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한 달 전, 한결의 25시
(1) 오전 9시 50분, 동이그룹 본사
회전문 안으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로비가 보인다. 휘황찬란하다. 들어서니 더 굉장하다. 넓고 따뜻하고 깨끗하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말씨에 정돈 미소. 아직 기내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회장실이 몇 층이죠?”
“회장님 뵈러 오셨습니까?”
“어린 애인이 있단 얘기 못 들으셨나? 그게 난데.”
훈련된 상냥함이 잠깐 무너지더니, 한결의 차림새를 빠르게 훑었다. 초록색 스웨이드 재킷과 넥타이 대신 늘어트린 실크 스카프, 바지와 맞춘 회색 헌팅캡. 한결도 질세라 여직원을 뚫어지게 보았다. 특히 새빨갛게 칠한 입술 주변을 말이다.
“호, 혹시 약속은 하셨습니까?”
“약속? 했나? 가물가물 한데....”
“저 그럼, 누구시라고 여쭐까요?”
“전속 마사지사.”
“아, 네. 자, 잠깐만요. 금방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은 수화기를 들고 살짝 몸을 틀었다.
“독대 아니면 안 만난다고 해요.”
여직원에게 말하고 한결은 안내 데스크에 몸을 기대어 실내 조경을 둘러보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련의 남자들이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시야에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마, 마사지사라는데요. 아, 네. 알겠습니다.”
다급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여직원에게 한결이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네?”
“영감들이 떼거지로 들어오던데.”
“아..... 오늘 글로벌 경영 전략 회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11층 회의실에서 합니다만....”
“10시?”
“네”
“하!”
완전 걸려들었군.
“회장실은 23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셔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바로...”
“미스.....”
사원 카드의 이름을 읽고 한결이 다시 말했다.
“여선애 씨. 아마 10쯤 뒤에 회장실에서 전화가 올 겁니다. 그럼 이렇게 말해요. 전속 마사지사가 갑자기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서 급히 돌아갔다고요. 절대 미리 연락할 건 없어요. 그럼, 수고.”
“아, 저기....”
한결은 휙 몸을 돌려 재빨리 로비를 빠져나왔다.
“이 멍청아, 떡밥도 골라 물어야지. 하여간 욕심이 화를 부른다니까.”
중얼거리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계단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필이면 아는 얼굴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오늘 좀 볼 만 하겠지? 폭죽 좀 터지겠는데, 응?”
“하나는 불, 하나는 얼음인데 뭐 터지기야 하겠냐, 양쪽 다 약아서 부딪치지도 않을 거야. 대충 으르렁거리다가 말겠지.”
“거기에 한 사람 더 있잖아. 한성이 형 모친.”
“그러면 이쪽에는 더 큰 양반이 나서시겠지. 작은 아버님이 또 불이잖아. 맞불 작전 들어가는 거지 뭐.”
“대표께서 나오신다면 할머니도 오시지 않을까? 형은 어떻게 생각해? 할머니는 어느 쪽이실 것 같아?”
“난들 아냐, 그 속을.”
“한결이 불러들였다는 얘기가 있어. 할머님이 말이야.”
“이게 무슨 애들 패싸움도 아니고 머릿수 채워 무슨 소용이야. 돌아가신 양반은 돌아가신 거고, 장손이 대표하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더 싸워봤자 제 집 대문에 똥칠하는 건데 뭘 어쩌자는 건지. 나 원 참. 추하다 추해.”
“한성이 형 입장에서야 거저 앉을 왕좌를 눈앞에서 뺏겼는데 억울하지. 한규 형은 이왕 잡은 금줄 놓치기 싫을 거고. 오죽하면 또라이 같은 한결이까지 끌어들이려고 하겠어. 이거 기다리다 보면 우리 순서도 돌아오겠는데? 응, 형?”
“난 바라지도 않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 한 마리 들어와서 쪽박이나 안 깨면 다행이지.”
사촌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웃음소리가 들이지 않아도 한결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어 있는 스스로를 조롱하며 굳어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렸다. 계단은 고요햇다. 한 발짝 내려 걷는데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다 픽 웃고 말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라....
한결이 주차장으로 들어설 무렵 흰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한결의 차 바로 옆에 주차를 했다. 열쇠를 꺼내던 한결은 차에서 내리는 운전자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오늘 왜 이래 정말.
“한결이구나.”
한결은 손을 내미는 한성과 가볍게 악수를 하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이젠 제법 늙수그레한데 그래?”
“아직 서른도 안됐다.”
“서른 되면 말해. 실버타운 예약해 줄 테니까. 형한테 그 정도는 해야지.”
“녀석, 여전하구나.”
한결에게는 사촌 형제들 중 그나마 한성이 제일 마음 편한 상대였다. 가장 멀어졌어야 할 사이지만 한결은 껄끄럽게 대하지 않았다. 한성도 3년 전이나 다름없이 대했다. 그럴 수 있는 건 둘 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굳이 그걸 숨기려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둘은 싸우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성격이다.
“언제 왔어?”
“몰라. 며칠인지 몇 시간인지. 아직 비행기 안인 것도 같고.”
“할머니 뵈러 왔어?”
“한집에 사는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부러 회사까지 뵈러오겠어?”
“원래 미쳤잖아.”
한성의 날카로운 농담에 한결은 픽 코웃음을 쳤다. 손으로 자동차 키를 돌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낚싯바늘에 걸렸어.”
“최한결을 걸 수 있는 바늘도 있나?”
“할머니 무슨 양 드시는 거 아냐? 갈수록 포커페이스가 신묘해지셔. 티타임 10분에 차 한 대.”
“밑지는 거래는 아니군.”
“그 거래에 넘어가서 호랑이 굴에 들어왔더니, 때마침 오늘 호랑이들이 단체로 발톱 손질한다네. 어이구, 놀라서 내빼는 중이야.”
“회사가 그렇게 재미없냐?”
“내가 재미있어지면 형들이 재미없을 거 아냐.”
“구경만 하는 놈이 어떻게 알아.”
“노친네들 공 차는데 끼어들기 싫어.”
“응원 단장이라도 하든가.”
“세상에 재미나는 장난감이 얼마나 많은데 뭐 하러? 힘들면 형도 벤치에서 좀 쉬지 그래?”
“말에 가시가 있다.”
“발라서 듣든가, 한쪽 귀로 흘리든가.”
“네 독설은 백신도 없니? 어떻게 갈수록 더해.”
“내버려 둬. 이렇게 살다가 가는 인간도 있어야지.”
한성이 시계를 보고는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들어가 봐야겠다.”
“늦었다고 내 핑계 대지는 마. 아버지도 한규 형도 나 회사 들어온 거 모르니까.”
“ 뵙고 가지 그래.”
“됐어, 조만간에 미련한 여우랑 한 번 뭉치자. 알지? 같이 들어온 거.”
한결은 혹시나 해서 힐끗 표정을 살폈지만 한성의 얼굴에는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할머니의 포커페이스는 이쪽 내림인가 보다.
“알았어, 몰랐어?”
“관심 없다.”
“냉정하긴. 얼음 어쩌고 하는 게 영 틀린 말은 아니네.”
“가봐. 시차 적응 끝나거든 전화해.”
“어느 쪽? 여우?”
“실없는 놈”
“알았으니 가보슈.”
차에 오르려던 한결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한성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보이는 인간들마나 넥타이가 다 왜 저 모양이야. 회사에서 단체로 지급하는거 아냐?”
(2) 오후 5시경까지 취침
종일 굶고서 잠만 잤지만 별 탈 없음.
(3) 오후 7시경부터 음주
별로 친하지 않아서 편한 녀석들과 함께 개가 됨.
(4) 다음날 오전 10시 50분, 여난
이리저리 뒤척이던 한결은 귀신처럼 벌떡 일어났다. 너무 극적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가 윙 울렸다. 머릿속에서 다람쥐 20마리가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한결은 머리를 움켜 잡으며 다시 쓰러졌다.
“으....”
자신의 신음 소리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람쥐들이 대화를 하고 있나 보다.
“어머, 이건 뭐예요?”
“연어 샐러드입니다.”
암컷이 묻고 수컷이 대답하는 것 같다.
“아, 연어. 맛있겠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다람쥐가 생선을 먹던가? 좋은 냄새가 난다. 생선 냄새는 아니다.
“오빠 일어나요. 내가 룸서비스 시켜놨어요. 어서 일어나서 아침 먹어요.”
뭔가가 자꾸 어깨를 흔들었다. 찡그리며 눈을 뜬 한결은 밝은 분홍빛에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위로 시선을 올리자 갈색을 띤 머리가 보였다.
“너, 누구냐?”
“아이 참, 오빠는. 먼저 씻을래요? 목마르죠? 물 가져올게요.”
한결은 아까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속은 쓰리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머리가 울려서 관자놀이를 세게 눌러버렸다. 다람쥐가 10마리쯤으로 줄어들었다.
찌뿌드드한 목을 조심해서 돌려보았다. 금테를 두른 화장대가 보였다. 고전풍이 탁자와 소파, 또 하나의 침대. 호텔이군.
“오빠. 물”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물 잔을 내미는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낯선 여자였다. 일단 물 잔을 받아 깨끗이 비우면서 생각했다. 얘가 누구지?
“아!”
“생각났어요?”
“야! 너, 기어이!”
“굿모닝.”
어디 이 여자가! 한결은 안으려 드는 여자를 팩 밀치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어지러워 잠시 비틀 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애가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 엉!”
한결은 뒤돌아서서 재빨리 바지를 입었다.
“귓구멍이 썩은 거냐. 아니면 뇌가 썩은 거냐!”
“오빠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운명을 바꿀 순 없어요.”
“뭐? 무슨 명?”
“난, 오빠 처음 본 순간에 바로 ‘이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 바로 내 운명이구나!’ 알았단 말예요”
“허!”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 오빠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오빠 좋아할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심장으로부터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귀엽게 보았던 첫인상의 정나미마저 뚝 떨어졌다. 아니, 원수처럼 미워졌다. 솔직하게? 뭐가 솔직하단 거야? 솔직하단 건 빈속에 술을 들이부으면 쓰리다는 것까지다. 감정은 화학이 아니다. 공식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기 일쑤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우선 밥부터 먹어요. 배 안 고파요? 난 배고픈데.”
한결은 다가와서 팔짱을 끼려는 여자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아얏!”
“달라붙지 말란 말 열 번은 더 했을 텐데!”
여자는 야속한 눈빛으로 부딪혔던 팔을 문질렀다.
“원하는 게 뭐야? 싫다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밤새 달라붙어서 사람 괴롭히는 이유가 뭐냐고, 응!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닿는 거 정말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여자로 보여? 좋은데 싫다 그러게?”
“왜? 왜 싫은데요?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처음 봐요.”
“너 보라고 있는 거 아니다. 더 나쁜 꼴 보기 전에 조용히 꺼져라.”
욕실로 들어가려던 한결은 버티고 있는 여자를 보고 신랄하게 말했다.
“몸뚱어리 망가트려 줘? 원하는 게 그거냐? 오빠 친구가 니 밥이야? 아니면 돈 필요해? 현금은 없는데 카드라도 가져갈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오빠, 말 참 밉게 한다.”
“도헌이한테 전화해 줄까? 도헌이 동생만 아니었으면 벌써 머리끄덩이 잡아서 밖으로 내던졌어. 그 꼴 당해도 운명 같은 소리가 나오는지 듣고 싶어 죽겠지만, 도헌이 봐서 참는다. 니 오빠한테 전화하기 전에 얼른 가라.”
“전화해요.”
황당하게도 여자는 끄떡도 없었다. 아, 조그만 게 강하게 나온다. 뭘 믿고 그러냐. 꼬맹아. 좋게 가랄 때 좀 가지.
“우리 오빠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할 건데요?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한결의 눈빛이 경멸로 차디차게 얼어붙어도 여자는 봄날처럼 살랑거리기만 했다.
“차라리 우리 엄마한테 전화할래요? 오빠랑 잔 거 알아도 우리 엄마 그렇게 야단은 안 치실 거예요. 사위 사랑은 장모라니까.”
“너 어젯밤에 뽕했지?”
“무슨 소리에요?”
“아직까지 환각 상태인 거 같아서 말이야.”
“자긴 취해서 기억도 못하면서.....”
“주둥이 좀 닥쳐라.”
짜증이 팍 치솟았다. 아침부터 이런 젖비린내 나는 여자랑 말씨름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몹시 짜증스러웠다.
“네가 내 눈앞에서 알몸으로 림보를 해도 난 관심 없어.”
“미안하게도 어젯밤에는 안 그랬어요.”
“너 꽃뱀이냐? 운명이라서, 첫눈에 반해서. 거짓말이 술술나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았는지 여자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깨물더니 눈이 촉촉해졌다. 무슨 작전인지 알만했다. 한결은 한숨을 내쉬고 더 냉정하게 말했다.
“다시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난 말이야. 만약 내가 죽어서 부검실에 가도 여의사가 칼질하면 벌떡 일어날 거야. 그렇게 돼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난. 바늘귀에 국수 가락 끼울 정도로 제정신 아니면 여자 안 건드려. 만약 내가 간밤에 너 건드렸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하고 만다. 알았으면 조용히 나가라. 다시 내 눈앞에 보이면 그땐 바로 박 병원 원장실로 전화 때려 버린다. 알겠어?”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한결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의 눈물을 봐도 별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드는 생각이라고는 영악해서 수를 쓰는 건지. 조금이나마 겁을 집어먹은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으, 머리야.....”
빌어먹을! 뭔가 생각이 나야 말이지. 정말 건드렸으면 어떡하지? 도헌이 자식은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여동생 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젠장! 기억하려 할수록 머리가 욱신거렸지만 노력은 해봐야 했다. 생각나는 거라고는 술자리에서 먼저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것이다. 처음엔 몇몇 친구들과 시작된 술자리였다. 그런데 모르는 사이에 자리가 점검 커져서 낯선 얼굴들이 더 많아졌다. 걔 중에는 도헌이 동생과 친구라는 여자들도 있었나보다. 자리가 무르익을수록 난장판이 되어갔고.
“어이. 거기는 놔둬. 걘 니들 씹다 버리는 껌쯤으로도 안 여겨.”라든가.
“야, 야, 그 자식은 건드리지 마. 그러다 한 대 맞는다.” 같은 말들이 나올 땐 만사가 귀찮아져 있었다. 오로지 자고 싶단 생각으로 자리를 떴는데 누군가 팔짱을....
“찰거머리가 따로 없어요. 어떻게 룸까지 따라 들어왔지? 순순히 내가 들여보냈을 리가 없는데...”
샤워를 마찬 한결은 샤워코롱으로 마무리하고 가운을 입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오자 방이 비어 있었다. 드디어 갔나 보다고 마음을 놓는데 거실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최한결이 어디 있어요?
“누구신데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명랑한 저 목소리는 뭐란 말인가. 젠장!
“야! 너 이 자식, 아직도 말귀 못 알아....”
버럭 소리를 지르던 한결이 멈칫했다. 거실에 어머니가 서있는 것이다. 후우.....
“아가씨는 그만 나가 봐도 좋아요.”
“네?”
“아가씨 말귀가 좀 늦구나? 이봐요. 아까지. 내가 쟤 엄마니까 아가씨보다 우선순위잖아. 그러니까 나가라고. 이제 알아듣겠어?”
“아, 안녕하세요?”
“뒤늦게 인사는....”
“그, 그럼....”
여자는 반발심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뒷걸음질을 쳤다. 한결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태산이구먼. 지지리 복도 없지. 여난이다. 여난이야. 커피 향을 느낀 한결은 식탁 쪽으로 걸었다. 신선한 아침 식사가 식어가고 있었다. 커피 잔을 들고 베이글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오, 오빠. 그럼 나중에 봐요.”
“잠깐만, 아가씨.”
“네?”
“얘, 거기 티스푼이랑 포크 같은 거 다 있어? 혹시 없어진 거 있나 봐. 잘 봐봐. 나중에 괜히 오해 살지도 모르니까.”
“뭐, 뭐예요? 지금 저보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아니, 난 내 아들한테 한 말인데. 아가씨 벌써 난청이야? 어머! 어디 어른을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천박하게 생겨서는.”
한결은 새빨개진 여자도, 도도하게 앉은 어머니도 무시하고 소파로 걸어갔다.
“뭐예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버릇없긴, 말 나온 김에 너 핸드백 한 번 보자. 뭐 들었는지 쏟아봐.”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뭘 훔치기라도 했단 말씀이세요?”
“너, 말 참 희한하게 하는구나. 내가 훔쳤다고 했니? 너 혹시 발 저리니?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잖아. 응?”
“어우,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른 앞에서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아유. 내가 상종을 말아야지. 얘, 아들. 다시 저런 돼먹지 못한 애랑 어울리지 마. 알았어?”
쾅 소리와 함께 여자가 사라진 뒤에 마녀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뭐, 저런 바보 같은 애가 다 있니? 아이, 재밌어.”
어머니는 아이처럼 할딱이며 웃음소리를 드높였다. 한결은 찡그리며 보다가 더 이상 고음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내가 너 가는 데 모르겠니? 너 잘 가는 술집, 미용실, 호텔, 사우나는 내가 다 꿰고 있잖니.”
“아들을 마마보이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놔두면 알아서 들어갈 텐데 여기서 찾아오실 건 뭡니까.”
“3년 만에 와서는 너 나랑 몇 분이나 얘기한 줄 알아? 첫날 식구들이랑 저녁 먹고 오늘이 처음이야. 얘, 그거 커피지? 향이 좋네. 나도 한 잔 줘.”
한결은 커피와 베이글을 가져와 어머니 앞에 놓았다. 커피를 가져가는 어머니의 손가락에는 아기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번쩍였다. 귀에도 목에도 커다란 보석이 번쩍이며 달려 있었다. 한결은 어머니처럼 화려한 치장이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꾸미지 않았을 때의 어머니는 영락없이 촌부 같다. 당신의 외모와 분위기를 잘 알아서 어머니는 무섭도록 열심히 치장을 한다. 남미의 앵무새처럼 차려입고 속눈썹을 붙이고 보석을 달고 끼고 붙인다. 그러면 자신이 반짝거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까 걘 누구니?”
“아무도 아니에요.”
“여자 문제야 워낙 깔끔하니 엄마가 믿는다. 설사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안 숨길 거고 그렇지?”
“본론만 말하세요.”
“잠은 집에 들어와서 자. 할머니, 나, 니 형수, 여자 셋이서 무섭잖아. 아들 둘 있는거. 하난 회사에 뺏기고 하난 호텔에 뺏기고 이럴 줄 알았으면 둘쯤 더 놓을 걸 그랬어.”
“아버지는 왜 빼세요?”
“아, 맞다. 그 양반도 우리 식구지? 하도 본 지가 오래돼서.”
“쇼핑하실 때 됐나 보네요. 기운 없는 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홍콩이나 한 번 다녀오시죠.”
“쯧쯧, 인정머리 없는 놈.”
한결은 빈 컵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낫다. 가운의 끈을 당겨 묶으며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들어갈 거니까 그만 가세요. 허수아비 사장이라도 자리는 지키고 있으셔야죠.”
“네 자리를 맡아 앉아 있는 거지, 내가 뭘 알아 앉아 있니? 회사는 언제 들어올 거야?”
“안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한결은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귀국 후 식구들을 피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면 회사에 들어오랄 게 뻔했다. 그것 때문에 거의 강제로 귀국당했다. 2년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회사를 맡게 되자 한결은 갑자기 회사에 꼭 필요한 존재가 돼버렸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눌러 앉히려고 하셨지만 한결은 듣지 않았다. 무섭고 싫었다. 그 살벌하고 고독하고 치열한 전쟁터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바지를 이고 셔츠를 꺼내는데 어머니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오셨다.
“왜?”
“싫습니다.”
“넌 욕심도 없니?”
“없어요.”
“그럼 효도한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니 아버진데, 다른 사람이 다 손가락질해도 너는 이해하고 도와드려야지.”
“제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말이야?‘
한결은 바지 벨트를 잠그고 가죽 재킷을 꺼내 들고서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가 큰아버지 손 들어주신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 판을 아버지랑 형이 가로챘는데 저까지 껴들어 봐요. 뭐라고들 하겠어요. 지들끼리 다 해먹는다 안 그러겠어요?”
“네 자격이 매형만 못하겠니?”
“언제 매형까지 끌어들였어요? 약삭빠르기도 하십니다. 정말 박 터지겠네. 밥그릇 하나 놓고 떼로 덤벼봐요. 순둥이도 도사견 되기 십상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암매장당할지도 몰라요.”
“자식. 오버하긴.”
어머니를 지나쳐 거실로 나온 한결은 재킷을 입고 모자를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화장대 위에서 모자를 입고 계셨다.
“할머니와 한 약속은 펑크 냈다며?”
“사장단 모이는 시각에 맞춰 들어오라시는데, 제가 곰은 아니잖아요.”
“쯧쯧, 어머님도 참. 약은 너구리한테 너무 쉬운 수를 쓰셨어.”
“그만 가요”
“이거 받아”
어머니가 내민 건 최신 휴대폰이었다.
“추적 장치니깐 꼭 갖고 다녀.”
“그러죠. 도청만 마세요.”
한결이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는 걸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너 장가보내신대.”
“네?”
“양자택일하라셔. 회사에 들어오든가. 장가를 가든가.”
“어머님, 지금 꿈꾸십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한결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실제 상황인데? 나, 네 아버지 특명 받고 온 거야. 오늘 중으로 결정해서 보고 올려.”
“뭐 하는 짓이에요? 그 말 듣고 가만 계셨어요?”
“그럼 내가 네 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해. 난 현모양처잖니. 지아비가 하라면 하란 대로 해야지.”
“할머니도 아세요?”
“우리 막둥이 닮은 손자 보는 게 소망이셔서 쌍수 들고 환영 하신다던데?”
“말도 안 돼!”
“이 세상에 말 안 되는 일이 어디 한둘이니?”
말문이 막혀 굳은 한결을 보고 어머니는 또 까르르 웃으셨다. 한결은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혀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았다. 회사 들어오게 하려고 이젠 별수를 다.... 이런 씨이! 빠져 나갈 구멍이 안 보인다. 할머닌 차는커녕 알몸으로 쫓아낼 방도를 연구 중이셨던 거다. 회사냐, 장가냐 하며.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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