쳐다봤다.

" 뭐야, 자식. 갑자기 왜 김샌 표정이야. 배고픈가?"

 직원들이 떠난 뒤 한결은 가게에 홀로 남았다. 가면서 은찬은 인사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불러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다른 직원들이 괜히 이상하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수록 잘 들어간다고 할까. 고은찬의 위는 그래서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거다.

 고기로 배를 가득 채운 은찬은 불을 빼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 화장실 좀."
" 어, 나도 같이 가자."
" 네?"

 은찬은 뒤따라 나오는 홍 사장을 뜨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술기운에 지금은 같은 성별인 걸 잠깐 잊어버린 것이다.

" 아, 네. 가, 같이 가요."

 다행히 식당의 화장실은 남여 공용이었다.

" 야."

 밖에서 소변을 보는 홍 사장 아저씨의 목소리다.

" 너 이제 자진 신고하지 그러냐?"
" 뭘 신고해요?"
" 네가 앉아서 오줌 싸는 거 말이다."

 은찬은 놀라서 후닥닥 바지를 끌어올렸다. 물을 내리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온 은찬은 아저씨가 사라져 두리번거렸다. 밖으로 나온 은찬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를 째려보며 다가갔다.

"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안 그래도 하림이 이후로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 사장, 아직 모르는 거 확실해?"
" 당연하죠. 알면 그 좁쌀영감이 가만있겠어요?"

 은찬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되던 참이었다. 미술관의 그 여자가 뭔가를 알아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해서 뽁뽁이 남자한테 전화를 했더니 걱정했던 대로였다. 그 여자도 알게 된 것이다. 잘 말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장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전에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젠 남자 바지가 답답하게 여겨진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 본연의 모습으로 그를 대하고 싶다. 그가 원래의 자신을 제대로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부쩍 많이 든다.

" 이렇게 된 거 어떡하겠어. 슬슬 손발도 맞고 정도 들었는데 내쫓기야 하겠어?"
" 내쫓는 데도할 수 없죠. 조만간 기회 봐서 말할 생각이에요. 이상해요. 남자, 여자 그런 거 생각 없이 살았는데……. 어렸을 땐 애들 반응이 재미있어서 은근히 즐겼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시곤 그런 거 생각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바빴고."
" 근데 요즘에는 신경 쓰이지?"
" 신경 쓰인다기보다 누굴 속이고 있는 게 싫어요. 근데 갑자기 왜 자진 신고하래요? 혹시 사장이 뭐 눈치 챈 거 같아요?"
" 아니 그냥…… 두링 뭐 있는 거 같아서."
" 예? 뭐가 있어요?"
" 아니다. 들어가자."

 은찬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저씨를 따라 들어갔다.



 한결은 유주와 함께 근처 일식집에 있었다. 미술관 증축 파티가 있던 날 한성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유주는 말이 없었다. 본인은 바빠서라고 하지만 얼굴이 핼쑥해 보이고 뭔가에 쫓기는 듯 조급해 보였다. 한성 때문일 것이다. 유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요즘 한성이 자꾸 밉고 싫어진다.

" 가게가 일찍 문 닫네. 직원들 얼굴도 보고 싶었는데."
" 왜, 우리 직원 중에 관심 가는 놈 있어? 있으면 말해. 찍어다 붙여줄 테니까."
" 관심은 무슨. 그냥……. 그 고은찬이란 사람……."

 한결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유주를 보았다.

" 그때 내 핸드백 찾아준 사람 맞지?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했어. 그날은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참 예쁘게 생겼더라? 남자가……."
" 인사는 내가 제대로 했으니까 됐어."
" 한성 오빠가 혹시 그런 타입 좋아하는 거 아닐까?"
" 뭐?"
" 아, 아니 내 말은 그 사람이 여자라면 말이야.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잖아. 밝고 꾸밈없고 솔직하고 씩씩하고."
" 너 그 자식에 대해서 언제 그렇게 파악한 거야?"

 한결은 어느새 날을 세우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 차려, 최한결! 얜 유주라고, 한유주. 고은찬이랑 아무 상관없다고.

 한결은 심호흡을 하고 날을 죽이며 말했다.

" 한성 형이 그런 타입을 좋아한다면 한유주를 3년씩이나 만났겠어? 갑자기 왜 그래? 너 그날 미술관에서부터 좀 이상했어. 둘이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그냥 나한테 질린 게 아닌가 싶어서. 일방적인 파혼 때문에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유주란 여자가 완전히 싫어진 걸 수도 있고, 새로운 타입의 여자에게 끌릴 수도 있잖아. 남자들은 다양한 여자랑 사귀어 보고 싶은 거 아냐?"
" 그건 대부분의 남자고, 최한성이란 종은 좀 다르지."
" 넌?"
" 나? 나야 남자 중의 남자니까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한결은 잠깐 뜸을 들이다 자조하듯 키득대며 덧붙였다.

" 성별도 안 가려."

 유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형이었다. 금방 굳은 표정이 돼 전화를 받은 한결은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다.

[ 당장 병원으로 와.]

 그때 한결은 아버지가 심근 경색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고혈압이라 약물치료도 받고 음식도 신경써 드셔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유학 가 있는 동안 과도한 스트레스와 음주로 두 번 쓰러진 일이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유주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온 한결은 병실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 잠깐 있어. 한성이랑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니까."
" 안에 한성 형이 와 있어? 어떻게 그 형이 나보다 먼저 와 있어!"
" 조용히 좀 해."

 말리는 형을 뿌리치고 들어가려던 한결은 할머니의 부름에 멈췄다.

" 한결아, 이리 오너라."

 한결은 머리를 떨어뜨리고선 어머니와 할머니가 앉아 계신 소파로 걸어갔다. 손을 잡고 끌어당기시는 할머니에게 이끌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회의 도중에 쓰러지신 거야. 그래서 한성이가 모셔온 거고."

 어머니 말씀에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 이 시간까지요?"
" 한성이가 식품을 차지할 모양이야."
"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으셔서 저런 겁니까?"

 그 때 할머니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씀하셨다.

" 최씨 일가가 새 회장을 원하는 게지."

 예전에도 그런 적이 이었다. 큰아버지가 검찰의 소환을 받게 되었을 때 최씨 일가는 냉정하게도 한결의 아버지를 새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번에는 아마도 장자의 적통인 최한성인 모양이다. 그룹을 누가 이끌든 한결은 상관없다. 하지만 큰아버지처럼 아버지가 어떻게 되시는 건 싫다. 참을 수 없다.

 병실의 문이 열리고 한성이 나타났다. 모두 일어나 한성을 보았다.

" 쉬고 싶다고 하십니다. 간호사도 있으니 괜찮다고 모두 돌아가시랍니다."

 한성이 병실로 들어가려는 한결의 앞을 막았다.

" 비켜."
"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어. 곧 주무실 거야."
" 비켜!"
" 한결아."

 한결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성을 밀쳐냈다. 그때 안에서 간호사가 나와 방금 잠드셨으니까 내일 오시는 게 좋겠다고 거듭 말했다.

" 할머니, 들어가셔서 좀 누우세요. 작은아버지 곧 괘찮아지실 거예요."
" 한성이 너 나 좀 보자."
" 내일 회사에서 보시죠, 형님. 저도 따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오늘은 할머니 모시고 그만 들어가세요."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할머니가 일어나셨다. 양쪽에 어머니와 형수의 부축을 받으며 조용히 걸어 나가셨다. 이어 형이 나가고 대기실에는 한성과 유주, 한결이 남아 있었다.

"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한결이 한성을 향해 이를 갈았다.

" 내 아버지 돌아가시게 했으니 니들도 맛 좀 봐라, 이거야?"
" 최한결!"

 유주가 가운데 끼어 한결을 말렸다. 한결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한성은 침착하게 선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 아니면 한유주 때문인가? 그룹 회장으로 등극하면 한 의원님이 한유주 갖다 바칠까 봐? 고귀한 자존심에 다시 달란 말은 죽어도 안 나오니까 갖다 바치길……."

 유주의 손이 한결의 뺨을 철썩 갈겼다. 한결은 얼굴이 돌아 간 채 멈췄고 유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뛰쳐나갔다.

" 작은아버지나 잘 보살펴 드려. 충격 안 받으시게."

 한성이 가고 한결은 소파를 걷어차며 분을 발산했다.

" 이 등신! 등신! 빌어먹을!"

 울분이 치밀어 미칠 것 같다. 절망에 자괴감이 더해 이대로 폭발해 버릴 것 같다.



 은찬의 일행은 밥을 먹고 2차로 노래방에 갔다. 그런데 신나는 노래를 불러도 은찬은 별 흥이 나지 않앗다. 자꾸만 사장 생각이 났다. 지금 어떡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노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데이트 어쩌고 한 건 분명 그 여자, 한유주일 것이다. 지금쯤 둘이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고 와인 같은 걸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둘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약이 바짝 올랐다. 생각을 말자 다짐하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엉터리 춤을 추는 것도 은찬 뿐이었다. 낙균은 완전 음치였고, 홍 사장은 김광석 노래만 불러댔다.

" 아, 힘들다. 하림이가 그립다. 그 자식 있으면 같이 장단 맞춰줄 텐데……."

 은찬이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자 홍 사장이 예약한 곡이 흘러 나왔다.

"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옆에 앉은 선기가 말을 걸어왔다. 화면을 보고 있던 은찬은 턱을 괴고서 선기를 보았다.

" 그러냐?"
" 피곤해요?"
" 아니."

 은찬은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홍 사장의 노래를 들었다. 몸을 흔들며 따라 부르다 선기에게 말했다.

" 꿩 깃털 할아버지 말이야. 오늘도 어김없이 9시 30부에 오셨어. 그리고 오늘도 꽝. 그 할아버진 입맛이 왜 그렇게 까다로우신 거니?"

 꿩 깃털 할아버지란, 체크무늬 양복 차림에 꿩 깃털이 꽂힌 중절모를 쓰시고 매일 아침 9시 30분에 커피프린스를 찾아와 커피를 주문하시는 분을 말한다.

"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원하시는 대로 정확하게 만들어 드렸는데도 이게 아니라고. 오늘은 계피를 너무 많이 넣었다고 말이야. 후우. 그렇게 까다로운 할아버지는 내가 보다보다 첨이다."
" 그래도 그 할아버진 형한테만 주문하시잖아요. 우린 쳐다보지도 않아요."
" 그러니까 더 열 받아. 내가 젤 못하는 걸 어떻게 알고 매일 나한테 주문하냔 말이야. 너 당해봐라 이러는 거 같아. 씨이……. 끝까지 해봐야지. 할아버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볼 거야."

 홍 사장의 노래가 끝나자 선기가 마이크를 잡았다. 은찬은 놀라 무대로 나가는 선기를 봤다. 전주가 흘러나왔다. 모니터에 뜬 곡은 버즈의 겁쟁이였다.

" 어, 저 놈 자세 나오는데?"

 아저씨의 말대로 선기는 진짜 가수처럼 자연스럽게 서서는 분위기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들려주지 않던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지…….

" 와!"

 은찬은 땅콩을 집어든 채 정지해 버렸다. 그대로 넋이 나가 선기를 보았다. 침만 안 흘릴 뿐이었지 은찬은 거의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홀려버렸다. 낙균과 아저씨도 번갈아 눈길을 주고받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고음 처리도 너무 완벽하고 애절했다. 선기의 노래가 끝났을 대 혼미한 상태로 듣고 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 야, 노선기. 너 어쩜 이러냐?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속여?"
" 완전 가수네. 부럽다 진짜."
" 이 자식 너 사실은 날라리지? 우리 몰래 밤마다 클럽 다니고 그러지?"
" 야, 한 곡 더 해 봐라."
" 그래, 이번에는 빠른 곡. 분명히 이 자식 춤도 잘 출 거예요."

 한사코 춤은 안 추겠다고 하던 선기가 B-boy처럼 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긴 팔다리로 휘젓는데 눈이 빙빙 돌았다. 몸은 또 얼마나 탄력이 넘치는지, 강물을 역류하는 연어의 몸짓이 저러하리라.

" 노선기! 노선기!"

 일행은 환호하며 열광했다. 급기야 모두 흥분해서는 앞으로 뛰어나가 내키는 대로 몸을 흔들어 댔다. 탬버린을 흔드는 낙균의 모습은 마치 응원 단장 같았다. 은찬은 손을 잡아 돌리려는 홍 사장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막무가내 댄스를 췄다.

 흥이 난 홍 사장이 김광석의 '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를 때 은찬은 자리를 빠져나와 화장실을 향했다. 아무래도 꽃등심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가려다 스스로도 헛갈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담배 냄새가 났다.

" 우리 옆방 말이야. 지나가는데 목소리가 좀 낯익은 거 같아서 슬쩍 봤거든."
" 아는 애야?"
" 마린보이."

 담배 연기가 문 위로 뿌옇게 보였다. 은찬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흔들어 연기를 퍼트렸다.

" 어머, 그 새끼가 여기 웬일이래? 그 새끼 거기 관두고 여기서 뛰나?"
" 야, 여기서 남자 써? 마담이 찾는 단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 아, 씨이! 또 스타킹 나갔네."
" 그냥 벗어. 야, 영감탱이들 폼이 팁 몇 푼 안 줄 거 같으니까 일찍 잘라버리고 바 가서 놀자."
" 돈 없어, 계집애야."

 화장실에서 나온 은찬은 매캐한 담배 연기와 향수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숨을 참으며 손을 씻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네, 맛있는 커피프린스…… 아!"

 버릇이 돼서 휴대폰을 받을 때도 상호가 튀어나온다. 은찬은 얼른 정정해 말했다.

" 여보세요?"
[ 태원브이.]

 흘리는 발음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누구세요?"
[ 나? 나, 내가 누굴까?]

 낯익은 어투다. 아! 난 또 누구라고.

" 삐딱이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데이트가 재미없으신가 보죠?"
[ 데이트? 그래, 데이트하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 사장님, 술 드셨어요?"
[ 아니. 지금 드시고 있다. 야, 고은찬!]
" 아씨, 귀청 떨어지겠네. 왜요, 사장님!"
[ 너, 이리로 와라.]
" 예? 지금요?"
[ 그래. 이리로 와.]
" 지금 한창 재미있는데 어딜 오라는 거예요. 싫어요.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요. 아니면 사장님이 이리로 오시든가요. 선기가 얼마나 노래를……."
[ 선기? 아, 노선기. 지금 그 자식이랑 같이 있어?]
" 당근이죠. 오랜만의 회식인데 내가 한 놈이라도 새는 걸 가만 놔둘 줄 아세요?"
[ 그 자식이랑 있지 마! 그 자식은 필요 없어. 그 자식은 떼놓고 와.]
" 지금 호텔이에요?"
[ 그래. 우리 호텔.]
"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아세요? 거기까지 갔다가 잠은 언제 자란 말이에요? 직원을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니에요? 내일 우유 배달도 해야 되구먼. 내가 자기 비서도 아니고……."
[ 이 자식아! 내가 오라면 그냥 오면 안 돼?]
" 에이씨, 정말……."
[ 지금 네가 필요해.]

 은찬은 놀라 숨이 멎었다.

[ 네가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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