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Loving You
5개월 후.

은찬은 어머니의 재혼이 내키지 않았다. 구씨 아저씨가 아버지가 된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든든하고 자상해서 의지가 됐다. 그런데 구씨 아저씨는 아버지 같기보단 친구에 더 가까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구씨 아저씨에게 물었다.

" 신춘문예랑 우리 엄마,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면 어떡하실 거예요?"
"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네 엄마지."
" 그럼 신춘문예 포기할 수 있어요?"
" 시는 써서 네 엄마한테 보여드리면 돼.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 신춘문예보다 울 엄마라고요?"
" 그렇다니까."
" 20년 동안 신춘문예를 목표로 살았다면서요."
" 그 자식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 내가 언제 아저씨 싫댔어요?"
" 그럼 좋냐?"
" 쯧. 에이씨이……."

 은찬은 수술 경과가 좋았다. 경막외출혈이라 비교적 빠른 시간에 원상 회복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병원에 있는 건 엄청 고역이었다. 마음이 좌불안석이라 더 그랬다.

 엄마와 구씨 아저씨는 근처 웨딩홀에서 작은 연회석을 빌려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어머니는 두 번째지만 아저씨는 처음인 결혼식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머니는 오십이 다 된 연세에도 고왔다. 구씨 아저씨는 긴장을 해서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아주 가까운 친척 몇 분과 커피프린스 식구들이 참석 했으며, 시장 분들이 많이 와주셨다.

"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은 흔들리고……."

 은찬은 은새와 함께 축가를 불렀다. 과년한 딸 둘을 둔 처지에 총각과 재혼을 하게 된 능력 좋은 어머니 덕택이다. 더구나 어머니는 설득을 당하는 쪽이었다. 길바닥에 나앉게 된 식구가 체면 불구하고 구씨 아저씨의 집으로 들어간 지 5개월. 은찬이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 어머니는 끈질긴 구애를 받으신 것이다.

 두 사람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엄마가 먼저 울어버려서 오히려 은찬이 위로해 드려야 했다. 은찬은 엄마의 결혼이 서운한 것도 있지만 앞으로 좋은 게 더 많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가장의 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엄마와 은새의 장래에 대해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씨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으로 점점 의지하게 될 것 같다. 그래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며칠 후, 은찬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엄마와 새아버지가 된 구씨 아저씨를 맞은 뒤 다시 가게로 나왔다.

" 정리할 것도 많을 텐데, 하루 쉬라니까."
" 정리할 거 없어요."

 잡지에 실린 후 가게에는 손님이 더 몰려들었다. 일부러 맛을 보려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서 하루 종일 쉴 틈이 없는 날이 많았다. 수리 후 커피프린스는 다시 홍 사장이 맡아 하고 있다. 낙균은 복학을 해 저녁 시간에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가출한 하림은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제법 착실히 대입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몇 달간 행방불명이었던 선기는 지난달부터 다시 커피프린스에 나온다. 한결은 은찬이 병원에 있는 동안 커피프린스의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동이그룹으로 들어갔다.

" 아저씨, 그거 안 드실 거예요?"
" 어, 응. 자, 먹어라."

 은찬은 오늘도 남긴 음식을 깨끗이 해치웠다. 요즘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 안 먹으면 계속 안 먹어도 될 것 같다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계속 들어가는 것이다. 걸신 같은 게 들어가 있는지 내시경 검사를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 누나."
" 응?"
" 내일 은새가 오디션 보는 데 따라가자는데……."

 선기가 말끝을 흐렸다. 선기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찬이나 커피프린스에 남은 사람들은 그 일에 한결이 관계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선기가 사장님이 도와주셨다는 정도로만 말했기 때문이다.

" 너 내일 비번이잖아."

 선기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은찬은 알고 있었다. 그런 전력이 있는 자신이 은새와 어울려도 괜찮은지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와 구씨 아저씨의 관계에 대해 둔감했지만, 선기에 대한 은새의 호감은 은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게에 어슬렁거릴 땐 몰랐고 선기가 돌아온 뒤 뻔질나게 커피프린스를 들락거리며 부쩍 선기의 곁을 맴도는 은새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 네가 같이 가주면 내가 든든하지. 걔가 겉으론 강한 척해도 속은 은근히 여리잖아. 오디션 때 얼마나 떠는지 몰라. 네가 잘 좀 챙겨줘."
" 누나……."
" 나 볼 때마다 그렇게 움츠러들지 마. 나 이제 괜찮아. 그리고 네가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뒤끝이 길어. 그만 잊어, 자식아."

 은찬은 선기의 등을 툭 치고는 퇴근 준비를 하러 휴게실로 들어갔다.

" 어, 어!"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낙균과 하림이 펄쩍 뛰었다.

" 아, 왜 그래, 누나! 노크 좀 하라니까."
" 야, 이미 다 봤는데 뭘 그러냐. 새삼스럽게."

 은찬은 두 남자의 맨등을 찰싹찰싹 때리고는 캐비닛에서 옷을 꺼냈다.

"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지금은 누나가 여자로 보인단 말이야. 머리도 길고, 살도 빠지고."
" 정말 요즘 누나 살 빠졌어요. 그렇게 먹어대는데 다 어디로 가요? 아님 우리 몰래 우웩?"
" 야, 내가 미쳤냐? 아까운 걸 왜 토해."
" 아니면 달밤에 마라톤이라도?"
" 야, 너나 운동 좀 해라. 뭐 볼 게 있어야지."

 은찬은 하림의 옆구리를 툭 치고는 휴게실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까마귀 나라 양아치가 와 있었다.

" 누님, 모시러 왔습니다."
" 아, 귀찮은 놈."

 그러면서 은찬은 녀석이 주는 헬멧을 받아 들었다.

" 아저씨, 저 먼저 가요."
" 그래. 수고했다. 내일 보자."

 은찬은 최근에 까마귀 나라 양아치의 이름이 황민엽이란 걸 알게 됐다. 민엽은 학교를 졸업하면 곧 군대를 갈 작정이란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출퇴근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처음에는 말렸지만 이 녀석의 고집도 어지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책임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 모양이지만, 녀석은 좀 그래도 된다 싶어 놔두기로 했다.

 은찬은 민엽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다.

 미안해하는 민엽의 마음을 받아주면 그 사람도 날 좀 용서해 주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은찬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은찬은 그랬다. 잘 먹고 잘 웃고 씩씩하게, 예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은찬은 5개월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퇴원하는 그날까지 은찬은 내내 기다렸다. 그가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 이젠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지만, 또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단 얘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와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에도 S11호에도 그는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없던 사람처럼…….



 커피프린스의 임시 회의 시간이다.

" 그러니까 뭐야? 커피프린스를 스타처럼 키우겠단 거야?"
" 그 세계적인 커피점처럼 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프랜차이즈를 해보겠대요. 투자는 그쪽에서 하고, 우리는 프린스 커피랑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는 거죠."
" 이를 테면 커피프린스 2호점, 3호점, 4호점이 막 생기는 거예요. 그거 우리 사장님이 하는 거죠?"

 아직도 한결은 그들에게 사장님으로 통했다. 은찬은 고개르 저었다.

" 동이식품 쪽이야. 오늘 저녁에 거기 사장님 만나서 얘기 더 들어보기로 했어요. 홍 사장님도 같이 가셔야 돼요."
" 알았어. 근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 전 크게 벌이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우선 2호점에 주력을 해서 키워보고 괜찮으면 하나씩 늘여가는 게 어때요? 우리 가게의 장점은 손님들이 대부분 단골이어서 기호를 속속들이 알잖아요. 하림인 손님들 넥타이 색깔이나 헤어스타일 바뀐 거 금방금방 체크해 주고, 은찬 형은 양 많은 사람, 적은 사람, 뜨겁게 마시는 사람, 성미 급한 사람, 다 외우고 있고. 그런거 때문에 편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가게가 너무 많으면 또 희소가치가 없을 거 같고. 전, 지방에 하나씩 정도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번화가보다는 우리처럼 변두리 쪽에 조그맣게 해서, 이웃처럼 편한 이미지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야, 나대신 낙균이 데려가라. 얘가 나보다 낫겠다."
" 나 오늘은 안 돼요."
" 오늘 얘 여자 친구 생일이잖아요."
" 아, 수애 생일이구나."

 은찬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눈길을 보냈다. 복학을 하고 낙균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동안 여자 친구가 없었다는 게 신기한 거지만, 낙균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생긴 것 같아 사랑의 힘을 새삼 느꼈다.

" 그럼 오늘은 찬이 혼자 만나 봐. 얘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되면 우리 다 같이 만나서 본격적으로 의논을 해보지 뭐."
" 네. 그럼저 지금 나가봐야 되겠어요. 금요일이라 길이 막힐 것 같아요."
" 참, 은찬아. 내일부터 바리스타 교육받으러 가."
" 네? 제가요?"
" 다시 도장으로 돌아갈 거 아니잖아. 2호점, 3호점 생기면 본격적으로 바빠질 텐데 그 전에 배워둬야지. 내가 수강 신청 해놨으니까 내일부터 가. 표정이 왜 그래?"
" 잘할 수 있을지……."
" 잘할 거야. 넌 무대 체질이잖아. 손님 줄이 길면 길수록 손도 빠르고 정확하다던데 뭐."
" 누가 그래요."
" 아, 저기…… 소, 손님들이……."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낙엽이 흩날렸다. 갑작스레 찾아든 한기에 거리가 한산했다. 버스 안은 복잡해서 공기가 탁했다. 창문을 조금 열자 찬바람이 들어와 은찬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오른쪽 귀 끝에서 금빛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재즈 까페 다숲은 예전에 아르바이트할 대와 변함없이 분위기가 좋았다. 느린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손님들이 꽤 많았다. 한성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 일찍 오셨네요? 저도 늦은 건 아닌데."
" 생각보다 길이 덜 막혔어. 저녁은?"
" 가게 식구들이랑 먹었어요. 아직 안 드셨어요?"

 바빠서 못 챙겨 먹었다는 한성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은찬은 맥주를 마셨다.

" 전화 받고 꽤 놀란 것 같던데."
" 아…… 네. 전화하실 줄 몰랐거든요."
" 보름쯤 전에 본사에서 한결이를 만났어. 평사원으로 입사해 지금은 대리로 승급했어. 본자 재정부에 있고. 알고 있어?"

 은찬은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사실은 이번 프랜차이즈 건도 녀석이 얘기를 꺼내서 검토하게 된 거야. 생각을 꽤 깊이 해놨더군. 기획안까지 보내와서 봤는데 꽤 설득력이 있어. 녀석이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버리긴 아깝단 생각이 들정도였어."

 한성의 입에서 한결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은찬은 가슴이 뛰었다. 사실, 한성을 만나면 혹시 그의 근황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렇게 멀쩡하게 잘 지내면서 어떻게 전화 한 통 주지 않는지 화가 나고 슬펐다.

" 머리가 많이 길었네?"

 식사를 하던 한성이 양쪽 귀를 덮은 은찬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 전, 지루한데요. 너무 안 길어서요."

 한성이 몸을 뒤로 젖히며 은찬은 말끄러미 보았다. 은찬은 불편한 시선을 피하며 맥주를 마셨다.

" 한결인 아직도 그대로야? 전화 해봤어?"
" 아뇨."

 은찬은 손을 들어 맥주를 더 주문했다.

" 천천히 마셔."
" 전 아저씨처럼 추태 부리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 여전하군."

 한성은 픽 웃고는 식사를 마저 했다. 그러는 동안 은찬은 오랜만에 술을 마셔 약간 알딸딸해졌다. 커피프린스에 관한 내용은 한결의 기획안으로 한성이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찬의 설명은 보충에 불과했다. 한성이 결재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무의 세부 사항은 아랫사람과 얘기해야 할 일이었다.



" 그럼 홍 사장님도 적극 동의하시는 거지?"
" 원래 그 사람 거잖아요. 커피프린스가 다 그 사람한테서 나온 거예요. 가게 인테리어며 컨셉트, 주문서 작성하는 거 다요. 그 사람이 하겠다는데 어떻게 싫다고 그래요. 우리 직원들 다 그 사람한테 다 신세 졌고 뿅가 있는데."
" 뿅가?"
" 수호천사처럼 그랬거든요. 힘들 때 딱 나타나서 도와주고 뿅 사라졌잖아요. 뿅갈 수밖에요."
" 한결이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 뭐하는데요? 뭐라고 말하던가요? 아니, 기억은 해요?"
" 자기 졸개들이 끊임없이 자길 자극했다더군."
" 자극이오? 자극했죠. 낙균이는 초반에 무단결근했고, 하림인 아예 가출했고, 선기는…… 혹시 아세요? 선기 일은 어떻게 한 건지?"
" 아니."
" 그럴 줄 알았어요."

 은찬은 한숨을 내쉬고 맥주를 들이켰다.

" 비밀주의예요. 속에 뭐가 들었는지 통 알 수가 없어요."
" 둘 다 전보다 말랐어. 날카로워지고."
" 들어가기 싫다고 그렇게 뻗대더니. 회사가 그렇게 좋대요? 아예 일에 파묻혀 사나 보죠?"

 툴툴대던 은찬은 급하게 술을 마셔 혀가 점점 꼬여갔다. 자세도 흐트러지고 눈빛도 흐려져 횡설수설했다.

" 기분이 참 거지 같네요. 요즘은 내가 부랑자 같아요. 먹어도 배고프고 입어도 벗은 것같이 추워요. 아이, 빈해. 열라 빈해. 쪼다 같아. 빈속에 강소주 마신 것처럼 쓰려요. 속이 쓰려 죽겠어……."

 주사처럼 넋두리를 하던 은찬이 말을 멈췄다. 입구에 한결과 유주가 나란히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한결의 표정 역시 굳어버렸다. 은찬은 쥐고 있던 맥주병을 깨뜨릴 기세로 꽉 쥐었다.

 한성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 여기서 만나는구나."

 은찬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두 눈을 치뜨고 다가오는 한결을 째려보았다.

" 둘이 여기 단골인 걸 잊었어. 일 얘기 중인 거 같은데, 계속 해."

 은찬은 유주를 데리고 돌아서 가는 한결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최한결!"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고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 너, 잘 만났어! 너! 너 뭐야? 너 남자가 왜 그렇게 쩨쩨해?"

 한결은 아예 은찬을 무시하고 한성에게 말했다.

" 취한 거 같은데 데리고 나가지?"
" 취했어, 은찬 씨?"

 한성의 물음에 은찬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그 바람에 어지러워져서 약간 비틀거렸다. 하지만 곧 중심을 잡고 한결을 노려보았다.

" 날 처음부터 남자로 본 건 너였어. 한 번도 나한테 너 남자 맞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변명할 기회도 안 주냐, 이 나쁜 놈아? 네가, 네가 뭐 그렇게 잘났어? 응! 말을 좀 해보셔! 이 삐딱한 인간아!"

 한결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돌아서 가려했다.

 은찬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하림이는 나오라고 하고는 어떻게 지는 들어가냐? 의리 없게."

 한결이 휙 몸을 돌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은찬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술기운이라는 핑계를 빌어 꼼짝없이 서서 쏘아보았다.

" 뭐? 내가 틀린 말했어?"

 은찬은 턱을 한껏 치켜들고 대들었다. 그러고는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빛에 대고 거침없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 변태 배추벌레! 사람이면 사람답게 나잇값을 해! 인간이 어떻게 이해도가 그렇게 열악하냐? 직원이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한 번이라도 와봐야 하는 거 아냐? 설사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왜 그랬는지 물어는 봐야지. 안 그러냐고, 이 좁쌀 영감탱이야!"

 가게의 손님들이 흥미진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결도 열이 올라 물러설 수가 없었다.

" 그래, 좋아. 어디 변명해 봐. 몇 달 동안 사람을 속이고 농락하고 조롱한 이유라면 무척이나 거창하겠군? 설마 돈 몇 푼 정도는 아니겠지? 응!"
" 이씨이! 그래, 돈 몇푼 때문이다! 어쩔래! 아저씬 재벌이라 참 좋겠네! 남 속여가면서 돈 안 벌어도 되니까 참 좋겠어! 그게 그렇게 잘못이냐! 그리고 내가 언제 농락하고 조롱했단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 그런 적이 없어? 솔직한 척, 티 하나 없이 맑은 척 굴어서 사람 마음 다 털어간 게 누군데!"
"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어!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어! 근데 겁이 났단 말이야! 말하면 다 잃을까 봐 무서웠단 말이야! 먼저 눈치 채주면 좋았잖아, 이 무딘 자식아! 어떻게 석 달이나 지내면서 모를 수가 있어! 자존심 상하게, 씨이! 내가…… 내가 그렇게 아니야? 아무 느낌이 없어?"

 순간 은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꿋꿋이 서 있었다. 지금 이대로 나가버리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지금 그가 제대로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이다. 정신이라도 차리게…….

" 내가 게이야? 남자한테 느낌이 있게?"

 그가 제대로 말했다. 은찬은 의자로 후려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제대로 말해 주길 바랐던 건 위선이었나 보다. 술기운인지 뭔지 놓치기 싫다는 생각만 샘솟았다. 어떻게든 붙잡아 친구로라도, 아니 의형제로라도 지내자고 매달리고 싶었다. 이제 또 그를 못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 비참하고 서럽고 분해서…….

" 차라리 남자인 게 나았어. 귀여워서 동생이라도 삼자 싶었지. 그러자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근데 여자라고? 너 같은 여자를 어따 써? 돈 벌려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사람 뒤통수나 치고. 나쁜 년."

 한결의 모진 말에 은찬은 상처를 입고 움찔했다. 그런데 화가 솟기보다 애절한 마음이 더 강하게 일었다. 은찬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머리카락을 들어 귀를 보였다.

" 그, 그럼 동생이라도 해요. 증표도 아직 있어요. 그, 그것도 안 돼요?"

 은찬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 귀걸이의 금빛처럼 반짝거렸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은 듯 침묵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씩씩대고 있는 한결만이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한결은 좀 전보다 더 화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 니 자존심만 상처 입은 줄 알아! 넌 내 자존심을 짓밟았어.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한결은 어금니를 악다물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떨어지는 은찬의 눈물방울을 보고 급기야 폭발하고야 말았다.

" 수컷이 어떻게 암컷 냄새를 못 맡을 수가 있냔 말이야! 그게 남자한테 얼마나 치욕적인지 알아! 남자는 여자한테 안 보이고 싶은 부분이 있단 말이야! 제기랄!"

 그가 나가버렸다. 은찬은 아연실색한 채 서 있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가 한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여자한테 안 보이고 싶은 부분? 그게 뭔데? 내가 뭘 봤는데?

 은찬의 자제력도 무너져 버렸다. 화도 나고 괴롭고 슬프고 좌절해서 무턱대고 소리쳐 버렸다.

" 난 그런 거 본 적 없어요!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봐! 씨이!"

 그러자 사라졌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은찬은 그 거친 기세에 움찔 놀라서 숨을 멈추었다. 너무 저돌적으로 다가와서 혹시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이거잖아, 바보야."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렇게 말했다. ' 이거? 이게 뭔데?' 라고 생각한 순간 머리가 홱 잡아당겨졌다. 은찬은 어느새 키스 당하고 있단 걸 알았다.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게 뭔지도 알게 되었다. 얼어붙었던 은찬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감동과 흥분에 젖어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매달렸다. 온몸으로 짜릿한 쾌감이 내달렸다. 깊은 키스를 유도하듯 은찬의 몸은 점점 뒤로 젖혀졌고, 그런 은찬을 한결의 팔이 힘주어 끌어안았다. 짙고 격렬한 키스가 끝났을 때, 은찬은 아직 황홀경에 빠져 그의 입술을 따라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뒤늦게 입술을 뗀 걸 알고 눈을 떴을 때에도 은찬은 멍했다. 한결이 싱긋 웃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농후한 키스에 당혹했다가 뒤늦게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은찬이 한결의 손에 끌려 나간 뒤 한성과 유주는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군."
" 해피엔드인 영화예요."
" 남자는 그런 건 신경 안 써."
" 그럼요?"
" 적당한 섹스 신과 액션."
" 오빠한테서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말인 것 같네요."
" 내가 그렇게 건조했나?"

 모처럼 유주는 한성 앞에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 도와줘서 고마워요."
" 사업 파트너의 정서 함양에 신경 써주는 것도 오너가 할 일 이니까. 아가씨가 알아서 취해주더군."
" 한결이도 알아서 흥분해 주고요. 둘이 천생연분인가 봐요."

한성과 유주는 오랜만에 친근한 눈빛을 교환했다. 연인 사이 이전, 오빠 동생처럼 친하게 지냈던 그 시절처럼…….

'tv &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미널마인드(Criminal Minds) 갤러리  (0) 2007.08.07
커피프린스 1호점 _ 에필로그  (0) 2007.08.07
커피프린스 1호점 _ 20  (0) 2007.08.06
커피프린스 1호점 _ 19  (0) 2007.08.06
커피프린스 1호점 _ 18  (0) 2007.08.06
커피프린스 1호점 _ 17  (0) 2007.08.06


|  1  |  ···  |  79  |  80  |  81  |  82  |  83  |  84  |  85  |  86  |  87  |  ···  |  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