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 아냐?
엄마가 동창회에서 동옥 아줌마의 반지를 끼고 왔다. 아니끼고 왔어야 했다. 그런데 본인도 알지 못하는 어느 장소, 어느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본디 반지가 엄마에게 조금 컸다.. 그걸 한 번 껴본다는 게 그대로 끼고 나왔다는 것이다. 시할머니 부고에 급히 나간 동옥 아줌마는 경황이 없어 그랬다고 하더라도, 엄마는 어째서 나가는 동옥 아줌마를 붙들어 ‘얘, 반지가져가야지.’ 하지 못했느냔 말이다. 신우주 백화점 명품관 B브랜드 진열장 오른쪽 셋째 칸 제일 높은 곳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던 2.12캐럿 천연 다이아몬드 반지, 동옥 아줌마의 결혼 22주면 기념으로 아저씨와 함께 매장에서 직접 고른 4백만원을 호가하는 반지라는 것까지 상세히 새겨들었으면서 본인이 그걸 끼고 있다는 것.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아이고, 혈압이야! 다리에 힘이 빠진다.

“동옥 아줌마한테 사실대로 말하고.....아줌마네 부자니까....”
“안 돼! 절대 말 못해.”
“그 수 밖에 더 있어? 일단 말하고 물어드린다고, 당장에는 그 돈 없으니까 차차 드린다고 하면 되잖아. 30년 친군데 설마 야박하게 당장 물어내라고는 하지 않을 거 아냐.”
“아, 싫어! 내가, 내가 죽고 말지. 차라리 내가 콱 혀 깨물고 죽고 말지!”
“엄만 참. 이깟 일로 죽긴 왜 죽어.”
“오빠 같으면 그 말이 쉽게 나와? 나 같아도 죽었으면 죽었지 그 말은 못하겠다. ”
밥 먹고 있던 은새가 끼어들었다.
“왜 못해? 넌 말 안하고 별 뾰족한 수 있냐?”
“현금 서비스 받아야지 뭐.”
“어휴, 말이나 못하면. 밥이나 먹어라.”
“그거 생각 안나? 예전에 동옥 아줌마네 부도났을 때 엄마가 짜게 굴었던 거. 그때 동옥 아줌마 전화 오면 없다 그러라하고, 집에 찾아오면 피하고 그랬잖아. 아빠 돌아가셨을 때 아줌마들이 그러더라. 사람이 있을 때 잘해야 인심 얻는다고.”
헉! 이게 동생일까?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더니 딸이란 게 엄마 아픈 곳만 콕콕 집어 꼬집는다.
“동옥 아줌마 힘들 때 그렇게 돈 있는 유세를 떨더니.....”
“야!”
은찬이 무릎으로 후다닥 기어가 은새의 입을 막았다. 그때 누워 계시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더니 장롱 문을 벌컥 열었다. 거기서 불곰 같은 밍크코트가 출렁 흘러내려Te.
"엄마!“
“이거라도 팔아야지.”
은찬은 은새를 놓고 코트를 안고 일어서는 엄마를 붙들기 위해 다시 몸을 날렸다.
“엄마! 엄마, 진정하고 좀 앉아봐.”
“이, 이거라도 팔아야지. 네 아빠가....흑,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해주신거.....진주 목걸이. 루비반지, 갖은 패물 있는 대로 다 팔고, 겨우 하나 남은 거. 하, 하나 남은 이거라도 팔아야지. 아, 아흑......여보, 여보, 미안해요!”
“엄마.....우,울지마. 엄마....”
시장 바닥 아낙처럼 퍼질러 앉아 우는 엄마에 은새까지 합세해 통곡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걸 왜 팔아. 안 돼. 이, 이거 아빠가 생일 선물로 주신 거잖아. 아빠가 엄마 이거 입은 거 보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엄마 호강시켜 주겠다고 한 약속....흐흑, 그 약속지킨 거 같아서 좋다고, 기쁘다고 그러셨단 말이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던 은찬은 민망해졌다. 은새가 더 서럽게 울면서 아빠 얘기를 하니까 심란해 가슴이 뻐근했다. 아버지 유언이 떠올랐다. 교통사고가 나 피투성이인 채로 병원 침대에 누워 말씀하셨다. 피투성이 손으로 내 손을 잡으시고선 “찬아. 이제 네가 우리 집 가장이다. 네 엄마, 은새. 잘 부탁한다. 우리 찬이 믿어도 되지? 믿고 편안히 가도 되지?”라고 말씀하셨다.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겠노라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달려왔다. 은찬은 불곰 같은 밍크코트를 들어 장롱 안에 다시 걸어두었다. 더러워지면 드라이 값도 만만찮다.
“내가 어떻게 해볼게.”
“네가, 네가 무슨 재주로....”
“언니, 혹시 숨겨놓은 비자금 있는 거 아냐?”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년아! 네가 가방에, 구두에, 옷 산다고 빼간 돈이 얼만데!
“뭐, 좀.....”
“뭐! 정말이야? 아이 참, 그걸 왜 이제 말해! 내놓기 아까웠어? 으이고, 짠돌이. 내가 그렇지 싶었어. 괜히 눈물만 뺐네. 엄마, 오빠가 해결한대.”
“응? 정말?”
통장에 42만원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닷새 후에 반지를 찾으러 오겠다는 동옥 아줌마를 몰래 만나 사정해 볼 작정이란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두 주먹 불끈 부르쥐고서 말했다.
“엄마 조심 좀 하라고 그런 거야. 내가 그 정도 돈 없겠어? 나만 믿어. 내가 해결할게.”
춤을 잘 추지도 미소를 띠지 않는데도 한결은 돋보인다. 그에겐 좋은 스타일과 뭔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분위기가 있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킨다고 할까. 개인용 색조명을 갖고 다니는 것 같다. 비 내리는 시애틀의 겨울. 그가 즐겨 찾는 바(bar) '하이웨이‘를 가보면 그를 둘러싼 미녀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며 우울증이라도 걸린 표정으로 첼리스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지만 미녀들은 몇 시간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여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팔짱을 꼈다. 그는 웃지도 않고서 밀어냈다. 금발이건, 빨강머리건. 유주는 여자들을 헤치고 빠져나오는 한결을 보았다. 한 모금 마신 밀러라이트를 다가오는 한결에게 내밀었다. 살짝 가쁜 순을 내쉰 한결은 목울대를 움직이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네가 이런 클럽에 자주 오는 이유를 모르겠어.”
“왜, 마음에 안들어?”
다시 맥주를 시키고 자리에 앉은 한결의 몸에서 향기가 퍼졌다. 땀과 열기가 뒤섞인 향기가 유주는 싫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 만날 속셈도 아니고.”
“왜 아냐, 술도 좋아하고 작업할 속셈도 있지.”
“그래? 근데 왜.....”
“근데 왜 고주망태로 널브러지지도 않고. 위자료 뜯으려고 악악거리는 여자도 없냐고?”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래. 말해 봐. 왜 없어?”
“그건 끝난 거니까. 길바닥에서 개 되고, 여자 문제로 집안 뒤집고 나면 나한테 남는 게 뭐 있겠어. 족쇄밖에 더 차겠어? 그건 끝에 가서 해야지. 아직은 좀 더 즐길 거야. 청춘이 아깝잖아.”
“자제가 된다면 이미 청춘이 아닐지도 몰라.”
“끔찍한 소리하지마. 청춘이 아니면 중년이라는 거야?”
“왜, 겁나니?”
“늙는 거 좋은 사람도 있어? 미련한 여우 씨는 겁 안나?”
“나? 나도 가끔은......내일이 오는게 무서울 때가 있긴해. 내일이 영영 안 올지도 몰라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어. 그거 잊으려고 일하는 거 같아.”
늘씬한 미녀가 향기를 풍기며 지나갔다. 검은색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데 반해 미니스커트는 엉덩이를 겨우 가릴 만큼 짧았다. 유주는 여자가 한결을 보는 걸 느꼈다. 한결이 여자에에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넌 아직 괜찮아. 아직이 아니라 10년, 20년이 흘러도 넌 예쁠거야.”
뜻밖의 말에 유주는 수줍어졌다. 입에 발린 소리를 잘 못하는 남자인 걸 알아서기도 했고,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훗, 잘생긴 남자한테 칭찬 들으니까 좋긴하네. 귀국 환영 인사로 받을게.”
그때 한결의 친구 박도헌이 다가왔따.
“야, 여기서 뭐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다르 바람맞았다고 그러고 있잖아.”
“컴컴한 룸에서 뭐 하냐? 답답하게, 나오라고 그래.”
“너 하나 때문에 열댓 명이 움직이냐? 하여간 제멋대로인건 여전해.”
“나는 안 보이니?”
유주가 끼어들자 도헌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와, 누나였어요? 난 또 이 자식이 한 건 올린 줄 알고. 아니, 누나 왜 이렇게 이뻐진 거예요? 나는 진짜 웬 요정이 앉아 있나 했네.”
“니 오버도 여전하구나. 어쨌든 반가워. 잘 지냈지?”
“그럼요. 누난 안 들어도 알겠네요. 얼굴이 반짝반짝 윤이나요. 뭐 좋은 일 있어요?”
“집에 오니까 좋은 거지 뭐, 다들 모였으니 우리가 옮기는게 낫겠네. 한결아.”
“됐어요 누나만 오시면 돼요. 우린 이 자식보러 나온 거 아니거든요. 이 자식이 귀국을 했건, 지구를 떠나건 전혀 관심 없어요. 누나가 언제 귀국하느냐 학수고대하면서.....”
길어지는 너스레를 한결이 뚝 자르며 물었다.
“형 왔어?”
“형 이라니? 누구?”
한결은 눈으로 유주를 힐끗 가리켰다. 그걸로 도헌이 금방알아채고 말했다.
“아..... 아니.온다고 했어?”
“회의중이래서 메모 남겨놨는데. 비서가 안 전했나 보네.”
한결은 능숙하게 둘러댔지만 유주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전화를 했을 때 한성은 오겠다고도 오지 않겠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의미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할 사람은 아니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타나 당혹한 유주를 보며 비웃어 주지나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주가 짊어지고 있는 죄책감과 미련을 덜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결은 친구들과 유주가 있는 룸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뜨악해하던 친구들도 그녀의 불꽃 춤을 보더니 환장을 하고 열을 올렸다. 그녀의 친구들까지 합세해 룸은 폭발하기 직전까지 열기가 올랐다.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 유주가 핸드백을 챙겼다. 몰래 빠져나가는 유주를 보고 한결이 쫓아나갔다.
“벌써 가게?”
“응. 좀 피곤하네.”
한결은 유주가 기대했던 건 한성 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자. 데려다 줄게.”
“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돼.”
한결이 말없이 유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이 가는 게 신경이 쓰였다. 유주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여덞 살 때 열 살인 유주를 처음 만났는데. 그때도 손가락이 손목이 참 가늘었다. 그 당시 한결은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뭐냐고 물으면 우유와 피아노와 아버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데도 우유를 먹이고, 피아니스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은데도 피아노를 쳐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아버지가 제일 싫었다. 그날, 2년간 친 피아노에 우유를 부은 죄로 아버지께 매를 맞고 있었다. 때마침 들어온 손님에게 창피한 꼴을 다 들키고 방으로 쫓겨났다. 분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한결보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긴 피아노를 잘 치는 유주가 들어왔다.
“너, 내 동생 할래?”
이상한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약 발라 줄 수 있는데.”
손 안에 든 연고를 보이며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어서 동생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울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 기다리고 있어. 차 가지고 올게.”
“너 술 마셨잖아. 대리 운전 불러야지.”
“알딸딸할 때 달리는 기분도 괜찮아. 여차하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고 곱게 한강에다 처넣을 테니까 걱정 마. 죽기밖에 더하겠어? 나같이 멋진 놈이랑 죽는 것도 괜찮지 않아? 여자로서 말이야.”
“너 지금 취한 거지? 미친 거 아니지?”
“쫄긴. 괜찮아. 맥주 한 병밖에 안 마셨어.”
“그래도......그럼 저기 가서 커피 하나 사 올게.”
“나 못 믿어?”
“어머. 천하의 최한결한테 못 믿는단 말을 어떻게 해?”
“쳇.”
“나도 마시고 싶어서 그래.”
“그러든지”
한결이 주차장으로 간 사이 유주는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차를 세우고 한결이 편의점 쪽으로 가려는데 유주가 양손에 컵을 들고 막 나왔다. 그때 갑자기 유주의 앞으로 오토바이가 쌩 달려왔다.  속도도 늦추지 않고 달려와 순식간에 유주의 손목에 걸쳐져 있는 핸드백을 낚아채 가버렸다.
“아악”
유주의 비명 소리를 들은 한결은 쏜살같이 달려갔다. 컵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유주는 망연자실한 채 서 있었다.
“누나! 괜찮아?”
“아, 난....”
“어디 다친데 없어?”
한결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 유주를 부둥켜안았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스쿠터 한 대가 한결의 등 뒤로 덜덜덜 달려가TEk.
"야! 이새끼야. 거기 안 서!“
엄청난 목소리가 밤거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결은 오토바이를 쫓아가는 스쿠터에서 빛나는 글자를 읽었다.
‘야식 배달 전문’
“일단 차에 타자. 걸을 수 있겠어?”
“나, 나 괜찮아. 그냥 좀 놀라서.....”
한결이 안아 부축하자 유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내 핸드백. 그거 파리에서 산 건데....아깝다.”
“여자들이란. 그까짓 핸드백이 문제야? 내가 사줄게.”
“너 정말이지?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야?”
“혹시 머리 다친거 아냐? 엉뚱한 소릴 다 하고....”
차에 타려던 유주가 멈칫했다. 표정이 굳고 눈에 충격이 어렸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한결은 예상대로 한 남자가 서있는 걸 보았다. 한성이었다.
“이제 오는 거야?”
“가는 거냐?”
“그러던 길이었는데 잠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아까 그 오토바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그 뒤로 스쿠터, 그 뒤로 경찰차가 추격하고 있다. 돌진해 온 오토바이에서 “에이씨!” 소리와 함께 유주의 핸드백이 휙 날아왔다. 얼떨결에 한성이 핸드백을 받았고, 한결은 반사적으로 오토바이를 쫓아 달렸다.
“한결아!”
“야, 거기서!”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불끈 일어서 간만에 전력 질주를 하는데 옆으로 스쿠터가 덜덜덜 지나갔다.
“야! 씨이! 안 되겠네! 야, 새끼야!”
한결의 앞으로 나온 스쿠터의 주인이 헬멧을 벗었다. 한 손에 헬멧을 들고선 앞서가는 오토바이를 향해 홱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른 헬멧은 정확히 날치기의 등을 퍽 때렸다. 오토바이가 나동그라지고 날치기도 땅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다지 다치진 않았는지 곧 벌떡 일어나 오토바이를 세우려했다. 야식 배달 전문이 달아나려는 날치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540도 돌려차기가 작렬했따. 오, 제법인데. 한결은 자신이 날치기를 잡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숨이 찼다.
“하아. 하아.....”
아무래도 담배를 끊어야 할까 보다. 야식 배달 전문이 쓰러진 날치기의 멱살을 잡아끌어 올렸다. 둘이 실랑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결과 경찰차가 도착했을 때 현장에는 야식 배달 전문뿐이었다. 고 잠깐 사이 날치기는 오토바이를 두고 달아나 버린 것이다. 뒤이어 한성가 유주가 왔다.
“어디 다친데 없어요?”
경찰의 질문에 야식 배달 전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뼈 근처에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경찰은 잠깐 보더니 유주를 향해 물었다.
“뭐 없어진 건 없습니까?”
“네.”
“다른 피해는?”
“없어요. 조금 놀라 것밖에는.”
“오토바이 있으니까 조회하면 금방 잡을 수 있겠죠?”
한결의 물음에 경찰이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모르죠. 워낙 가짜들이 많아서. 훔친 오토바이일 수도 있고, 또 요즘에는 중국에서 불법으로 들어와 유통되는 게 많아서 등록 안 된 것도 허다해요.”
그렇다면 쫓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경찰이라고 와서는 잡을 생각은 않고 피해자 쪽 진술만 받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그래서 지금 안 잡는다는 겁니까?”
“아니. 안 잡는다는게 아니라 잡기가 힘들다는 거죠. 저런 애들은 대부분이 미성년에 무면허이기 쉽거든요.”
“정말 기가 막히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그만 해라.”
한성이 다가와 잡아끌었다. 경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야식 배달 전문은 깨진 헬멧을 머리에 쓰느라 낑낑거리고 있었다.
“ 어이. 학생.”
“네?”
경찰이 스쿠터에 오르는 야식 배달 전문을 불렀다.
“혹시 얼굴 못 봤어?”
“어두워서 잘 못 봤는데요.”
“쯧. 그래. 집에 가서 어디 아픈 곳 있으면 연락해. 포상금이라도 챙겨줄 테니까.”
“아! 참.”
유주가 핸드백을 들고 나와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아, 아니에요. 전 그냥.....”
“잠깐만.”
한결은 찌르는 듯한 눈초리로 야식 배달 전문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었다. 다 잡은 날치기를 한순간에 놓친것도 그렇고. 남의 일에 끼어들어 헬멧을 깨먹고 얼굴까지 까져선 사례금을 마다하는 것도 수상했다. 핸드백을 너무 쉽게 돌려준 것도, 범인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는 것도 걸렸다. 이거 혹시 짜고 치는 고스톱 아냐?
경찰차에서 요란한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들은 다시 음주 단속하러 가고 한성은 유주를 데리고 차로 갔다. 한결은 가려는 스쿠터를 다시 붙들었다.
“내일 이쪽으로 전화해.”
주머니를 뒤지다 겨우 발견한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사례금 톡톡히 줄 테니까.”
“아, 아니. 괜찮습니다.”
야식 배달 전문은 입바람을 후 불고서 눈썹을 세웠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달에 얼마 받아?”
“네?”
동그란 눈에 불꽃이 탁탁 튀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요것 봐라. 조그만 게 누굴 노려 봐. 한결은 한 대 딱 때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빈정거렸다.
“한 달 월급 줄 테니까 전화해. 자존심 상할 거 없잖아. 당연한 사례금 받는 건데.”
한결은 50cc 스쿠터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서 말했다.
“이런 건 어느 문방구에 가면 파냐?”
“네?”
“이런 거 수리도 해주냐? 수리비든 뭐든 계산해 줄 테니까. 내일 연락해.”
한결은 종이를 내밀었다. 절대 받을 것 같지 않은 표정에서 손이 나왔다. 나오는 손을 보고서 한결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상대도 두 눈을 부릅뜨고서 같이 힘을 주더니 홱 잡아채 갔다. 한결은 덜덜거리며 멀어져 가는 스쿠터를 보며 조롱하듯 씩 웃었다. 그럼 그렇지. 네까짓 게 별수 있어. 어디 맛 좀 봐라. 요놈아. 내가 두 놈 다 잡고 말 테니까.
은찬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반창고를 붙였다.
“어우. 재수없는 놈!”
겨우 아르바이트를 얻었는데 하루 만에 잘리고 말았다. 배달이 늦어 손님은 화가 났고 헬멧은 금이 갔으며 가게까지 잘 간 스쿠터는 사장님의 호통 소리에 때맞춰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게 다 그 놈 때문이다. 은새를 쫓아다니는 까마귀 나라 양아치.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빼겠다 싶었더니 겁도 없이 대로에서 날치기를 한 것이다. 웬 놈이 여자 핸드백을 낚아채는 걸 본 순간 욱해서 때려잡았는데, 잡고 보니 이놈이 글쎄 은새의 양아치인 것이다. 근 순간 아는 얼굴이라 놀라기도 했지만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은새한테 차이고 자장면 값까지 물었는데 경찰서까지 붙잡혀 가면 인생 참 우중충해지는거 아닌가. 게다가 고3이라는데, 한 해 꿇고 복학한 거 보면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졸업하겠단 각오일 텐데....
“그래도 그 자식은 한 번 잡아서 혼쭐을 내줘야 해.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고 뭐 하는 짓이냐고, 쳇. 못난 놈. 졸아가지고 금방 돌려주기는.”
머리카락으로 땜통을 가리다 지쳐 모자를 꾹 눌러썼다. 모자 밑으로 거울을 휙 째려보는데 재수 없는 얼굴이 또 하나 떠올랐다.
“뭘 봐. 싸가지야. 뺀질뺀질하게 생겨가지고 사람 무시하고 말이야. 뭐. 문방구에서 파냐고? 왕재수. 세상에 너같이 밥맛없는 놈은 처음 본다. 정말.”
됐거든 하고 비웃으며 유유히 돌아설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고맙단 인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남자의 전화번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엄마의 밍크코트가 떠오른걸 감사해야 할지. 저주해야 할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은찬은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꺼냈다. 집에 돌아와 알게 된 거지만 종이는 사진이었다. 남자가 갈겨쓴 전화번호의 뒷면에 웬 여자가 웃고 있었다. 예쁘고 청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애인인가? 애인 사진을 아무렇게나 막 뿌리고, 정말 어지간히 정신없는 인간이네. 한 달 월급. 그 말만 안 했어요 내가 정말 안 받는 건데. 씨이. 돈이 웬수다. 근데 도대체 한 달 월급을 얼마라고 생각하고 준다는 거지? 은찬은 심호흡을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음악이 멈추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What?]
거친 숨소리다.
“여보세요?”
[누구야!]
이번에는 꺼끌꺼끌하고 쉰, 괴물 같은 목소리다.
“저, 저기....”
[잘못 걸었어.]
“네?”
재수 없는 놈이 그대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은찬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전화기만 쳐다보았다.
“에이씨! 뭐 이런 개떡 같은 인간이 다 있어! 쯧!”
짜증은 본인에게 더 났다. 누구냐고 물으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데데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짜증나는 건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하는 이 상황이다. 은찬은 마음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음악을 끊고 대뜸나온 목소리가 귓구멍을 긁듯이 말했다.
[또 너면 죽는다.]
전화 받는 매너하고는. 은찬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사례금 받을 사람이거든요.”
[뭘 받아?]
“사례금이요.”
뻔뻔해야 한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얼굴에 철판 깔고, 치사하고 더럽단 생각 말고, 뻔뻔하게 나가자.
[아....]
드디어 생각나는 모양이군.
[스쿠터.]
“네.”
[받겠다고?]
이 아저씨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씨이!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사진이. 그 전화번호 적어주신 종이가 사진이거든요. 돌려드려야 할 것도 같고....”
어우! 정말 아니꼽고 더러워서 내 안 받고 말았으면 딱 좋겠지만.
“가, 가게에서 잘려서.....헬멧도 깨지고. 아, 스쿠터도 완전 망가지다시피 됐거든요.”
[아....머리야.]
“네?”
[아냐. 계속해 봐.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데?]
“4백이오. 그리고 지금 좀 이상하게 돼버린 것 같은데요. 제가 달라고 말씀드렸던 게 아니라 주신다고.... 안 주셔도 그만이지만. 어쨌든 제가 아르바이트에서 잘렸거든요. 그쪽에서 먼저 한 달치 월급 어쩌고 한거니까 말씀에 책임을....”
[책임?]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전화하라고 했잖습니까?”
비굴할 것 없다. 이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니까. 라고 생각 할 수가 없다. 아, 동옥 아줌마의 반지만 아니면 ‘야, 이 왕재수야! 내가 돈 받으려고 그런 줄 알아! 에라, 싸가지 없는 놈! 잘먹고 잘 살아라!’ 하고 당장 끊어버리고 말 텐데.
[난 또 정말 전화할 줄은 몰랐지.]
“네?”
[그럼. 이리로와]
“거기가 어딘데요?”
가면 정말 주긴 할 건지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기대아 절망 속에 은찬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동이호텔 S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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