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랑은 숨길 수 없는 비밀
문 앞에 도착한 은찬은 'S11'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전화에서 그가 한 말 때문에 계속 심장이 쿵쿵거렸다. 진심이 아닐 거라고, 그냥 말이 헛나왔거나 농담이었거나 생각 없이 한 말일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근데 사람은 없고 술 냄새만 풍겼다. 안으로 들어선 은찬은 문 입구에서부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방은 더 난장판이었다. 옷가지들이 마구 나뒹굴고 의자를 쓰러져 있으며 젖은 수건과 휴지 상자, 책, DVD 같은 것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 어!"

 은찬은 철벅거리는 소리에 밑을 보았다. 장독대만 한 커다란 화병이 쓰러져 카펫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 이게 다 뭐래?"

 은찬은 낑낑거리며 화병을 세워놓았다.

" 뭐가 이렇게 어지러워요?"
" 대충 피해서 들어와."

 안쪽에서 대답이 날아왔다. 술을 마셨던 건지, 계속 술을 마시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술을 쏟았던 건지. 어쨌든 방 안에는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 깔끔한 사람이 왜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놨데요? 정말 한결스럽지 않네."
" 뭐가 말이 많아. 치워줄 것도 아니면서."

 그 말은 맞았다. 은찬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옷가지를 피해 빈 곳을 짚으며 거실로 움직였다.

 그는 거실 소파와 탁자 사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셔츠는 마구 풀어헤쳐져 있고 머리도 누가 감기가 만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한 손에 초록색의 술병을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 야, 이리 와 봐. 저거 되게 웃기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손짓으로 불렀다. 은찬은 찡그리며 엉거주춤 다가갔다. 소파에 있는 그의 재킷을 옆으로 밀어내고 앉았다.

" 이쪽으로 와 앉아. 누가 내 뒤통수 노려보는 거 싫으니까."

 은찬은 눈을 흘기며 그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 빨리."

 하는 수 없이 은찬은 투덜거리며 내려앉았다.

" 사람을 오라 가라. 이리 와라, 여기 앉아라. 내가 무슨 개예요?"
" 개?"

 그가 킥킥 웃더니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 손."

은찬이 손바닥을 세게 내려치자 그가 아프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은찬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서 술병을 들었다.

" 한 모금 마실래?"
" 아니, 됐어요."
" 에이, 빼지 말고 마셔. 자."

 그가 강제로 술병을 입에 갖다 댔다.

" 읍!"

 그가 머리를 꽉 잡고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결국 입을 벌린 은찬은 불쑥 들어온 독한 향취에 미간을 찡그렸다.

" 켁!"

 술은 독한 게 아니라 아주 끔찍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은찬이 기침을 하며 헐떡이는데 그가 손을 뻗어 은찬의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을 닦아냈다. 아이한테 하듯이 닦아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술병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마시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은찬은 목을 젖히고 술을 마시는 그를 보며 물었다.

" 실연당했어요?"
" 푸!"

 그의 입에서 술이 뿜어져 나왔다. 사레가 걸려 컥컥거림ㄴ서 그가 말했다.

" 뭐, 뭐라고 했어?"

 그때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물기가 보였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가 한 것처럼 그 물기를 닦아주었다. 흠칫 놀란 그의 눈이 커졌다. 은찬은 모른 척하며 쯧쯧 혀를 찼다.

" 그 아가씨한테 차였죠? 혼자 좋아한 거죠? 내 그럴 줄 알았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딱 보니까 혼자 설레발치다가 차였구먼. 내가 봐도 사장님은 그 아가씨랑은 아니에요. 그 아가씬 뽁뽁이 아저씨가 더 어울려. 뽁뽁이 아저씨가 좀 재수는 없어도 매너는 좋더구먼. 남자가 듬직하고 찬찬하고."
" 뭐가 자꾸 뽁뽁거려? 너 뽁뽁이 하지 마."
" 아니 왜요? 뽁뽁이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냉장고 뽁뽁이 안보셨구나? 뽁뽁이 중에 최고예요."

 은찬은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설명했다.

" 예전에요, 우리 집에 냉장고를 새로 들였을 때요. 냉장고 뽁뽁이는 얼마나 큰지 알아요? 그걸 아버지랑 마루에 펴놓고 터트리는데, 어떻게 한 줄 알아요? 둘이 굴렀다니까요. 등으로 이렇게 누르니까 이게 막 터지면서, 귀에서 뽁뽁……."

 은찬은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말을 멈췄다.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가왔다. 점점 다가오는 그에게 밀려 은찬은 점점 머리를 뒤로 젖혔다.

" 왜, 왜 이래요?"

 그의 시선이 은찬의 입술에 모아졌다. 한결의 갑작스런 접근에 은찬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너 이상해."

 은찬은 애써 피하려고 농담을 꺼냈다.

" 내, 내 이 안 상했는데요."
" 아니, 이상해."

 안 통했다. 그는 여전히 진지하게 쳐다보며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 머리카락도 이상하고……."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몇 올 잡더니 감정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비벼댔다. 그러고는 손이 얼굴로 내려와 뺨에 닿았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 피부도 이상하고……."

 맥박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은찬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좋은 냄새에 온몸이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았다.

" 입술도 이상하고……."

 이상한 건 은찬의 심장이었다. 은찬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자인 걸 알아챘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그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곧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닿을 거라는 기대감과 흥분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그의 엄지손가락이 은찬의 입술에 닿았다.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며 만지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시선이 은찬의 눈을 사로잡았다. 은찬은 흥분과 떨림, 그리고 불안 속에서 그를 보았다.

" 너……."

 그때 그가 말했다.

" 게이지?"

 순간, 모든 것이 멎었다. 떨림도 흥분도 펑 하고 사라져버렸다. 은찬은 묘한 실망감 때문에 기분이 팍 상했다.

" 어쩌면 너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은찬은 그의 가슴팍을 왈칵 밀어버렸다.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 그를 두고 벌떡 일어섰다. 아직도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기대한 자신이 창피해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 도,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 아, 아우 허리야……."

 그가 누워서 꿈틀거렸다.

" 취했으면 그냥 곱게 뻗어 잘 것이지, 사람은 왜 불러서 헛소리나 하고. 암튼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엄살 고만 떨고 가서 잠이나 자요!"

 그때 그가 허리 밑에서 술병을 꺼냈다. 은찬은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은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문질렀다.

" 아, 술이 확 깨네. 쓰으……."
" 괘, 괜찮아요?"

 은찬은 주저앉아 그가 아파하는 곳을 같이 주물렀다.

" 그러게 왜 같잖은 소리를 해가지고……. 좀 괜찮아요?"
" 조그만 게 힘은 세가지고. 오늘 고기 얼마나 먹었어?"

 은찬은 계속 주무르며 대답했다.

" 얼마 안 먹었어요. 한 18인분?"
" 너 혼자?"
" 아뇨. 다 같이. 나 혼자 먹은 건 6인분밖에 안 돼요."
" 6인분? 너 혼자 6인분을 먹었다고? 야, 그거 사람 치사량 아니냐?"
" 치사량은 무슨. 씨름 선수는 혼자서 16인분도 해치울걸요."
" 그야말로 고은찬적 발언이네."
"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가 일어서서 허리르 돌려보더니 말했다.

" 술이 다 깨버렸으니까 다시 한잔해야지. 6인분을 가뿐히 먹어치우는 위대한 고은찬 군을 위해서, 맘 좋은 이 사장님께서 훌륭한 와인을 하나 따주지."
" 늦었어요. 나 집에 가야 돼요."
" 너 오늘 가면 안 돼. 자고 가."
" 안 돼요. 새벽에 우유 배달도 해야 되고……."
" 그거 집어치워. 알겠어? 오늘부터, 아니 내일부터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알았나, 고은찬 군?"

 뭐가 술이 확 깼다는 건지. 여전히 헛소리구먼.

 은찬은 어이가 없는 채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은 자신도 가기 싫었다. 마음이 좋아졌다가 서운했다가, 그의 말 한마디에 왔다 갔다 한다. 몸은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렸다가, 그의 눈길 한 번에 오락가락이다. 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건지. 감기에 걸렸나 보다.

 한결은 소파의 왼쪽 끝, 은찬은 소파의 오른쪽 끝에 앉아 서로를 보며 술을 마셨다. 소파 가운데에 네 다리가 서로 엉켜 있었다.

" 너 신발 얼마 신어?"

 한결이 발로 은찬의 발을 툭 차며 물었다. 은찬은 와인을 홀짝 마시며 대답했다.

" 270."
" 야."
" 265."
" 내가 280 신는다."
" 정말이에요. 270이나 265 신어요."
" 발 사이즈는 250인데?"
" 크게 신는 게 유행이란 말이에요."
" 네가 애냐? 유행 따라다니게?"
" 그러는 사장님은 유행 바뀔 때마다 넥타이 안 사요?"
" 그거랑 이거랑 같아?"
" 치이."

 둘은 한동안 서로의 발을 툭툭 치며 와인을 마셨다. 은찬은 이미 녹아서 흐물흐물했고, 한결도 나른한 상태였다.

" 하림이 어쩌실 거예요?"
" 어쩌고 안 할 건데."
" 어떻게 된 건지 전화도 안 받고. 어떻게 된 놈들이 커피프린스만 나가면 전화를 안 받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거면, 상황이 안 좋은 거면……."
" 내가 무슨 비행 청소년 선도하는 사람인 줄 알아?"
" 하림인 비행 청소년 아니에요. 걘 성인이고 분명히 제 목표가 있는 놈이에요."
" 목표가 있으면 장애도 있는 법이야."
" 아버지가 엄청 엄하시다고 들었단 말이에요. 아들이 집 나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찾지도 않으셨다잖아요. 진짜 완고하고 고지식한 아버지가 틀림없어요. 하림인 아마 엄마를 닮았을 거예요."

 그가 잔을 비우는 걸 보고 은찬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지러운 대로 기분이 좋았다. 술병을 들어 위태롭게 술을 따랐다. 그의 손등에 붉은 와인이 약간 튀었다. 은찬은 손가락으로 대충 닦아주고 다시 소파에 기댔다.

 한결은 다시 술을 마셨다. 단숨에 반잔이나 비우고서 은찬을 보며 말했다.

" 네 아버진 어떤 분이셨어?"
" 우리 아버지요? 우리 아버진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예전에 할머니가 그러시곤 하셨죠. 발에 무좀만 빼면 버릴 게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자 갑자기 그가 은찬의 발을 보며 슬그머니 자신의 발을 빼갔다. 은찬은 킥킥 웃으며 짓궂게 발가락으로 그의 발바닥을 간질였다.

" 야, 무좀도 유전이란 말이야."
"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뭐."

 간지럼에 도망가던 그는 갑자기 다리를 확 뻗어 은찬의 발 위에 올렸다.

" 어딜……."

 은찬은 발을 홱 빼서 질세라 그의 다리 위에 발을 올렸다. 한동안 네 다리가 엎치락뒤치락하며 힘겨루기를 했다. 승부욕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사람의 발씨름은 결국 무승부였다. 두 사람은 한 다리씩 지고, 이긴 상태로 승부를 끝냈다.

" 사장님은요? 사장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그러고 보니까 사장님은 자기 얘긴 통 안 하네요? 형제는 몇이에요? 여기 호텔 말고 집 없어요? 가족이랑 같이 안 살아요?"
" 난 고아다."
" 네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은찬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보았다.

" 바, 방금 뭐라고 했어요?"
" 잔인하게 그 말을 또 시키느냐?"
" 아! 미, 미안해요."
" 미안하면 입 봉하고 있어. 내 입에서 그 말 나오게 한 건 너 하나니까."

 은찬은 입술을 꼭 다물고 비장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열한 살 때 우연히 부모님께서 하시는 얘기를 들었어. 나중에 알아보니까 태어나자마자 복지원에 맡겨졌더군. 그리고 얼마 후에 지금 부모님한테 입양이 됐고. 형이랑 누나가 한 명씩 있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랑 같이 사는 집에 내 방도 있지. 누난 결혼해서 아이도 한 명 있어. 이제 됐냐?"
" 노, 놀랐겠네요? 어린 나이에……."

 놀란 건 은찬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그가 새롭게 보였다. 부작집 도련님이라 고민도 없고 상처도 없을 줄 알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서 제멋대로인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알면 알수록 놀란다. 겉멋만 든 줄 알았더니 가게도 성실하고 꼼꼼하게 잘 이끌고, 홍 사장 아저씨한테도 꼬박꼬박 사장님 하면서 존댓말을 쓰고. 가장 놀라웠던 건 역시 낙균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오만하고 쌀쌀맞고 자유분방하다 못해 안하무인인 놈에서, 차갑지만 가식적이지 않고 당당하며 타인을 도와줄 줄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로 말이다.

 그런 그가 고아라니 마음이 아리다. 이 세상에 정말 불쌍하고 안된 사람이 많은데, 자신의 처지가 그보다 좋은 것도 아닌데, 그가 고아라니 마음이 애잔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그렇다니…….

 은찬이 은근한 눈길로 보는 가운데 한결이 말했다.

" 세상이 싫었지.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 같았어. 겉으론 웃어도 속으론 부모도 모르는 놈이라도 욕할 것 같고. 입양 안 됐으면 천덕꾸러기 신세였겠지. 그래서 안 믿어. 나 좋다는 계집애들 말이야. 나 뭐 보고 좋아할지 뻔하잖아. 알맹이는 하나도 모르면서 번지르르한 껍데기 보고서 헤헤거리지. 내 껍데기 벗기면 아마 기함하고 도망갈걸."
" 진짜 좋아하면 도망 안 가요."
" 안 믿어."
" 누가 도망갔어요?"
" 아니."
" 거봐요."
" 내가 속을 안 보이거든."
" 그건, 한 번도 여자랑 깊이 안 사귀어 봤단 의미?"
" 영리하기도 하지."
" 그 한유주라는, 그 아가씨도 몰라요?"
" 너 하나라고 했잖아."

 은찬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붉어진 건 술기운 탓이랄 수 있지만 행복해지는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 근데 왜 집에 안 들어가고……."
"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기 싫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짜놓은 인생대로 살아야 하거든."
" 나쁘게야 짜놓았겠어요?"
" 심술이지. 내가 짜고 싶은데 아버지가 미리 짜버리셔서 김새버렸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원래 내 멋대로 해야 성이 차는 놈이라."
" 가, 갑자기 자아비판 시간 됐네요? 나도 뭐 하나 얘기해야 되나?"

 은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기회가 온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에서 지금 얘기하라고 다그쳤다. 그가 솔직할 때 거짓인 채로 있으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취해 있으니까 어쩌면 쉽게 받아들이고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런. 데.

" 네가 말할 게 어디 있어? 솔직한 거 빼면 시체인 놈이. 넌 너무 솔직해 탈이야. 내가 그래서 좋아라 하지만."

 그가 말했다.

" 하, 하림이 가게에서 잔 거 속였는데……."
" 비밀로 해달라고 했겠지. 의리 없이 나한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했으면 너 왕따당했을 거야. 서로 간에 믿음이 있어야지 조직이 잘되는 거야."

 그래서 뭔가? 잘했단 건가? ' 대체 솔직함의 기준은 어디에 있냐고요! 나도 인간이라고요! 나도 거짓말한다고요! 진짜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라고 외치고 싶다.

" 고은찬."
" 왜요?"
" 우리 의형제 맺을래?"
" 그거 삼국지에 나오는 거 아니에요?"
" 삼국지 읽긴 하고 지껄이는 거냐?":
" 앞에 몇 장은 봤어요."
" 암튼 우리도 그거 맺어보자. 넌 형 없고 난 동생 없고. 내가 무지 많이 손해고, 너 뒤치다꺼리하려면 좀 귀찮겠지만 내가 감수하마. 대신 형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알겠냐?"
" 순 자기 마음대로 하네. 누가 한댔어요? 난 형 같은 거 필요 없……."

 갑자기 그가 잔을 놓고 다가왔다. 은찬은 또 뭘 하려나 놀라서 얼른 다리를 접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아…… 사장님 얼굴이 네 개로 보입니다요."
" 니 얼굴은 피오나 공주 같다."

 그는 자신의 귀에 건 작은 링 귀걸이를 빼더니 은찬의 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 너 귀 안 뚫었어?"
" 귀를 왜 뚫어요? 아프게."
" 할 수 없다. 이리 대봐. 내가 뚫어줄게."
" 예에?"

 은찬은 위협을 느끼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워서 몸이 뒤뚱거렸다.

" 야, 이리 와봐. 의형제를 맺으려면 증표에 있어야 하는 거야."
" 아, 싫어요!"
" 뚫으면 내가 불도장 사주지."
" 나 도장 있거든요!"
" 인마, 불도장. 너 불도장 몰라?"
" 불도장이고 물도장이고 싫다고요!"
" 중국 요리."

 한결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가던 은찬이 휙 돌아보았다.

" 머, 먹는 거예요?"
" 그래, 바보야. 너 좋아하는 보양식이다. 전복에 송이, 해삼, 잉어 부레, 사슴 힘줄, 그리고 또 뭐더라. 암튼 기타 등등 10가지 넘게 들어간 스프. 그거 사줄게."
" 사, 사슴 힘줄? 나 그런 거 안 먹어요. 아, 싫다니까요!"
" 사내자식이 겁은 많아가지고……. 잠깐만, 바늘. 바늘을 찾아야지. 바늘이 어디 있더라? 내 전화기 어디 있지? 전화기가……."
" 전화기는 뭐 하게요?"
" 바보야. 지배인한테 전화해서 바늘을 가져오라고 해야지."
" 싫어요. 난 절대로 귀 안 뚫어!"

 은찬은 어디론가 뛰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거실에서는 사장이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바늘을 가져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믿을 수가 없는 건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데 눈을 뜰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졸음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계의 알람 소리에 한결이 꿈틀했다. 손을 뻗어 더듬더듬 알람을 끄고 다시 숙면 모드에 들어가려 했다. 그때 뭔가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있어서 끌어당겼다. 그러자 손에 잡힌 것이 움직이며 품 안으로 들어왔다. 품 안에 들어온 게 부드럽고 말랑해서 기분이 좋았다. 한결은 꽉 부둥켜안고서 입술을 내밀었다. 안고 있는 걸 끌어당겨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만족한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꿈나라로…… 응?

 놀라 번쩍 눈을 뜬 건 한결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으악!"

 은찬이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둘이 나란히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껴안고 있다니!

" 왜 소리는 지르고……."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는 달랑 트렁크 팬티 차림이다. 은찬은 놀라서 얼른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 아! 우유. 아씨! 죽었다!"
" 야, 우유 배달 그거 관두라니까. 애가 말을 안 들어요, 말을."

 우유 배달은 커녕 가게에도 지각할 참이다. 은찬은 후닥닥 일어나다가 뭔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주춤했다. 숙취인가 보다 생각하며 욕실로 뛰었다.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때 반짝거리는 것이 오른쪽 귀 끝에서 번쩍거렸다.

" 으, 으아아아아악!"

 은찬은 비명을 지르며 무섭게 뛰쳐나왔다. 여전히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신문을 들고 들어오는 한결을 보고 소리를 질러댔다.

" 사장님 사이코 아니에요! 어떻게 자는 사람 귀를 뚫어놓을 수가 있어요! 완전 미쳤어!"
" 이 자식아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

 은찬은 거실의 거울로 뛰어가 다시 귀를 살피다가 또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지금 내가 소리 안 지르게 됐어요! 도대체 제정신이에요! 아, 아파."

 오른쪽 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흔들려서 욱신욱신했다.

" 도대체 뭐 갖고 그러는 거야?"

 은찬은 분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 내 귀요! 내 귀! 이 변태 배추벌레 같은 인간아! 싫다는데, 싫다는데 남의 귀는 왜 뚫고 지랄이야!"
" 이 자식이!"

 인상을 팍 구긴 채로 그가 다가왔다. 한결은 거울 속에서 은찬을 보고 드디어 발견했다. 자신의 귀에 있던 귀걸이가 은찬의 귀 끝에 달린 것을 말이다.

" 야, 이걸 왜 네가 하고 있어?"
" 아우! 아우!"

 은찬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다가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몸을 떨었다. 잘못돼서 귀가 퉁퉁 부으면 어떡하지? 그럼 고흐처럼 귀를…… 으아아아악! 가슴 속에서 공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은찬은 휙 몸을 돌려 사장의 팔을 잡고 다그쳤다.

" 뭐, 뭐로 뚫었어요? 바늘로 뚫었어요? 그 바늘 어디 있어요? 소독은 했어요? 아, 이 미친 인간! 부작용 생기면 가만 안 있을거예요!"
" 이걸 내가 뚫었다고?"
" 이씨!"
" 기억이 안 나는데……. 취중 시술치고는 예쁘게 잘 뚫었네. 어, 피딱지."

 그가 갑자기 손으로 귀 끝을 만졌다. 순간 은찬은 아픔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 윽!"

 그가 차인 발을 감싸 안고 쿵쿵 뛰어다니는 걸 보자 분이 조금 풀렸다.

" 아우 씨이! 이게 어디다 발길질이야!"
" 제대로 차지도 않았구먼 엄살은. 내 귀 해놓은 거에 비하면 약과지 뭐.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 야! 돈으로 갚아. 귀 뚫어주고, 내 귀걸이까지 줬잖아. 그거 24K야, 인마."
" 빨리 씻기나 해요. 늦었어요."

 투덜거리며 욕실로 들어간 한결은 느긋이 샤워를 했다. 은찬이 거실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재촉을 하는 데도 늑장을 부렸다. 아무리 늦어도 샤워는 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장이랑 같이 늦었으니 꾸중을 들을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테이크아웃을 시행하고 아침 시간이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 이래선 직원들한테 미안하게 된다. 은찬은 결국 한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와버렸다.



" 야, 고은찬! 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말도 없이 가버리지 않나. 그리고 어머니가 전화해서 너 찾으시던데."

 아! 집에 전화하는 걸 깜빡했다.

" 그, 그럴 일이 좀……."
" 휴대폰 좀 바꿔라. 그거 또 안 터지더라."
" 잘 하면 가끔씩 터져요. 저번에는 지하 주차장에서도 잘 터졌어요. 신기하죠?"
" 원래 지하 주차장에서도 터져야 하는 거거든."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은찬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10분 후 한결이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은 차림으로 들어왔다.

" 굿모닝!"

 그러고선 곧장 주방으로 가 커피를 따랐다. 그때 낙균이 드립머신을 작동시켰다. 윙 하는 소음에 그가 신음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 그거 나중에 하면 안 돼?"
" 네?"

 낙균이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립니까 하는 표정으로 보았다. 사장은 한숨을 시며 손을 저었다.

" 아니다."

 관자놀이를 누르는 걸 보면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은찬은 숙취보다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30분전에 아침밥이 들어갔어야 했다.

 두 고통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은찬은 머쓱해서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다녔다. 참다 못한 은찬이 의문의 눈빛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빙 돌아오며 나직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 야채죽 사놨다, 식충아. 마이신도 있으니까 삼켜둬. 안그러면 곪는다."

 이 인간이 병주고 약 주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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