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벽에 머리 박고 죽을때, 접시에 코 밖고 죽을래? 어느 쪽도 싫어요. 나는 아직 더 살아야 돼요. 은해 학원비도 대야 하고 은행 대출 이자도 내야 하고 여기저기 깔린 빚도 갚아야 돼요. 그럼 무릎 꿇고 빌래. 시말서를 쓸래? 어느 쪽도 싫어요. 비는 것도 싫고 쓰는 건 더 싫어요. 차라리 그냥 엎드려뻗쳐를 하면 안 될까요? 밤새 하느님과의 대화에 시달린 은찬은 땅을 보고 출근을 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사장이라도 알짜배기 아르바이트를 뻥차버릴 정도는 아니었는데....뭐에 씌었나 보다. 한순간만 참았으면 될 텐데. 가게로 들어선 은찬은 한창 공사 중인 인부를 휘둘러보다가 주방에서 나오는 아저씨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천하의 고은찬이 막말 좀 했다고 밤새 속 끓인 것도 아닐 거고.”
“잠이 안 오더라고요.”
“뒤통수에 손가락만 대도 자는 놈이 자미 안 와?”
“그 놈의 커피 때문이에요. 백수 사장은요?”
“오늘은 안 나올 모양이야.”
“혹시, 다른 말은....”
“없던데? 좀 있으면 인쇄소에서 전단지 가져올 거니까 그거나 돌려. 어, 저기 낙균이 오네. 그래도 사장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야.”
“왜요?”
“네가 술이 약해서 헛소리한 거라고, 그냥 주사한 거니까 좀 봐주라고 그랬더니.”
은찬은 귀를 쫑긋 세우며 아저씨를 보았다.
“그러니까 뭐래요?”
“길들이겠데”
“예에? 뭘 길들어요?”
“성질 나쁜 개를 길들이는 법을 잘 안다나.”
“뭐 개요? 그거 내가 개란 소리죠?”
“어, 낙균이 오냐. 하여간 시간 하나는 칼이구나. 딱9시네.”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형? 쌍꺼풀이 두 겹 됐네요? 눈 진짜 커졌다.”
어제의 일로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들이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다. 하림인 말할 것도 없고, 영감처럼 점잔만 빼던 낙균이 녀석도 웃으며 얘기를 걸어오고, 선기까지 보기 드문 살인미소를 날려왔다. 윽, 내 심장! 멋진 세 남자 사이에 끼었으니 여기가 천국이어야 하는데, 에이 왜 이렇게 졸린 거야. 홍 사장은 중하라는 커피 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열을 올리고, 은찬은 선기와 짝을 이뤄 전단지를 돌렸다. 하림과 낙균이 삐걱대는 걸 알아서 일부터 둘이 짝을 맞춰졌다. 같이 일하면서 좀 친해져 보락 말이다.
“어, 저기 찬이 오빠 아냐?”
“어, 오빠!”
손을 흔들며 뛰어온 여학생들은 은새와 친구들이었다.
“고은새. 너 이자식! 학교는 어떡하고 또 쏘다니는 거야!”
“오빠. 오늘 토요일이거든.”
“야, 토요일이라도 그렇지. 자습 안해!”
“어우, 소리 좀 지르지 마.”
“아직 학기 초라 그런거 없어요. 오빠,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우리가 좀 도와드릴까요?”
“어머! 오빠 여기서 알바해요? 와, 되게 잘생겼다.”
전단지를 뺏어간 여학생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
“이 오빠 누구예요? 우씨, 짱 멋있다!”
“오빠도 사진 진짜 잘 나왔다. 근데 이 오빠는 누구예요?”
여학생들의 시선이 동시에 선기에게로 날아가 꽂혔다, 그러더니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은새마저도. 단숨에 팬클럽이 생겨버린 선기는 포커페이스였다. 난처하다거나 귀찮다는 표정도 없었다.
“언니, 저 오빠 전화번호 알지?”
은새가 다가와 속닥거렸다. 은찬은 기겁을 하며 은새의 입을 막았다.
“야, 오빠라고 불러.”
은찬은 야단난 여학생들을 떼어 은새와 함께 쫓아냈다. 언제저들의 입에서 언니라든지, 동문여고라는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선기는 전혀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가게에서 인부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림과 낙균은 친해지기는커녕 아예 말도 안 했다. 주먹질만 안 했지 한차례 쌈을 벌인 게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말좀 붙여볼까 하는데 가게 밖에 오토바이 한 대가 와 섰다.
“어, 저 자식....”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돌려본 은찬은 낯익은 얼굴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어이, 날치기!”
찬이 외치자 녀석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다가왔다. 체격이 큰 건 둘째치고 시커먼 낯빛에 눈빛이 날카로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야, 찬아”
“괜찮아요”
은찬은 가게에서 나와 녀석과 마주 섰다.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오! 오토바이 좋고, 산 거냐, 또 훔친 거냐?”
녀석은 뭐가 뒤틀렸는지 심통이 난 표정이다.
“너 좋게 살아. 응? 한 번만 더 내 눈에 날치기하는 거 띄면 그땐 아주 경찰서에다 확 일러버린다. 알겠어?”
“씨바, 맘대로.”
“어우.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야, 너 그렇게 살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혼자 병들어 죽어. 그거 아니면 한평생 유치장 들락거리든가. 아니면 길바닥에서 인생 하직하는 거야. 그거 너무 서글프지 않냐?”
“나 교장 선생님 훈화 들으러 온거 아니거든.”
“와, 너 훈화란 말도 알아? 보기보다 똑똑한데.”
“고마 씨부렁대고 한판 붙자.”
“자석도 아닌데 붙기 뭘 붙어. 그리고 내가 얘기했잖아. 이 몸은 귀하신 사범님이라 도장이 아닌 데서 함부로 주먹질 못해. 그건 무도인의 자세가 아니거든.”
“그럼 맞든가!”
갑자기 녀석의 주먹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하마터면 얼마 전에 멍든 눈에 또 다크서클을 만들 뻔했다. 뭐 때문인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이번에는 먹는 걸로 물러설것 같지가 않다. 그래? 그럼 좋아.
“야, 너 아직 은새 꽁무니 쫓아다녀? 그래서 이래?”
“은새고 나발이고 붙자고, 씨바!”
“이 자식이 누구 밥줄 끊을 일 있어. 지금 얼굴로 먹고 살게 생겼구먼. 야, 저걸로 하자.”
“먹는 거 안해. 새끼야”
“이 새끼가 또 말을 막 하네. 그래. 나도 오늘 기분이 꿀꿀하고 그러니까 한 번 하자. 대신에 저걸로.”
은찬은 가게에서 10m 정도 떨어진 오락기를 가리켰다. 그건 아주 낡은 펀치 게임기였다.
“점수 많이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단판으로 끝내. 오케이? 져도 딴소리하기 없기다.”
“너나 딴소리하지마. 새끼야”
“사나이 대 사나이. 아니 인간 대 인간으로 약속.”
은찬이 속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녀석은 손바닥을 툭 치고 앞장서 갔다. 동전도 제가 알아서 넣었다. 먼저 녀석이 치게하고 은차은 뒤에 쳤다. 녀석은 온몸을 실어 펀치를 날렸지만 은차은 짧게 끊어 쳤다. 점수는 보나 마나 은찬의 승리. 믿지못하겠다는 듯이 쳐다보던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어쨌거나 이건 주먹 싸움이니까 승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이 툭 튀어나왔다. 말도 없이 험상궂은 표저을 짓기는 했지만 다시 하자는 등의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쯧쯧, 이놈아. 이 고철 덩어리랑 맞먹은 지 어언 4년이다. 이 기계에 대해선 딱 꿰고 있단 말이지. 백날 덤벼봐라 되나. 얼뜨기 같은 놈. 은찬은 히죽 웃으며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고 가게로 들어왔다.
“얘들아, 비 와. 빨리 돌려야겠어.”
쾌적한 환경. 맛있는 커피, 멋진 종업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를 갖췄으니 게임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기존의 형편없던 매출을 생각해 보면 3배가 아니라 5배도 문제없을지 모른다. 한결은 자신감에 차 있는 데다 흥미까지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로지 집안의 압박으로부터 멋어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지만 성공하게 되면 의외로 기쁠 것 같았다. 나름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노력한 보람도 있을 것이다. 새벽까지 포커를 치고 한낮에야 눈을 뜬 한결은 때마침 들어온 형이랑 딱 마주치고 말았다. 금방 깨어나 간신히 팬티 차림을 한 채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던 형이 두 눈에 불을 켰다.
“너, 이자식!”
이래서 집에 들어오기 싫었던 거다.
“형수도 있는데 그러고 다닐 거야.”
한결은 커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제 방으로 갔다. 2층의 공간은 거실과 주방이 있는 홀을 사이에 두고 형과 한결의 공간으로 나뉘어있다. 한결은 왼쪽, 형과 형수는 오른쪽. 한결의 방에 있는 거라고는 단상 위에 있는 침대와, 청회색 톤의 긴 가죽 소파, 벽걸이 TV가 전부다. 그 외는 모두 빈 공간이어서 3회전 텀블링을 할 수도 있다.
“너, 좀 이리 앉아 봐.”
“설교라면 관두쇼. 어제 회사에 불려가서 아버지한테 실컷 들었으니까.”
“앉으라면 좀 앉아.”
한결은 커피를 마시며 형이 앉은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 거야? 이제 그만 놀고 들어와서 아버지 좀 도와.”
“얘기 못 들었어? 나 요즘 오너야. 눈알 돌아가게 바빠.”
“할머니 뜻 몰라? 재주 썩히지 말고 똑바로 보라고 미끼 던지신 거야. 테스트에 석 달 낭비하지 말고 회사 들어와서 실력 발휘해.”
“할머니가 무슨 꼼수로 그러셨건 난 내 뜻대로 해. 매형까지 끼워 잘하고 있잖아. 대체 아버지도 형도 왜 그러는 거야? 나 하나쯤은 내 맘대로 살면 안돼? 박 터지게 싸우는 전쟁판에 나까지 총 쥐여 세워야겠어?”
“인마, 아버지가 힘들어하셔.”
“누가 들으면 내가 마이다스라도 되는 줄 알겠네. 미국에서 나 어떻게 놀았는지 보고 다 받았을 거 아냐. 나 공부 안 했어. 밤낮 파티 다니고 계집애들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그랬어. 이런 놈이 회사를 뛰어든다고 하면 누가 꿈쩍이나 하겠어?”
“크리스 최”
한결은 움찔 놀라 형을 봤다. 그러다 형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얼굴을 돌렸다.
“모건스탠리 주최 뮤추얼펀트 투자 수익률 게임에서 우승.”
“그건 그냥.....씨이. 어떻게 알았어?”
“할아버지가 너 총애하셨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심심하면 질문하셨던 거 기억나? 돈이 천원이 있는데 10만원 짜리 스케이트가 사고 싶으면 어떻게 할 거냐. 사촌형제들 다 모이면 으레 그런 질문을 하곤 하셨지. 그때 네가 뭐랬는지 기억 안 나?”
“몰라. 생각 안나.”
“할머니가 사주실 거라고 했지. 니 생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그러니까 천 원으로 너 좋아하는 헬리콥터 살 거라고.”
“그렇게 평범한 대답을 했단 말이야?”
“할아버진 좋아하셨어. 천 원도 스케이트도 안 놓칠 놈이라고 네가 아무리 회사에 뜻이 없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는 널 염두에 두셨어. 술자리 때마다 당신의 후계자 감은 ‘최한결뿐이라’라고 대놓고 말씀하셔서 분위기 살벌하게 만드셨다고 들었어. 작은 아버님들. 사촌들. 주주들까지 다 아는 사실이야.그래서 지금 네가 필요한 거고.”
“아버진 싫어하셨어. 몰라? 당신 젖혀두고 내가 후계라도 이을까 봐 벌뻘 떠셨다고. 큰아버진 더 싫어하셨지.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 큰아버지가 그러셨어. 회사에 눈독 들이려면 황야에 총 한 자루 없이 홀로 서 있을 각오하라고. 회사는 누구도 못 믿고 누구도 믿어서 안 되는 세계라고.”
“애한테 그런 소릴 했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겁나서 못들어오겠단 거야?”
한결은 바닥에 남은 커피를 마저 aklt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샤워하고 나가봐야 돼.”
“한성이 놈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뭐로 거는데? 조세 포탈? 비자금? 분식 회계? 걸 건 많지”
“야, 인마!”
“어차피 큰아버지 돌아가실 때 같이 치러야 했던 일 아냐? 큰아버지가 총대 매고 아버진 발 빼고. 그 일로 큰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부리지로 아버지가 회사 맡고. 그 시나리오 생각 하면서 한성이 형 분할 만도 해.”
“너, 이 새끼! 도대체 어느 편이야! 한성이랑 붙어 놀더니 아예 넘어간 거야!”
한결은 욕실 입구에서 멈춰 섰다. 화를 내고 있는 형을 보며 공격적인 태도로 말했다.
“애도 아니고 무슨 편 가르기야. 한통속이라면 그쪽이 다 한 통속이지.”
“무슨 말이야?”
“어차피 한 핏줄이잖아.”
나 빼고.
한결은 욕실로 들어와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스모 선수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기억 속의 말들이 머리를 울렸다.
‘가엽지도 않아요? 애들 왜 그렇게 무섭게 대해요.’
‘데려다 키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지. 시골구석에서 흙덩이 돼 있는걸 데리고 왔더니 은혜도 모르고.’
‘은혜는 무슨 은혜. 애가 무슨 죄예요. 다 어른들 죄인데....’
부모님이 다투는 목소리다. 우연히 듣고서 돌 사진이 없는 이유를 알았다. 최하결은 입양된 아이다. 시골구석의 어느 복지원에서.
“탬퍼할 때 좀 더 세게 눌러요. 대략 13.5kg 정도의 힘으로 눌러줘야 제대로 나와요.”
“사장님은 어디서 좀 배우셨나 봐요?”
“미국에 있는 친구 녀석 하나가 바리스타였어. 그 녀석 때문에 커피 맛을 좀 알게 됐지.”
오후 늦게야 가게로 나온 한결은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근데 한 놈이 안 보이네? 식충이 어디 갔어?”
“전단지 돌리러 가서 아직 안 왔어요. 야, 노선기. 같이 다닌거 아냐?”
“다 돌리고 오는 길에 잠깐 볼일이 있다고 갔는데....”
“놔둬. 어디 박혀서 또 먹고 있겠지.”
한결은 대강 정리가 된 주방에서 간단히 시연을 해보였다. 커피의 진한 향이 실내로 퍼져갔다. 빗소리와 향기가 어우러져 분위기가 좋았다.
“컵은 어떻게?”
“항상 데워놓는다.”
“그렇지.”
한결은 유리잔을 꺼내 설탕과 커피를 담고 거품을 낸 생크림을 얹어 내놓았다.
“자, 비엔나 커피다. 스푼으로 젓지 마. 그건 비엔나에 대한 모독이야. 그냥 마셔 봐.”
꽃미남 셋은 태어나 처음으로 비엔나 커피를 시음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홍 사장이 비록 떨떠름한 표정이긴 해도 한결은 계속 밀고 나갈 생각이다. 어쨌든 그에게 자극은 되는 모양이다. 집에서도 연구를 하는지 홍 사장의 커피 맛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노력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흐믓하다. 가게 문을 닫고 종업원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나니 저녁 시간이다. 집에 들어가 밥을 먹긴 정말 싫다. 친구 녀석들을 만나면 분명 술을 먹을 건데 오늘은 클럽에서 노는 것도 별로 흥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호텔로 가야할 것 같다. 밥 먹고 책이나 보든지.....한결은 손을 뻗어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Katty B의 Let's Hear it for the Boy를 따라 부르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유리창을 때리는 비와 어둠과 빠른 비트의 음악이 섞이니 향미 강한 자메이카 럼이 생각났다. 식전에 한잔하고 싶어졌다. ‘뜨거운 물의 목욕도 ....’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한결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앞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사람을 친건 아니겠지?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한결이 떨며 차에서 나왔을 때 웅크려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빗속에서 뭔가를 주워 올리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개를 든 얼굴이 헤드라이트에 드러났다.
“괘, 괜찮.....야!”
얼굴을 본 순간 안도감과 함께 열이 확 치솟았다.
“어, 사장님? 퇴근하는 길이세요?”
“이 자식 죽으려고 곱게 죽지 차에는 왜 뛰어들고 지랄이야!”
“죽긴 누가 죽는다고....”
한결은 놀란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은찬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너 이리 와, 새끼. 넌 좀 맞아야 돼.”
한결은 홱 헤드락을 걸고 머리에 꿀밤을 마구 먹였다.
“아야!”
“이것도 차력이냐? 자동차랑 부딪쳐서 누가 이기나 내기해? 응!”
“아야야! 이씨이, 아파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 꽉 움켜잡는데 옷이 축축한게 느껴졌다. 힘을 푼 한결은 몸을 떠는 은찬을 보고 놀랐다. 머리며 옷이며 흠뻑 젖어 있는 거였다.
“뭐 하느라고 비 맞고 쏘다니는....”
한결은 은찬의 손에 들린 걸 보고 말을 멈췄다.
“너 아직까지 그거 돌리고 있었어?”
“아니, 돌리는 건 다 돌렸죠.”
“근데.”
“근데 인간들이 길거리에다가 다 버려놨잖아요. 우리 가게 이미지 나빠질까 봐 줍는 거에요. 이거 시안 짜는데 우리가 얼마나 고민했는데요. 종이도 최고 좋은 거 썼는데 아깝잖아요. 말려서 내일 또 돌려야죠.”
“그래서 이 비 오는데 그거 주우러 다녔단 말이야?”
순간 한결은 비를 맞고 선 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젖어 있는 머리며 얼굴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에 뭔가 뭉클한 게 떠오르면서 보듬어 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것이다.
“어휴. 이 등신아.”
한결은 이상해진 감정을 숨기려고 과장되게 핀잔을 주었다.
“그거 말린다고 쓸 수나 있을 거 같아? 쭈글쭈글한 거 주면 좋아도 하겠다. 하여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니까.”
“쭈글쭈글하면 어때서....”
“타, 인마.”
“예? 왜요?”
“타라면 타”
“아니. 난 집에 가서 밥 먹어야 하는데...”
“그놈의 밥 먹여줄 테니까 타라고 인마.”
한결은 트렁크를 열어 스포츠 가방을 꺼내 왔다. 어제 오전 수영장에 다녀와 그대로 넣어둔 거였다.
“시트에 물 떨어지니까 이걸로 닦아”
얼굴과 머리를 닦던 은찬이 콜르 벌름거리며 말했다.
“수건에서 향수 냄새가 나네요?”
“내가 쓰던 거라 그래”
“엑!”
“깔끔 떨긴.”
한결은 찡그리고 있는 은찬에게서 수건을 뺏어 들고 머리를 마구 문댔다.
“아! 내가 할게요.”
“가만있어 봐, 자식아. 감기 걸려서 못 나온단 소리만 해 봐. 아주 잘라버릴 테니까.”
“이까짓 걸로 감기는......아야!”
“하여간 머리숱도 엄청 많아요. 꼼꼼하게 닦아.”
수건을 내던진 한결은 시동을 걸고 다시 호텔로 차를 몰았다. 핸들이 잡은 손가락이 또 찌릿찌릿했다. 녀석의 머리카락만 만지면 전기가 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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