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 가게가 이렇게 바뀌었어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먼저 빨간 우체통이 눈에 띈다. 긴 봉 위에 작은 초가집 같은 우체통이 있다. 거기에는 흰 페인트로 이렇게 적혀 있다. Hi!

 중앙의 문 양쪽에는 커다란 통유리다. 그래서 정면에서 보면 커피집 내부가 훤히 다 보인다. 조명은 은은한 황금색이고 바닥은 물빛, 벽은 초록색, 탁자와 의자는 가는 줄무늬가 있는 커피색, 쿠션은 아이보리다. 문 양쪽의 유리를 접하고 테이블이 두 개, 오른쪽 벽에도 테이블 두 개, 그래서 모두 여섯 테이블이다. 입구에서 곧장 들어가면 주방과 카운터, 그 왼쪽에는 화장실이고, 화장실과 테이블 사이에 노트북 컴퓨터(참고로 이건 사장이 쓰던 거다.)와 미니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화초뿐만 아니라 분수에 물고기, 조각배까지 있다. 벽에 붙은 초록색 칠판에는 오늘의 스페셜 메뉴가 적혀 있다. 그리고 아래에는 보랏빛 수선화를 담은 작은 유리 화병이 있는데 거기의 흰 돌과 검은 돌을 섞어선 안 된다. 밴댕이 속알딱지 사장이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오픈식의 이벤트는 무료 시음회로 결정했다. 은찬은 선기와 함께 커피집 앞에 작은 테이블을 놔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권했다.

" 오늘 오픈했습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웃으며 커피를 건네는데도 사람들은 선기에게만 모여들었다. 오픈식이라면 사장의 손님들로 북적거려야 할 텐데 전혀 그런게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공짜 커피니 줄을 서서라도 받는데, 정작 돈을 내고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는 손님은 없었다. 모두 뭐가 그렇게 바쁜지 힐긋 간판만 보고 지나칠 뿐이다.

" 아무래도 고사를 안 지낸 게 찝찝해."

 은찬은 점심시간에 맞춰 나온 직장인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 저 사람들을 다 손님으로 잡아야 하는데. 이런 날은 돼지 머리 올려놓고 청주도 갖다놓고 해야지. 돼지 코에 지폐 숭숭 꽂아놓고 절도 올리고, 이웃 전방에 시루떡도 돌리고. 그래야 시선도 끌고 정도 나누고 그러는 건데 말이야.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미풍양속과 전통을 따라야지. 자기가 아무리 미국 유학을 갔다 왔다고 해도 자긴 김치 안 먹나? 김치 먹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안 그래?"

 선기는 대답이 없었다. 제복을 입은 은행 여직원들이랑 은새가 몰고 온 여고생들한테 둘러싸여서 커피를 따라주기에 바빴다. 은새는 개업이라 도와주려고 왔다면서 선기 옆에만 바짝 붙어 있었다. 제 언니 도와줄 생각은 않고, 쯧.

" 에휴, 배고프다."

 그때 초소형 자동차 한 대가 가게 앞으로 들어왔다. 흰색이라고 밝히는 게 민망할 정도로 긁히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차에서 구씨 아저씨가 내렸다.

" 쯧쯧, 웬만하면 차 좀 바꾸지."
" 어이, 찬아!"
" 왔어요? 뭘 또 이런 걸 챙기시고……."

 은찬은 구씨 아저씨가 사온 난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아저씨, 제일 비싼 걸로 팔아주셔야 해요?"
" 야, 이게 그 가게가 맞아? 잘 꾸며놨네."

 은찬은 주방에 아이스 모카자바 하나를 주문하고 구씨 아저씨의 테이블 쪽으로 갔다.

" 머리라도 좀 하고 오지."
" 왜, 뭐 이상해?"
" 그게 아니라 여기 여자들 되게 많이 온단 말이에요."
" 아!"

 북적거리는 밖의 테이블을 본 아저씨는 후회막급한 표정을 지었다.

" 이발한다고 젊은 놈들이랑 상대가 되겠냐? 저 사람이 너희 사장이야?"

 한결은 카운터 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네. 돈푼깨나 있게 생겼어. 몇 살이나 먹었냐?"
" 몰라요. 서른은 안 됐을걸요."
" 자식들이 뭘 먹고 하나같이 저렇게 키가 커? 요새는 인물없는 놈이 없다니까. 근데 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냐? 들통 안났어?"
" 쉿."

 은찬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이쪽을 보고 있는 한결과 눈이 딱 마주쳤다. 뜨끔해서 얼른 큰 소리로 말했다.

"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한결이 다가와 말했다.

" 여기가 짱깨집이냐? 목소리 좀 낮춰."
" 옛, 써!"
" 이 자식이."

 은찬은 히죽 웃으며 후닥닥 문으로 달아났다. 그러다 막 들어오려던 사람과 퍽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 아!"

 아프기도 하고 당황해서 찡그린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꽤 스마트하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아, 죄송합니다. 어, 어서 오세요."

 은찬은 얼른 종업원의 자세로 돌아가 인사를 했다.

"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딱히 안내할 만큼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예의를 갖춰 앞장섰다.

" 아니, 괜찮아요. 시간이 없어서……."

 말끝을 흐린 남자의 시선이 번득였다. 순간 은찬도 알아보고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곧 반가워할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으악! 이 사람은 그 남자잖아!

" 뽀, 뽁뽁이……."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은찬은 자신을 알아본다는 그 의미를 전달받고 무서움에 떨었다. 이 남자는 고은찬의 성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무심코라도 '아가씨'하고 부르면 끝인 거다.

" 어떻게 알고 왔어?"
" 할머님께 들었다. 아담한 게 예쁘구나."
" 애들 소꿉장난하는 거지 뭐. 앉아."

 헉! 게다가 사장과 아는 사이! 은찬은 움찔움찔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 밖에 저건 뭐야? 무슨 사랑 고백하러 왔어?"
" 개업 선물은 원래 불같이 일어나라고 주는 거잖아."
" 참, 형답네."

 유리문 앞에 5단짜리 화환이 서 있었다. 그것도 새빨간 장미로만 가득한 화환이.

" 야, 고은찬. 하림이 어디 갔어?"

 빠져나가려던 은찬은 딱 걸려서 다시 대령했다.

" 모, 모르겠어요. 화장실 갔나 보죠."
" 하림이 오면……."

 사장의 말이 뚝 멎더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 어, 한유주!"

 입구에 아리따운 여자가 서 있었다. 보라색 트렌치코트를 입었는데 스타일이 매우 근사했다.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발목도 가늘었다. 굽슬굽슬한 긴 머리에 이목구비가 선해 보이는 게 청순한 느낌이다. 근데 이 여자도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은찬은 어떻게든 안면을 가리려고 애쓰다 구씨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 커, 커피 맛 어때요?"
" 야, 뭔 크림이 이렇게 느끼하냐?"
" 그, 그게 맛있는 거예요."

 은찬은 아저씨와 얘기하는 척하며 한결 쪽의 동태를 살폈다. 근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사장은 길에서 돈 주운 사람처럼 싱글벙글하는데 뽁뽁이 남자랑 여자는 어색해 보였다. 서로 아는 것 같은데 표정은 뜨뜻미지근했다.

" 오, 오빠도 왔어요?"
" 응."

 한성의 뚝뚝한 대답을 커버하려는 듯 한결답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 넌 어떻게 알고 왔어?"
" 도헌이한테 들었어."
" 그 자식은 어떻게 알았지? 친구 놈들한테는 얘기 안 했는데."
" 예랑이도 알던데? 같이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왔어. 사실은 사랑니 뽑으러 치과 간대. 너한텐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창피하다고."
" 제발 걔 얘긴 꺼내지도 마.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 귀여운데 왜 그래. 요즘 연애하느라 정신없는 것 같더라. 참, 이거 받아. 개업 축하해."

 유주가 진주알 같은 걸로 장식이 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 오, 개업식이 좋긴 좋구나. 한유주가 선물을 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 별거 아니야. 리스야. 없는 솜씨 좀 부려봤어."
" 그래? 어디 한 번 볼까? 한유주 솜씨가 어떤지."

 선물 상자 속에서 빨간 별이 나왔다. 앵두 같은 열매를 엮어 별 모양을 만든 것이다.

" 여기도 빨강이야? 불같이 일어나라고? 둘이 오늘 통했나 보네."

 은찬은 빨간 리스를 들고 가는 한결의 움직임을 좇아 보았다. 그는 입구 유리문에 리스를 붙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허전한 줄 몰랐는데 그걸 달아놓으니까 한결 예쁜 게 분위기가 화사했다. 하지만 좋아라 하며 여자에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자 기분이 팍 상했다. 저까짓 거 손으로 대충 조물조물하면 뚝딱 만들겠구먼.

" 여기까지 왔으니 커피 맛은 보고 가야지. 앉아."
" 난 회의가 있어 먼저 가야겠다."

 앉으려던 유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 어어, 그런 식으로 하지, 최한성? 밤낮 하는 그놈의 회의가 내 가게 오픈보다 중요하다 이거지?"

 아니, 저놈의 사장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당연히 회사 회의가 더 중요하지, 이 바보 사장아.

" 야, 나 그만 가야겠다. 가게 너무 오래 비우면 손님 떨어져."

 구씨 아저씨가 갈 채비를 했다. 은찬은 자신의 가리개였던 구씨 아저씨가 움직이자 깜짝 놀라서 아저씨를 붙들었다.

" 아, 좀 더 앉아 있어요. 손님도 없으면서 뭘."
" 이놈아, 손님 없다고 사장이 다방에서 노닥거리면 진짜 종치는 거야."
" 다방이라니. 여긴 엄연히 커피 왕자들이 있는 커피프린스라고요."
" 왕자와 시녀겠지."
" 아저씨!"

 은찬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놀라서 굳어버렸다. 나가다가 입구에 멈춰 선 뽁뽁이 남자가 이쪽을 쳐다봤다. 은찬은 숨도 못 쉬고 얼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 아, 안녕히 가십시오!"
" 어휴, 저 화상."

 한결이 타박하거나 말거나 은찬은 쪼르르 달려 나갔다.

" 야, 어딜 가?"
" 공짜 커피 돌리러요!"

 소리치는 은찬은 주차되어 있는 고급 승용차 앞에서 뽁뽁이 남자를 붙잡았다.

" 저, 저기요……."

 한성이 쳐다보자 은찬은 말문이 콱 막혔다.

" 자, 잠깐만요. 아직 가시면 안 돼요?"

 은찬은 좀 한가해진 선기의 테이블로 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따랐다.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커피를 건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 이거 드시고 한 번만 봐주세요."
" 아가씨……."
" 쉿!"

 깜짝 놀란 은찬은 손으로 남자의 입을 막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컵이 흔들려 남자의 양복에 커피가 튀었다.

" 어, 어떡해.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은찬은 허겁지겁 바지춤에서 셔츠 자락을 꺼내 커피를 닦았다.

" 그만. 됐어요."
" 아,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세탁비 드릴게요."
" 다숲에서 봤던 아가씨?"
" 아, 그 말은 제발……."

 은찬은 다시 손이 올라가려는 걸 자제하며 남자에게 속삭였다.

" 아가씨라고 하지 마세요. 저 지금…… 하여간 사정이 좀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남자거든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금세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마트해 보이더니 역시 이해력이 좋은가 보다.

" 한결이가 속았다니 신기하군. 눈썰미가 좋은 놈인데."
" 그게 아마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돌려차기를 해서……. 아! 그때 계셨죠? 저 여자 분이랑. 이제야 생각나네. 저 여자 분이 그때 날치기당할 뻔했던 분, 그리고 다숲에도 같이 오셨죠?"
" 그러고 보니까 그때 그 스쿠터 청년."
" 네! 그게 바로 저잖아요. 그땐 저 남잔 줄 아셨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삼 신기하다는 듯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은찬은 좀 멋쩍어서 얼굴이 붉어졌다.

" 지금도 남자처럼 보여."
" 여자처럼 보인 적이 거의 없는데……."
" 그 거의 없는 행운을 내가 잡았군."
" 뭐 행운이랄 것까지야……."
" 한 번만 봐달라는 건 한결이한테 다숲에서 우리 만난 거 비밀로 해달라는 거지?"
" 와! 역시 똑똑하십니다."
" 글쎄, 생각 좀 해보지."
" 예?"

 남잔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일사천리로 풀리는구나 싶었던 은찬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서 남자를 보았다. 운전석의 유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 쌍방 계약을 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날 일은 나도 단속해야 할 게 있거든."
" 아! 저, 전 얘기 안 해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취하셔서 비틀거리신 것도 못 보고, 토하신 것도 못 봤어요."
" 허 참."

 남자는 피식 웃고는 가버렸다. 쌍방 계약을 하자더니 도장도 안 찍고. 에이씨.



일주일 전부터 정리를 시작했던 도장은 어제부로 완전히 문을 닫았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승경은 울었고 태원이는 언제 또 문을 여느냐, 이제 뭐 할 거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고등부와 일반부 관생들과 송별회도 조촐하게 가졌다. 맥주 두 잔에 취해버린 관장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 이 놈의 도시에는 일할 데도 놀 데도 없다. 나이가 들면 돈이라도 있거나, 돈이 없으면 나이를 먹지 말든가!"

 관장님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셨다.

 아버지같이 여겼던 분을 떠나보내고 울적한 아침을 맞았다. 밥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 엄마!"
" 어, 왜?"
" 그거 뭐야?"

 은찬은 새우 눈을 해가지고 엄마의 허리춤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곤 가볍게 물방울 무의 스카프를 잡아챘다.

" 이거 못 보던 거잖아. 또 샀어? 헉!"

 상표를 확인한 은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엄마를 다그쳤다.

" 부, 불가…… 이건 또 언제 산 거야!"
" 아니 이건 그냥, 봄도 되고 해서……."
" 아우, 정말 내가 못 살아! 다신 카드 안 쓴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그래 놓곤 또 일을 저지르면 어떡해! 이거 영수증 어디 있어? 어느 백화점에서 산 거야?"
" 그, 그게 내가 산 게 아니고……."
" 또 선물 받았다고? 이젠 안 속아. 이제 엄마한테 이런 거 사줄 친구는 안 남아 있다는 거 다 아니까 똑바로 말해. 어디서 산 거야?"

 그러자 갑자기 엄마가 울컥하는 표정을 했다. 은찬은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했다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시작해서 핸드백, 구두, 가전제품으로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 돌아가신 직후를 생각해 보라. 그때 엄만 아버지 안 계시는 허한 마음을 쇼핑으로 푸셨다. 당장 단칸방 얻을 돈도 없는 형편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들인 것이다.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 가신 큰아버지가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을 치렀을 것이다. 그 큰아버지마저도 진저리를 치며 이민을 가버리셨으니 이젠 손을 내밀 곳도 없다.

" 너, 너무하는 거 아니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 너무한대도 할 수 없어. 이 돈을 갚을 사람이 나밖에 더 있어? 적어도 나한테 물어나 보고 사든지. 도장도 문 닫고 힘든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이 집 머슴이야?"

 은찬은 덩달아 울컥할 것 같아서 얼른 한숨을 내쉬었다.

" 카드 줘. 카드는 또 언제 만들어서……."
" 그거 구씨가 사준 거야."

 욕실에서 나온 은새가 방문 앞에서 말했다.

" 어제 구씨가 엄마한테 선물한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오버 좀 하지 마."
" 뭐? 고깃간 구씨 아저씨 말하는 거야?"
" 그래. 이 먹쇠야. 아침부터 엄마를 그렇게 잡아서 참 좋겠다. 먹쇠, 돈 좀 버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낳아준 엄마도 동생도 안 보이지? 뭘 그렇게 잘해서 유세냐?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못 봐주겠네."

 갑자기 목 아래가 차가워지더니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은찬은 어쩌지도 못하고 엄마를 보았다.

" 어, 엄마……."

 아예 돌아눕는 엄마의 반응에 은찬은 기가 팍 꺾여버렸다.

" 엄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화 풀어라, 응?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아침이 부실했나 봐. 아, 아니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체했나? 그래, 체했나 보다. 내가 잘 안 체하잖아 엄마. 근데 한번 체하면 경기하고 헛소리하고 그러잖아. 엄마 알지, 응?"
" 쯧쯧. 돈이나 줘. 참고서 사야 돼."

 은새를 보내고 난 뒤에도 은찬은 계속 원맨쇼를 해야 했다.

" 차라리 엄마가 나 때려라. 내가 맞을 짓 했어. 때려. 응?"
"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후우, 드디어 풀렸다.

" 때릴 데 많아. 여기 배도 때리고 엉덩이도 때리고 종아리도 때리고……."

 갑자기 벌떡 일어난 엄마가 은찬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 너 한 번만 더 머슴이니 그런 소리 하면 나 진짜……."

 은찬은 얼른 엄마를 안으며 달랬다.

" 알았어, 알았어. 다신 안 그래. 다시 또 그러면 내가 고은찬이 아니라 저은찬이다. 화 풀어라, 엄마."

 겨우 달래서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고 나왔지만 뭔가 찜찜했다. 고깃간 구씨 아저씨가 왜 엄마에게 그런 비싼 선물을 했을까?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나?



 30년 만에 최고 온도라고 할 정도로 포근한 날이다. 봄이 아니라 여름이 온 것처러 날씨가 좋다. 햇살, 바람, 꽃. 다 좋은데 할 일이 없다. 홍 사장 아저씨는 주방에서, 하림인 가게 밖의 파라솔 아래서, 선기는 가게 맨 안쪽 구석 의자에 앉아서, 졸. 고. 있. 다!

" 낙균아."
" 네?"
" 우리 가게에 마지막으로 손님이 온 게 언제지?"
" 14시간 전이오."
" 그렇구나."

 입구에 서 있던 은찬은 자동차 경적 소리에 깬 하림을 보고 킥 웃었다. 눈치를 챈 하림이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 온몸이 찌뿌드드해. 여기저기 안 결리는 데가 없어."

 은찬의 뒤쪽을 경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뜨뜻한 방, 푹신한 침대가 그립지? 그러니까 노숙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
" 푹신한 소파로 했으면 좋잖아. 나무 의자가 다 뭐냐고. 쳇. 아, 사우나하고 싶네."
" 넌 어떻게 매일 사우나 타령이야? 완전 중년 같다."
" 어, 형. 우리 농구나 한판 할래?"
" 뜬금없이 웬 농구?"
" 요 뒤 공터에 농구대 있던데 30분만 뛰고 오자. 그러면 잠도 깨고 점심도 맛있고. 뭐 형은 늘 맛있겠지만. 어때?"
" 근무 시간에…… 그사이에 사장 오면?"
" 뭐 잠깐 마트 갔다 그러면 되지 뭐."
" 그럴까?"

 찌뿌드드하긴 은찬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엄마한테 애먼 소리를 해대서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말이다.

" 아저씨 혼자 두고 가도 될까?"
" 선기 형이나 낙균이 둘 중 하나는 있어야지. 형이랑 나랑은 게임이 안 되니까."

 은찬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하림을 힐끗 봤다.

" 왜 안 왜?"
" 근력의 차이가 있잖아. 형은 다 물렁살인데 뭐. 형 운동 안하지?"
" 이놈이 사람을 뭐로 보고. 야, 이래 봬도 내가…… 아니다. 승부는 말로 하는 게 아니지. 내기하자."
" 뭐? 진짜?"
" 그래. 밥 사기."
" 그놈의 밥은. 맥주랑 노래방 쏘기."
" 좋다."

 이리하여 은찬은 자존심을 걸고 하림과 농구를 하러 갔다. 공터에는 마침 남학생들이 막 농구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은찬은 공을 빌려와 하림과 1:1 농구 시합을 시작했다. 은찬은 중학교 때 하굑 대표로 뽑힐 정도로 농구를 잘하는 축에 끼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자들 속에서다.

" 어, 제법 하는데?"
" 이 자식이 형을 어르고 있어. 밥 살 준비나 하시지."

 은찬은 낮게 드리블을 하며 하림의 수비를 따돌리고 슛을 성공시켰다. 하림은 다리가 길어서 성큼성큼 걸었다. 휙휙 지나가 어느새 점프 슛! 역시 어린 남자는 빠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공터로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왔다. 공격 준비를 하던 은찬은 허리를 펴고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 어? 저 자식이 또 왔네."

 까마귀 나라 양아치. 어떻게 된 놈이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 이러다 정들겠다.

 은찬은 공을 튀기며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 야, 잘 왔다. 너 나랑 편먹자."
" 형, 그런 게 어디 있어."
" 내가 나이가 있잖아. 앉아서 좀 쉴 테니까 얘랑 해."

 은찬은 항의하는 하림에게 말하고 녀석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 너, 농구 좀 하냐? 나 대신이니까 잘해야 돼. 이거 내기 농구야. 알았어?"
" 누가 농구하러 온 줄 알아! 이번에는 진짜 주먹 대 주먹으로 제대로 해, 씨바!"
" 씨바고 나발이고, 너 이거 안 하면 나도 안 해."
" 뭐? 이 새끼가!"

 은찬은 성질을 부리며 휙 다가선 녀석의 가슴팍을 손가락 끝으로 툭 밀어냈다.

" 너 이제 은새 쫓아다니지도 않는다면서? 너 새 여자친구 생겼다던데? 아냐?"
" 으, 은새하고 상관없어."
" 근데 내가 뭐 하러 너랑 맞장을 떠? 그리고 두 번이나 졌으면 챔피언에게 뭔가 바쳐야 상대를 해주지. 일종의 시합비 같은 거. 안 그래?"

 녀석의 팔을 억지로 끌어 농구공을 줘여줬다.

" 야, 너 지면 안 돼. 이건 남자 대 남자, 자존심을 건 승부란 말이야. 느끼하게 생긴 노랑머리를 확 밟아버려. 오케이?"

 밀어놓고 떨어지려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타격이 왔다.

" 아야!"

 어떤 새끼야! 하고 돌아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사장이 버티고 있었다. 오늘도 눈이 돌아가게 세련된 모습이다. 검정색 바지에 검정색 셔츠, 그리고 회색 재킷을 입었다. 타이는 없고 셔츠 단추는 세 개나 열려 있다.

" 한결스러운 차림이네."
" 뭐하는 거야, 이 자식이! 인마, 놀려면 혼자 놀지, 애를 꼬드겨서 땡땡이를 쳐!"
" 가게에 손님도 없고 해서……."
" 손님이 없으면 발로 뛰어서라도 손님을 끌고 와야 할거 아냐. 넌 정신 상태가 아직 멀었다, 멀었어."
" 에이, 그러지 마시고 같이 한 게임 하죠?"
" 뭐? 어떻게 된 놈이…… 웃지 마, 자식아."
" 딱 30분. 그러면 도로가에 서서 살인미소 팍팍 날리면서 짱구춤 출게요."
" 뭐? 도로가에서 짱구춤? 허, 그거 되게 웃기겠네. 너 정말이지?"
" 그냥은 아니고 진 쪽이. 오케이?"
" 오케이. 너 죽었어."

 사장이 소매를 걷는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단순한 걸까.

" 근데 저 놈은 누구야?"
" 은찬이 형 파트너예요. 사장님은 저랑 한편입니다요."

 한결이 미간을 모으며 까마귀 나라 양아치를 뚫어지게 봤다. 순간 은찬은 뜨끔해서 얼른 공을 잡아 드리블을 시작했다.

" 자, 경기 시작입니다."

 단순한 한결은 곧 날치기를 잊고 경기에 몰입했다. 날치기 역시 맞장을 뜨는 것을 잊고 게임에 열을 올렸다. 시합은 30분 넘게 계속됐고 은찬은 속옷까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보신탕 먹을 때가 됐나 보다. 어우, 이 아까운 육수.


 은찬은 기진맥진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 아악!"

 이럴수가! 졌!다!

" 너, 너, 짱구춤이다."

 한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으아아악!"

 은찬은 분해서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그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난 은찬은 멀어지는 까마귀 나라 양아치를 보았다.

" 야! 그냥 내빼느냐!"

 잘 놀았다든지, 다음에 또 보자든지, 인사라도 하고 갈 것이지. 져서 자존심 상했나? 고 녀석, 점점 귀여워지네.

" 야, 야!"

 별안간 사장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은찬은 사장의 험악한 표정에 흠칫 놀라싿.

" 저 자식, 저 자식이 그 자식이지!"

 헉!

" 누, 누구요? 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어 하림아! 씻으러 가니? 같이 가."

 은찬은 후닥닥 일어나 쏜살같이 달렸다. 하림까지 앞질러 공터에 마련된 수돗가에 도착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아예 머리를 들이댔다.

" 사장님 왜 저래요?"

 옆에 와 씻는 하림이 걸어오고 이는 한결을 보며 말했다. 제다리 사이로 한결을 본 은찬은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망각의 약을 뿌려주소서. 우리 사장의 기억에서 고 녀석 몽타주만 지워주소서.

 이윽고 은찬의 옆으로 온 한결은 수돗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은찬이 머리를 숙인 채 꿈쩍도 않고 있자 한마디 했다.

" 그만 해. 감기 들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꾹 짰다. 계속해서 물이 뚝뚝 흘러서 윗옷까지 다 적셔버렸다.

 이런 제기랄! 젖으면 안 돼!

 가게에 취직한 이후로 혹시나 싶어 가슴에 압박 붕대를 감긴 했지만, 셔츠가 젖으면 그것마저 다 드러나 보일 게 뻔했다. 은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때 고개 숙인 은찬의 눈앞에 손수건이 나타났다.

" 그러게 감당도 못할 거 머리는 왜 감아. 뭐든지 저질러 놓고 보지? 으이그, 생각 없는 놈. 식충이에 무뇌아 소리까지 들어야겠냐. 응?"

 머리를 닦기에는 턱도 없이 얇고 작은 손수건이지만 무척 감격스러웠다. 은찬은 손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하림이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오, 젖으니까 더 섹시한데! '은찬틱하다.'에 이걸 추가해야겠어. 남자면서 남자를 녹이는 섹시함을 발하다."
" 야! 시, 시끄러!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에이, 덮어쓰려면 끝까지 덮어쓰지. 사장님, 죄송합니다. 이 농구를 제 아이디어예요. 그래도 간만에 몸 좀 푸셨죠? 사장님 실력이 대단하시던데요? 특히 그 절묘한 어시스트는 최고예요. 인정, 인정."
" 가자. 짱구춤 보러."

 사장은 걸음을 뗴기 전 은찬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였지만 사장의 손이 턱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건 턱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훔치기 위한 동작이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은찬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는 자세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왜 자기가 닦지? 내 턱인데. 근데 가슴이, 가슴이 뛴다. 24년간 잘 뛰던 심장이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고막 안쪽에서 소리가 울린다. 쿵쿵쿵 쿵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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