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유 있는 반항
은찬은 남자 화장실에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누가 들어오면 얼른 소변기 앞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물을 내렸다. 인기척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 안녕!"
" 뭐야, 여자처럼 손이나 흔들고."

 에이씨. 은찬은 대충 손을 씻고 얼른 화장실을 나왔다. 이 쇼는 며칠 전 하림이 농담처럼 한 말 때문에 시작됐다.

" 형 옷 갈아입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선기 형, 은찬이 형 옷 갈아입는 거 본 적 잇어? 낙균이 너도 본 적 없지? 대체 어디서 몰래 갈아입는 거야? 혹시 몸에 문신 있어? 아니면 흉터?"

 그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선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쇼를 해야 한다. 특히, 섹시하다는 둥 이상한 말을 자꾸 해서 사람 간담을 서늘케 하는 하림에겐 집중 방어가 필요하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뭘 해본 적이 없다. 날씨가 점점 좋아지니 더 걱정이다. 노출의 계절, 여름에는 어떡하나? 아우, 골치야.

 오늘 낙균은 연락도 없이 오지 않고 있다. 은찬은 청소를 끝내고 모닝커피 한 잔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손님은 감감무소식이다. 어제 저녁에 여자들 몇몇이 왔다 간 게 전부다. 이렇게 해서 무슨 3배의 매출을 올리겠다고.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송별회 때 승경이 메일을 보냈다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용. 사범님(- -)(- -)(^ ^) 저 승경이예요. ˝ ^▽^˝ 그동안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용. 승경인 사범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몸이 더 건강해졌어용. ^m^ 이제 매일 사범님 못 봐서 너무 슬퍼잉. o(T^T)o 엄마가 사거리에 있는 종합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어요. (ㅠ.ㅠ) 사범님이 그 학원으로 오셨으면 좋겠는데. (^---------^) 도장 문 닫아도 승경이가 자주 찾아갈게요. 밥 잘 챙겨 드시고 항상 행복하세용. >>------▷♡ 승경인 사범님을 정말 좋아해요.(♡♡) 승경인 사범님처럼 좋은 사람이 될게요. 불끈o(-˝ -)o 안녕히 계세용. 좋은 하루 되세요. (*^-^) 또 멜 보낼게요.(~.^)
 예쁜 승경이가.


 콧날이 시큰해 보고 있는데 모니터에 그림자가 졌다.

" 이게 글이야, 그림이야?"
" 그냥 마음이죠. 흑."
" 우냐?"
" 아이씨, 감동이잖아요."

 의자에서 일어난 은찬은 훌쩍이며 카운터 쪽으로 피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태권도를 놓은 것 때문에 마음이 쓰라렸다. 언제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가르칠 수나 있을지…….

" 낙균이가 아직 안 왔어요. 전화도 안 받고."

 홍 사장 아저씨가 사장의 커피를 내주며 말했다.

" 어제 문 닫기 직전에 무슨 전화를 받는 것 같았는데. 그 전화 받고 애 얼굴이 완전 한 달 묵는 변 색깔이 돼서 뛰어나갔거든요. 아무래도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 제가 다시 전화해 볼게요."

 은찬이 전화기를 드는데 사장이 말했다.

" 놔둬. 나한테 전화 왔어."
" 전화 왔어요? 뭐래요?"
" 관둔데."

 순간 다들 놀라 사장을 보았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오던 선기와 하림까지 사장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 왜요? 무슨 일인데요?"
" 사정이 생겨서 관둔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 예? 그냥 그러라고 하고 말았다고요? 무슨 사정인지 물어보지도 않고요?"
" 말하고 싶으면 말했겠지."
" 어떻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 관둔다는 놈 필요 없어."
" 그래도 그렇지……."
" 자, 모여봐. 얘기할 게 있어."

 사장이 뭔가를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은찬의 머릿속은 낙균의 일을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그동안 낙균에 대해서 알아두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같이 일하면서 하림과 선기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이다. 장녀의 책임감이 발동한 은찬은 빨리 낙균과 통화를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 고은찬, 너 듣고 있어?"
" 네, 네?"

 은찬은 자신을 보는 시선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 무슨 얘긴데요?"
" 며칠 근무해 본 느낌이 어떠냐고 물으시잖아. 형은 장사가 안 되는 이유가 뭔 거 같아?"
" 그, 글쎄……."
" 커피 맛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분위기도 이만하면 퍼펙트잖아요."
" 멋쟁이 사장에 잘생긴 종업원들까지 있는데. 그렇지?"

 하림과 홍 사장이 죽이 척척 맞았다.

" 선기는?"
" 진짜 잘 모르겠어요."

 진지한 선기의 대답에 다시 분위기가 다운되었다.

" 사람이 지나다녀야 말이지."

 은찬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홍 사장을 보며 말했다.

" 아저씨도 예전에 그랬잖아요. 이 동네는 다 일하는 사람들 뿐이라서 한가하게 커피 마시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요."
" 그건 그래. 여긴 대부분 젊은 직장인이고, 일 마치면 시내로 나가지 이 변두리에서 약속을 안 잡거든."
" 낮에 보면 아예 길거리에 사람이 안 다녀요. 아침에 출근할 때랑, 점심때, 그리고 퇴근할 때, 그 외에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어요. 무슨 죽은 도시 같아."

 은찬이 너무 살벌하게 말했는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장이 몸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 전술을 바꿔야겠다. 테이크아웃을 하자."
" 예? 그건 스타도 하잖아요. 차별성이 없어요."
" 스타보다 일찍 문 열면 돼. 일회용품들 준비할 테니까 되는대로 시작하자."
" 그럼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해야 되는 건데요?"

 하림이 불만스런 투로 말했다. 가게에서 자는 녀석이 불만할 게 뭐 있나. 눈만 뜨면 되는데. 큰일은 집이 먼…… 가만, 선기네 집은 어디지? 은찬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선기를 빤히 보았다.

" 7시에 문을 열 거니까 30분 전에 출근해야지."
" 예에?"

 모두 죽었단 표정이지만 누구 하나 입 밖에 내 말하지는 않았다. 가게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은찬은 갑자기 바빠진 한결을 쫓아다니며 물었다.

" 낙균이 이력서 좀 보여주세요."
" 그건 왜?"
" 아니, 사장님은 궁금하지도 않아요? 애가 갑자기 관둔다는데 무슨 일인지 걱정도 안 돼요?"
" 그놈의 오지랖은. 걔도 성인이야. 일이 있으면 지가 알아서 하는 거지. 힘든 일 있어도 제 몫이고, 필요하면 도움 청하는 것도 제 요량이고. 너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여유 있어? 제 앞가림도 못하는 게."

 이런 씨이! 사장만 아니면 이걸 콱!

" 그래도 같이 일한 식구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냉정합니까? 이제 스물하나인데 뭘 알아요. 사장님은 스물하나 때 완전히 어른이었어요? 스무 살에 금 그어놓고 그 전에는 애, 그 후에는 어른. 이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차차 성장해 가는 거지. 무슨 사장이 이러냐? 자기 직원한테 애정이 하나도 없어. 이런 사장 믿고 어떻게 일을 해."
" 그럼 너도 관두든가."
" 에이씨이……."
" 주둥이 안 집어넣을래."
" 주소만 달라고요."
" 시끄러. 가서 물고기 밥이나 줘."

 입이 나온 은찬은 주먹을 부르쥐고는 물고기 밥을 주러 갔다. 그러다 줄지어 서 있는 화분에 시선이 갔다. 괜찮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은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숨죽여 킬킬 웃었다.


 그날 오후.

" 집합!"

 쯧쯧. 코딱지만 한 가게에서 흩어지면 얼마나 흩어져 있다고 집합이야.

 은찬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무표정을 가장하고 한결에게 갔다. 창가에 앉아 있던 두 여자 손님이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 왜 그러세요, 사장님?"

 하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결을 쳐다봤다. 한결은 단단하게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주시하고 있었다.

" 이거 누가 이랬어?"
" 뭘요? 뭐가 이상해요?"

 은찬은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매서운 눈초리가 휙 날아왔다. 그래도 은찬은 뻔뻔스럽게 순진한 표정으로 말똥말똥 쳐다봤다.

" 네가 그랬지?"
" 뭘 제가 그래요? 뭔지 알아야지 대답을 하죠."
" 아! 저기……."

 그때 선기가 유리 화병을 가리켰다.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여덟 개의 유리 화병에는 핑크빛 페튜니아가 곱게 피어 있었다.

" 저기 뭐?"

 하림이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흐흐 웃고 싶지만 사장이 아직 의심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은찬은 의심을 받아도 인정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 뭔데? 내 눈에는 이상한 게 없는데."
" 저기 화병의 돌. 흰 돌이랑 검은 돌이랑 섞였잖아."

 모두 은찬의 짓인 줄 알아챘지만 누구도 아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결만이 얼음 왕자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은찬을 노려볼 뿐이었다.

" 똑바로 해놔."
" 제가요?"

 은찬은 날카로운 눈초리에 뜨끔한 척했지만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 전 예쁜데요. 흰 돌, 검은 돌 섞여 있으니까 다정하고 보기 좋은데. 안 그래, 하림아?"
" 저, 저는 모릅니다."
" 난 읽고 있던 커피 책이나 봐야겠다."

 불똥을 피해 모두 흩어져 버리고 미니 정원 앞에는 한결과 은찬만 남았다.

" 뭐 그런 거에 신경 쓰시나? 직원 일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면서."
" 고은찬, 너 이리 안 와!"
" 밖에 테이블 닦아야 돼요. 애들이 과자 부스러기 흘려놨단 말이에요."

 은찬은 행주를 들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나중에 은찬이 들어갔을 때 한결은 화병의 돌을 다 꺼내 다시 돌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이지 싶다. 화분은 늘 있던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화병의 줄은 조금도 비뚤어져선 안 되며, 테이블과 의자의 간격은 정확히 12cm 벌어진 정도로 세팅돼 있어야 한다. 이런 걸 보고 하림과 은찬은 말한다.

 참으로 한결스럽지 않을 수 없군.

 저녁 식사 무렵 한결이 은찬을 불러 말했다.

" 너 그런 애들이랑 계속 어울려?"

 돌 섞은 일로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장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 그 날치기 놈이랑 계속 뭔가 하고 있는거야? 형편이 그렇게 어려워?"
"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놈이랑 밤일이나 사기라도 치는 거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 그래."
" 참, 명쾌해서 좋네."

 은찬은 어이가 없어서 대들 듯 말했다.

" 만약 그렇다면요? 어쩌실 건데요?"

 사장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은찬은 볼이 뜨거워지려고 해서 헛기침을 했다. 괜히 얼굴을 긁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농담이에요, 농담. 그 자식은…… 걘 그냥 아는 놈이에요."

 은찬은 자신이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뉘앙스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사실 이름도 은새에게 딱 한 번 들어서 가물가물하다. 은새도 대부분 ' 그 양아치 자식' 이라든지, ' 그 공고 자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근데 그건 왜 묻는데요? 설마 내가 그 자식이랑 어울릴까봐 신경 쓰이는 건 아니죠? 우리 사장님이 그러실 리가 있나. 심장이 얼음인데, 얼음. 직원이 갑자기 관둔대도 이유도 안 물어보고……."
" 옷 갈아입고 와."
" 네? 아직 문 닫을 시간 안 됐는데……."
" 이력서 달라며?"

 은찬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엿듣고 있던 직원들의 눈도 상황은 비슷했다. 저 양반이 죽을 때가 됐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 가, 같이 가시게요?"

 은찬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 그, 그래, 인마."

 한결이 더듬는 은찬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재킷을 걸쳤다.

" 네가 두고두고 귀찮게 할 거 생각하니까 한 번 귀찮은 게 낫다 싶다."
"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 갖고 생색내지 마세요."
" 가기 싫어?"
" 아, 아뇨! 잠깐만요. 10초 내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은찬은 자신의 캐비닛에서 옷을 꺼내 버릇처럼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그걸 사장이 주시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후닥닥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은찬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날아갈 듯 한결의 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계속해서 전화를 했건만 낙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사장님 전화가 줘보세요. 아무래도 제 번호라서 안 받나 봐요."
" 내 전화도 안 받아."
" 언제 해보셨어요?"
" 돌 고름녀서 해봤다, 왜."

 은찬은 그만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장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돌 고르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까 너무 웃겼다.

" 입 찢어지겠다, 이놈아."

 은찬은 눈물까지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웃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한결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게 그렇게 웃기냐?"
" 그, 그게 아니라……."

 은찬은 숨을 할딱이다 겨우 말했다.

" 예, 예전에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요. 그땐 아파트에 살 땐데, 거실에서 나랑 레슬링을 하고 놀다가 베란다 난간에 있는 콩 바구니를 쏟았거든요."

 은찬은 겨우 숨을 골랐지만 그래도 아직 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콩 바구니가 아파트 정원에 떨어져 가지고 엄마한테 무지 야단맞고, 아버지랑 나랑 하루 종일 콩을 주웠거든요. 그 생각이 나네요."

 은찬은 기분이 이상해지려 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은찬이 조용하게 있자 한결이 음악을 틀었다. 노랫말이 없는 음악은 언제나 은찬을 졸리게 했다. 은찬은 머리를 기대고 창밖의 불빛을 보다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며칠 후.

 동이제약 쪽에서 동이의 핵심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이식품의 지분을 대량 매입했다. 그 사건으로 집안은 그야말로 폭풍 전야다. 본격적으로 경영권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한결은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하지만 한결도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처음에는 커피프린스가 너무 잘 되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다. 너무 잘 돼서 회사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면 보란 듯이 뭘 해야 하는데, 솔직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으니까 말이다. 그 오만함 때문이었는지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되고 있다. 거기에 더 큰 고민이 생겼다. 고은찬이다. 도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점점 헛갈린다. 때때로 이 녀석이 너무…… 그러니까…… 제기랄! 예뻐 보인다. 사내자식이 지나치게 곱게 생긴 탓이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 최한결, 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응? 아, 그럼. 듣고 있어."

 한결은 건성으로 대답하다 눈을 흘기는 유주를 보고 사과를 했다.

" 미안해.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 그럼 그 이야기부터 듣자. 미술관 증축 파티에는 어차피 안 올 거 같으니까."
" 아, 그게 언제라고?"
" 모레."
" 가지 뭐. 내 가게 오픈식에도 와줬는데."
" 아유, 황송해라. 자, 그럼 얘기해 보시죠. 요즘 최한결이 신경 쓰고 있는 게 뭘까요?"
" 아냐, 별 거 아냐. 네 얘기나 해 봐. 한성이 형이랑은 좀 얘기해 봤어?"
" 그 얘기가 정말 별거 아니야. 그냥 술이나 마시자."

 둘은 하고 싶은 얘기를 가슴에 두고 맥주를 홀짝이다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한결이 손을 펼치며 말했다.

" 레이디 퍼스트."
" 정말 별로 말할 것 없는데. 오빤 아직도 내가 괘씸하고, 난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오빠가 괘씸하게 여기는 게 속상하고. 아직 그 상태야. 조금의 진전도 없어."
" 형이 원래 완벽주의자잖아. 뒤끝 없지만 그만큼 냉정하지."
" 알아. 그래서 이렇게 꿈틀거리고만 있는 거야. 며칠 전에 오빠생일이었잖아."
" 그랬나?"
" 선물 들고 회사로 찾아갔지."
" 오, 한유주. 제법 세게 나갔는데 그래."
" 너희 할머님한테 딱 걸렸지 뭐야?"
" 그 낚싯바늘은 어디 안 닿는 데가 없다니까."
" 어머님한테 안 걸린 게 천만다행이었어."
" 큰어머니 마음이야 이해해야지 어떡해. 자기 아들이 차였는데 어느 어머니가 다시 와줘서 고맙구나 하시겠어."
" 그것도 알지. 오빠가 날 봐준다고 해도 어머님이 허락을 안하실 거야. 그래도 Life에 If가 있으니 희망을 가져야지."
" 많이 컸네, 한유주. 난 네가 유학 갔다 오길 잘한 거 같다. 예전에 넌 형한테 너무 휘둘려서 이게 인형인가 꼭두각신가 했거든."
" 어휴, 말도 참 예쁘게도 한다. 어떨 때 보면 너랑 오빠랑 무지 비슷해. 말도 차게 하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 그러면서 매력적이고?"
" 치이."
" 할머니 만난 얘기나 해 봐."
" 할머니께서 밥 먹자 하셔서 한정식 집에 갔어. 할머니랑 오빠랑 셋이 점심을 먹는데, 오빤 꿀 먹는 벙어리처럼 말도 안 하고 묵묵히 밥만 먹는 거야. 할머니랑 둘이서 묻고 대답하고 다 했지 뭐."
" 알 만하다."

 한성과 유주가 파혼할 당시 유주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다. 사돈 맺기로 한 집안이 비자금,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자, 유주 아버지는 단호히 연을 끊는 것이 청렴결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파혼을 감행했다. 유주는 거의 강제로 외국으로 보내졌고, 한성은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파혼이라는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그 일로 둘의 사랑조차 냉각되고 말았다. 한결이 보기에는 서로를 잇고 있는 마음의 다리는 끊어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얼어붙어서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뿐…….

" 재미없는 얘기 그만 하고 니 얘기 듣자."
"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

 한결은 운을 뗀 다음 맥주로 목을 축였다.

" 가게에 일하는 녀석 하나가 집안이 좀 어려워. 얼마 전에 그만둔다고 해서 가봤더니 부친이 포장마차를 하시더라고."
" 네가 직접 그 애 집에 가봤단 말이야?"
" 그게 그렇게 됐어. 날 아주 달달 볶는 놈이 하나 있거든. 그 녀석이 하도 성화를 해서 갔는데, 중요한 건 그 부친이 며칠 전에 허리를 다치셨다는 거야. 애가 지 아버지 대신에 포장마차를 하고 있더라고. 시장 보고 요리하고 그걸 다 혼자 하고 있더라고."
" 엄만 없어?"
" 응. 여동생 하나 있어. 고1."
" 안됐다."
" 녀석이 워낙 번듯하게 생겨가지고 그런 형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 그런 애들 많아. 더 어린 애들도 부모 대신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 있잖아."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날 낙균을 본 은찬이 그날 이후로 저녁마다 포장마차 일을 돕고 있다는 거다. 아침에 졸고 있는 녀석을 보고 한마디 하려고 했더니 홍사장이 살짝 일러줬다. 낙균의 부친 허리가 금방 낫는 건 아니지만 조금 괜찮아지실 때까지만이라도 은찬이 돕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 생활비를 좀 보태주면 어때?"
"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어."
" 절대 안 돼? 누가?"
" 고은찬. 그놈의 말에 의하면 그게 제일 자존심 상한대."
" 그게 그런 걸까?"
" 자기가 당해봐서 안다더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가족은 자기 손으로 보살피겠다는 거지. 그놈 말에 의하면, 돈푼깨나 있다고 동정심이랑 뭉쳐서 툭 던져주는 돈이 젤 재수없고 밥맛이란다. 그게 무슨 억지야. 안 그래? 그게 무슨 자존심이냔 말이야. 진정한 자존심은 남의 도움도 받을 줄 알고, 받은 걸 되갚아 주는 게 진짜지. 근데 이놈은 그게 남자의 영역 수호 본능이라나? 하여간 갖다 붙이긴 잘해요."

 잔을 비우고 술병을 집어 들던 한결은 자신을 빤히 보는 유주의 시선을 느꼈다.

" 왜?"
" 그래서 돈 주는 걸 안 했다고?"
" 응."
" 그, 은찬인가 하는 그 사람 말 때문에?"
" 넌 걜 안 겪어봐서 몰라."
" 너 그거 아니? ' 그놈 말에 의하면' 이 말을 두 번이나 했어. 무슨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처럼. 네가 누구 말을 그렇게 되씹는 거 처음 봐. 참 신기하네.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고 싶네."
" 지금 그 자식, 포장마차에 있을 거야. 걔가 오지랖이 태평양이거든."

 한결은 은찬에게 해버렸던 지울 수 없는 키스를 떠올렸다. 농구를 하고 물기에 젖은 녀석의 얼굴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졌던 턱의 감촉……. 어째서 녀석은 부드러울까? 옷을 화장실에서 따로 갈아입는 걸 보면 뭔가 수상하다. 호텔에서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녀석은 지나치게 여성스럽다. 향긋하기도 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 유주야, 나 잠깐 좀 가봐야겠다."
" 응? 어딜?"
" 미안. 담에, 아니 증축 파티에서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한결은 재빨리 재킷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택시를 타고 낙균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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