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마녀를 실망시킬 순 없지
싱글들을 위한 발렌타인데이 파티.
연인들의 국경일인 발렌타인데이의 흥에 동참하고자 하는 싱글들의 발악이다. 뭐, 이름이야 어찌 됐건 한량 최한결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굿 찬스다. 이 기회를 놓칠쏘냐.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얼굴이다. 싱글이 아닌 놈들도 있다. 유부남이어도 본인이 싱글이라고 우긴다면야 굳이 확인하지 않는 게 오늘의 특별법이다.
“오빠, 얘 몰라요?”
젠장. 박도헌의 여동생이다.
“얘, 상원건설의 막내딸. 둘이 선보기로 했다면서?”
도헌이 자식은 두 쪽 방울 대신 여동생을 달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쪼다 같은 놈.
“안녕하세요? 장미석이라고 합니다.”
한결은 꾸벅 인사하는 제법 단정한 여자를 보고 잠시 딴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가 이번 주말에 잡아 놓은 여자와 동일인만 아니라면 어찌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맞선역->결혼역’이라고 써 붙인 특급 열차를 맨몸으로 맞받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박도헌의 진드기 여동생이랑 가까운 사이라니 결단코 사양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속닥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래서 잠깐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빠 쇼에 내가 보기 좋게 넘어가 거죠? 내가 오빠한테 눈이 멀어서 따져볼 경황이 없었어요. 그런 쇼까지 해서 날 떼놓으려고 했다는게 슬프긴 하지만 이해해요. 오빠가 자유로운 영혼이란 거 익히 들었으니까. 오빠가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요. 난 오빠 구속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날 이용하는게 어때요? 중매 시장에 이상한 소문 나도는 것보다 낫잖아요. 어른들 아시면 오빠만 곤란해져요.”
진드기가 비비적거기면서 입김을 넣는데 소름이 확 끼쳤다. 이건 진드기가 아니다. 아나콘다다. 뭐든 통째로 집어삼키는 아마존의 무법자 말이다.
“미석인 걱정 마요.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아나콘다를 붙이느니 게이 쇼를 하는 게 나았다. 한결은 ‘일쇼이퇴’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번의 쇼로 두 여자를 물리치는 것이다. 한결은 뛰어와 숨이 턱까지 찬 은찬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자신이라면 눈 감고 옷장에 들어가 마구 껴입어도 저렇게는 안입을 것이다. 진짜 오래 입어서 지저분하게 물 빠진 청바지에 황토색 코듀로이 셔츠, 한 사이즈 큰 게 분며한 남색 점퍼. 성장기도 아닌데 왜 제 사이즈대로 옷을 안 입는 거냐고. 게다가 모자는 저게 또 뭔가.
“아저씨! 내가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은찬은 오자마자 씩씩거렸고, 한결은 듣지도 않고 자율 방범대 모자를 홱 벗겨버렸다. 은찬이 놀라 멈칫한 사이에 멱살을 잡고 벽으로 홱 밀쳤다. 그 순간 둘의 몸 사이로 은찬의 팔이 잽싸게 들어가 한결의 갈비뼈를 압박했다. 한결은 예상치도 못한 빠른 방어에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지대처럼 버티고 있는 팔 때문에 갈비뼈가 아팠다. 한결은 아픔을 참느라 더 매서운 표정으로 들이댔다.
“너 똑바로 들어. 이번에 제대로 안 하면 끝인 줄 알아. 알겠어?”
“이거 놔요.”
“대답부터 해."
“돈 갚을게요. 시간 주면 돈 갚을 거니까 이 개 같은 쇼에서 나 빼줘요.”
“이 개 같은 쇼도 오늘로 마지막이야. 오늘 확실하게 해버리면....”
한결은 엉겁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에 눈이 번쩍했다. 그래. 좋았어! 오늘 확실하게 해버리는 거야 이 녀석들 보는 앞에서 커밍아웃하는 거다. 공기보다 가벼운 입들이 가만있을 리 없고, 그러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겠지. 영감 귀에 들어가면 한바탕 뒤지버지기야 하겠지만 몇 년간은 끌어다 붙일 여자가 없을거다. 오호, 럭키 찬스!
“정말입니까? 정말 오늘로 고용 계약서를 찢는 거예요?”
“인마, 그러니까 제대로 해. 알았어?”
한결은 멱살을 놓고 은찬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곧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은찬의 행색을 보니 도저히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한결의 심미안으로 볼 때 은찬의 패션 센스는 미래소년 코난보다 나을 게 없었다. 저런 녀석이랑 어쩌고 한다면 콧방귀나 뀔 것이다. 수준이 어느 정도라야 말이지. 젠장!
“얼굴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한결은 미소년의 아우라를 믿어보기로 하고 연극 무대로 올랐다. 쿵쿵 심장이 뛰는 가운데 뭔지 모를 흥분이 전신을 감쌌다. 재미있는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대와 묘한 긴장감이 돌아 살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한잔해야겠어.”
바에 앉은 한결과 은찬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거기에는 박도헌의 아니콘다 여동생도 있었다.
“어이, 마셔.”
한결이 내민 건 테킬라. 은찬은 분위기에 압도돼 어리벙벙한채로 잔을 받았다. 한결은 잔을 부딪치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 알코올의 힘을 좀 빌렸다. 녀석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결은 시애틀에서 이웃사촌 딕에게 기습 키스를 당했을 때를 떠올려 봤다. 키스의 감촉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상대가 190cm에 가까운 거구의 근육남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녀석을 때려눕히고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제3의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 하는 것과 겪는 건 역시 차원이 다른 문제다. 테킬라를 원샷한 은찬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결은 괴로워하는 은찬에게 레몬 조각을 물려주었따.
“켁!”
“옷도 못 입어. 술도 못해, 잘하는게 뭐 있냐?”
끌끌 혀를 차는데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흠, 그게 있었군. 540도 돌려차기. 그거 하나는 멋들어졌어. 그때 누군가 한결의 팔을 툭 쳤다. 돌아보니 박도헌이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구냐?”
턱짓으로 은찬을 가리키는 걸 보고 한결이 짧게 대답했다.
“노예”
“엥?”
도헌이 더 말하려는 데 마이크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자자, 여러분. 인사는 대충 나눴을 테니까 분위기를 화끈하게 띄우기 위해서 바로 메인 이벤트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름하여 왕 게임!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박도헌, 박예랑, 불량 남매를 무대로 모시죠. 오늘의 폭군과 마녀가 되겠습니다.”
휘파람과 환호를 요란하게 터트리며 벌겋게 익은 청춘들이 날뛰었다. 무대로 오른 폭군 박도헌이 남며의 이름을 호명했다. 한결이 알기로 남자는 약혼녀가 있는 상태였고 여자는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폭군이 요구한 것은 ‘랩댄스’였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하자 남자가 붙잡았다. 자기가 대신 추겠다는 것이다. 관중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분위기는 뜨거웠다. 의자에 앉은 여자 앞에서 남자가 허리를 돌리며 접근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가슴을 드러내 보이고는 여자의 손길을 요구했다. 여자의 무릎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여기저기서 야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열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옆에서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결이 쳐다보자 은찬이 말했다.
“무, 물 없어요?”
자식, 저 정보 보고 달아올랐나 보네. 역시 청춘이 좋구나.
“여긴 술만 팔아.”
가볍게 포옹하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남녀. 애써 예의를 갖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이미 오늘 밤을 기약하는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때 짓궂은 표정의 여자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퍼졌다.
“제가 원하는 남자는....최한결.”
박수 소리와 함께 일제히 날아오는 시선. 한결은 움지이지 않고 박예랑에게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아, 여기서 한 가지 규칙을 알려드리죠. 마녀는 게임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아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마녀는 어디까지나 사악해야 되거든. 남자한테 녹아서 흐물흐물해지면 안 되지.”
“맞아. 마녀가 마음을 곱게 쓰면 재미없어.”
“큭큭. 안됐다.”
“자, 남자는 최한결. 이제 여자를 뽑으시죠. 마녀님.”
샐쭉해진 표정으로 면면을 훑어보던 예랑의 시선이 잠시 멎었다. 일제히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한결은 그 시선 끝에 주말에 보기로 한 장미석이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설마.... 그때 예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상대가 여자여야 할 필요은 없는 거죠?”
1초 동안 잡음이 멎었다. 그러다 곧 환호성이 치솟으며 짓궂은 광기로 들썩거렸다.
“역시 마녀다!”
“최한결 귀국 쇼냐! 아예 스트립쇼를 한 번 시켜!”
“저기 저 남자”
예랑이 손가락으로 은찬을 찍었다. 그리고 사악하게 선언했다.
“키스!”
한결은 '어디 한 번 해봐!‘하는 예랑의 시선에 대고 ’땡큐!‘라고 말했다. 일이 생각보다 더 잘 풀리지 않는가. 뜬금없이 웬 허름한 복장의 아이돌 스타 같은 녀석을 내놓고 ’사실 나 게이야!‘ 하는 것보다 백배 나은 방법이다. 게임이니까 억지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영운을 남겨야 할 것이다. 혹시 저 자식 게이아냐? 하는 의심은 남기고 확답은 하지 않는 것이다. 소문이 더 무성하도록 말이다.  한결은 굳은 표정의 은찬을 향해 낮게 말했다.
“쇼 타임”
한결이 일어서 무대로 향하자 난리가 났다. 박수와 환호성에 눈들이 반짝반짝 했다. 한결이 무대에 올라서 은찬 쪽을 보았다. 은찬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한결을 쳐다보았다. ‘당신 미친 거 아냐!’ 하는 표정이었다. 한결이 마이크를 빌려 쐐기를 박았다.
“올라와.”
“오호, 목소리 섹시해 주시고!”
“뭐야,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어머, 쟤 너무 귀엽다. 확 깨물어 주고 싶어.”
“뺨따귀 뽀송뽀송한 것 좀 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아. 혹시 동방신기 아냐?”
여성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저 새끼 누구야? 처음 보는 놈인데?”
“몰라. 최한결 애인인가 보지.”
“애인? 여자야, 남자야? 새끼. 되게 예쁘게 생겼네.”
누군가 은찬을 툭 밀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손이 은찬을 떠밀었다. 걸어오는 은찬을 보고 있자니 한결의 기분도 착잡했다. 남자와의 키스는 딕에게 당한 한 번의 경험뿐이었다.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빌어먹게도 자꾸만 녀석의 입술에 시선이 간다. 제기랄. 토하면 어떡하지?
“오빠 입술. 미석이한테 주는 것보다 남자 애한테 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근데 정말 할 거예요? 비위 상할 텐데.”
예랑이 이죽거리지만 않았다면 뺨에 하는 걸로 끝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쇼인 거 다 알아.’ 하는 예랑의 표정을 본 순간 깨달았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아나콘다를 떼긴 글렀다는걸. 오기가 생겼다. 해치워 버린다. 너 보란 듯이. 눈 크게 뜨고 똑똑히봐. 이 아나콘다야. 은찬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 꼭 팬티에 똥 싼 표정이다. 한결은 왠지 웃음이 터지려했다. 이 기막히고 끔찍한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은찬의 ‘설마’ 하는 표정에 대고 한결이 말했다.
“눈 감아.”
해치워 버린다 생각하고 덥석 머리를 잡아당겼다. 굳은 녀석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우왓!”
“한다!”
“미친 놈!”
“뭐야? 진짜 하는 거야?”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나는 가운데 문득 한결은 생각했다.
어라 부드럽네?
본인은 몰랐지만 한결의 손은 자연스럽게 은찬의 허리를 감아 당기고 있었다. 은찬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손에도 힘이 들어가 머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한결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은찬의 머리는 점점 젖혀졌고 허리는 휘었다. 저도 모르게 한결이 머리를 돌렸다.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입술이 맞물렸다. 한결의 입술이 부드러운 움직임을 더해갔다. 순간, 실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핀 뽑힌 수류탄이 떨어진 것처럼 고요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길고 짙은 키스에 모두가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한결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몰입해 있었다. 그때 별안간 은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홱 떠졌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한결은 깨달았다. 자신이 혀를 밀어 넣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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