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드럽고 따뜻하게, 카페라테
그림이 있는 넓은 실내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개성을 살린 고급스런 정장을 입고 손에는 잔을 들고 얘기를 하거나 그림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은찬은 한쪽 어깨가 드러나는 초콜릿색 드레스를 끌며 한성의 뒤를 따라다녔다. 낙낙하게 퍼지는 드레스 자락이 다리를 휘감았다. 감촉이 바닷물처럼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 얇고 부드러우며 몸에 쫙붙는 옷을 입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좁고 높은 구두 때문에 걸음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옷이 몸가짐을 제한하고 지배하는 게 맞나 보다. 자신이 정말 우아하고 섹시한 여자가 된 것 같다.

 은찬은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속눈썹을 붙이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 이상으로 당황하고 놀랐으며 감탄했다. 변신 전후를 비교해 본다면 왕자와 거지 정도일 것이다. 그야말로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궁전에 온 것이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먹을 거 앞에서는 은찬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홀 한쪽 벽에 마련된 음식을 본 순간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한성을 내팽개쳐 두고 그 앞에 서서 입이 미어져라 먹어대싿.

" 여기 있었군."

 은찬은 대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입 안에도 음식이 가득 들었을 뿐만 아니라 양손에도 카나페와 안초비를 얹은 빵이 각각 들려져 있었다. 한성은 번들거리는 입술이 우물거리는 걸 보고 미간을 모았다. 은찬은 멋쩍은 웃음을 짓다 손에 들고 있는 걸 하나 권했다.

" 아니."

 한성은 고개를 젓고는 물 잔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입구로 들어오는 한 쌍의 남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 좀 있다 먹어."

 음식 쪽으로 팔을 뻗던 은찬의 손목이 홱 끌어당겨졌다. 쩝쩝 씹으며 야속한 눈빛을 한성에게 보냈다.

" 아무 말도 하지 마. 목소린 금방 탄로 날 수 있으니까. 자, 웃어."

 은찬은 끌려가면서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 아, 자넨가? 오랜만이군."

 한성은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한번 자신이 당당히 선 모습을 한 의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부질없는 오기라고 해도 좋고 유치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다. 이걸 해야 마무리가 될 것 같으니까.

" 제약을 맡았다고? 잘하고 있단 얘기는 들었네. 젊은 패기가 무섭다로 다들 벌벌 떨더군."
"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 내가 도울 게 뭐가 있겠나. 오히려 내가 도움을 좀 받아야지."

 관록이 높은 의원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옆에 선 유주의 어머니만이 혈색이 굳어 있을 뿐이었다. 한성이 고개를 끄덕여 정중히 인사를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 여보, 저기 유주……."
" 어, 그래. 그럼 다음에 술이나 한잔하세."
" 네, 의원님."

 한성은 인사를 하고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등으로 유주의 시선을 느끼며 은찬을 에스코트해 입구 쪽으로 걸었다. 그때 은찬이 막 입구로 들어오는 한결을 발견했다.

" 헉!"

 휙 몸을 돌린 은찬은 이번에는 유주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드러난 어깨에 한성의 손이 닿았다.

" 가만있어."

 그리고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은찬은 등에 닿는 한성의 손길을 느끼며 그를 힐끗 보았다. 왠지 이 남자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쪽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데…….

" 형이 올 줄은 몰랐는데?"
" 재단 일인데 와봐야지."

 은찬은 불안과 기대, 공포와 스릴감이 뒤섞인 기괴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알아봐 줬으면 하는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떨림이 전해졌는지 등에 닿은 남자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 이쪽은?"

 한결이 쳐다보는 시선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눈이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 나야, 나' 라는 신호를 보내버릴 것 같았다.

" 친구."

 한성의 간단한 대답에 한결이 미간을 찡그렸다.

" 뭐야, 그 얼렁뚱땅한 대답은. 숨겨둔 여자란 얘기야?"
" 말 조심해."
" 아, 실례. 이해하십시오.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라. 최한결입니다."

 한결이 손을 내밀었다. 은찬은 여성스럽지 못한 크고 거친 손을 내밀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여자가 나타났다. 은찬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시합 때에도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왔어? 오빠도 왔어요?"
" 이야, 눈부신데 한유주. 확 낚아채 가고 싶어지네."

 한결의 말을 들은 순간 은찬은 머리로 열기가 팍 솟구치는 걸 느꼈다. 갑자기 기분이 말할 수 없이 나빠지면서 심술이 났다. 눈동자만 재빨리 쓱 돌려 여자를 보았다. 가슴골이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정말로 우아해 보였다. 지주 목걸이를 늘어트리고 머리는 높게 틀어 올렸다. 전에 봤을 때모다 키도 커 보이고 마른 줄만 알았던 몸매의 볼륨감도 살아났다. 은찬이 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워서 홱 도망가고 싶어졌다. 기분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 파티가 성황이네. 축하해, 한유주."
" 고마워."

 한결의 인사에 유주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은찬의 가슴에 와 박혔다. 은찬은 집에 돌아가 저 미소를 연습해 보리라 다짐했다.

" 드가 같은 소녀풍 취향인 줄 알았더니 칠레 현대 미술? 의외야."

 한결이 그림들을 보며 말했다.

" 지난번에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산티아고미술관에도 갔거든. 그 여행이 많이 도움 됐어."
" 거 봐. 몇 번을 말하지만 당신 유학은 최선의 선택이었다니까. 근데 댄스 타임 같은 거 없어? 블루스 한 곡 추고 싶은데."

 그러면서 한결이 여자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 얘가 왜 이래."

 여자는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친숙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을 본 은찬은 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후 불어 날렸다. 그 순간 한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은찬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한결의 눈이 의심으로 번득였다. 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날카로운 눈빛이 파고 들어왔다. 도망가야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은찬은 굳어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눈치를 챈 한성이 얼른 말했다.

" 자, 우린 그만 실례……."
" 잠깐."

 한결이 제지하며 다가왔다. 은찬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그만 높은 굽에 익숙지 않은 발목이 삐끗했다.

" 아!"

 비틀하자 손이 뻗어왔다. 양쪽에서 두 남자가 각각 팔을 붙들어 잡아주었다. 은찬은 굳은 얼굴을 한 채 한결을 보았다. 그때 다른 팔을 붙든 한성이 말했다.

" 괜찮아?"

 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쪽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홱 몸을 돌려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한성이 다가와 안아 올린 것이다. 졸지에 남자의 품에 안긴 은찬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한성의 머리 뒤로 유주의 표정이 드러났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 가만있어."
"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 쉿."

 무거워서 한성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은찬은 창피하고 화가 나서 한성의 귓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 빨리 내려줘요."
" 다 왔어."

 은찬은 쳐다보고 있는 한결과 유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결이 따라올 것 같아서 겁이 더럭 났다.



한성은 뒤뜰 벤치에 은찬을 내려놓았다. 여자치고는 워낙 체격이 좋은 은찬이라 이마에 땀이 삐질 솟았다.

"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내 다리는 멀쩡했다고요!"

 은찬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안에서의 긴장과 불안이 폭발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한결이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이 머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속에서 불이 확확 일었다.

" 여기 날 데려온 이유가 뭔지 알겠어요! 그 여자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죠! 내 말이 맞죠!"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를 보고 은찬은 벌떡 일어났다. 자갈에 구두 굽이 박혀 또 비틀거렸다.

" 에이씨이!"

 은찬은 구두를 벗어 양손에 쥐고 평소대로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다 돌아보고 분이 안 풀린 기세로 말했다.

" 구두랑 옷."

 머리에 쓴 치렁치렁한 가발을 홱 잡아당겼다.

" 그리고 이 가발은 내일 그 가게에 갖다 줄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 이 봐."

 남자가 다가와 팔을 잡았다. 은찬은 거칠게 뿌리치면서 씩씩댔다.

" 쓰레기 같은 자식!"

 남자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며 무서운 표정이 됐다.

" 뭐라고?"
"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고 그랬다 이 나쁜 놈아! 사람을 어떻게 이따위로 취급할 수가 있어! 네가 그렇게 잘났어!"
" 말을 함부로 하는군."
" 말 좀 함부로 하면 어때! 사람을 함부로 하는 것보다 백배 낫지."

 둘은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은찬은 못마땅하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뭘 보여주고 싶어서 이런 쇼까지 해요? 유치하단 생각 안 들어요? 확 까발리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요? 내가 정말 울 사장만 없었으면……. 어우, 고은찬 성질 많이 죽었다. 후!"

 은찬은 다시 입바람을 불어 마음을 진정을 시킨 후 말했다.

" 아무리 사랑이 유치한 거라고 해도 이러면 안 되죠. 사람 이용해서 상처주면 돼요? 난 뭐가 되냐고요. 봐달라고 했을 댄 이쪽은 절실하니까 그런 거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이용해 먹어요? 정말 생각할수록 화나네. 에이씨!"

 휙 몸을 돌려 가려는데 다시 남자가 붙잡았다.

" 기다려. 데려다 줄게."
" 됐어요! 이걸로 끝이죠? 됐죠!"
" 그 꼴로 어딜 간다는 거야!"

 남자가 소리쳤다. 지 마음도 편치 않겠지. 여자의 그 표정을 보면 둘 사이에 뭔가가 분명히 있어. 정말 삼각관계 아냐? 사장도 그 여자 좋아하는 것 같던데…….

" 에이씨! 알 게 뭐야! 나랑 아무 상관없어!"
" 거기 서, 고은찬!"

 한성이 부르는 소리에 휙 돌아본 은찬은 문득 느껴지는 또 다른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여자가 나와 서 있는 것이다. 아니, 소리도 없이 언제!

" 헉!"

 은찬은 숨을 들이쉬었다. 놀란 유주의 시선이 은찬의 머리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그제야 은찬은 자신이 가발을 벗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은찬은 생각할 것도 없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다가온 한성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는 맨발로 정원을 내달렸다.

 빌어먹을!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어디까지 들은 거야, 젠장! 이제 한두 사람씩 알아가고 있다. 이런 씨이! 일이 점점 커지네!



 우유 배달을 하고 아침을 꼭 챙겨 먹고 출근을 한 은찬은 여태껏 자고 있는 하림을 내려다보았다. 가게 한쪽에는 난 화분 하나가 깨친 채 쓰러져 있었다. 밤에 화장실 가다가 찼는지 화분의 한쪽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은찬은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림을 확 깨워 혼을 내려고 입을 열었다가 입구 쪽을 보게 됐다. 유리문에 걸린 빨란 리스. 은찬은 리스와 깨진 화분을 함께 치웠다. 조용히 하림을 깨우고 묵묵히 청소를 했다.

 6시 30분 정각에 한결이 왔다. 은찬은 주방에 숨어 바쁜 척했다. 한결은 입구에 테이크아웃도 가능하다는 푯말을 내걸고 바깥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은찬은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볼 때마다 여자랑 같이 있던 한결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짜증이 났다. 어제 미술관에서 그가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 짜증이 더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를 보니까 더 화가 나고 심통이 솟구쳤다. 그러면서 또 실망감이 들었다. 자신이 봐도 꽤 괜찮았던 그 모습을 그는 누군지도 모르고 벌써 까맣게 잊은 것이다. 의심의 질문이라도 했다면 어쩌면 금방 실토를 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4월에 접어들어 날씨가 한결 따뜻해졌다.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던 한결이 홍 사장을 불렀다. 메뉴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 그렇게 일일이 어떻게……."
" 차별화된 서비스가 필요해요. 어떤 사람은 커피 슈가로 커피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을 거고, 어떤 사람은 성미가 급해서 빨리 녹는 시럽을 원하잖아요. 휘핑크림이냐 스팀 우유냐, 계핏가루냐 코코아 가루냐. 이렇게 기호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자기만을 위한 커피니까 더 대접받는 느낌이 들 거고. 안 그래요?"
" 그걸 다 하자면 시간이 엄청 걸려요. 또 주문받을 때 헛갈리기도 할 거고. 바빠서 잘못 내주게 되면 두 배로 더뎌져요."
" 그래서 주문서를 만들까 합니다. 아무래도 홍 사장님이 주방을 맡고 계시니까 저보다 더 자세한 항목을 만드실 수 있잖아요."
" 그렇게 하면 좋지만……. 그러면 재료도 더 많이 구비해 놔야 하고, 그렇잖아도 지난달에 엄청 적자를 봤을 텐데……."
"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홍 사장과 얘기하면서도 한결은 가게 앞을 쓸고 있는 은찬을 의식하고 있었다. 빗질이 기운차다 못해 아예 땅을 다 파헤칠 것 같았다.

" 어이, 차력."

 갑작스런 부름에 은찬은 깜짝 놀랐다. 은찬이 뜨끔해 쳐다보자 한결이 손짓으로 불렀다. 은찬은 불만에 심술이 섞인 표정으로 다가갔다. 은찬의 표정을 본 그가 인상을 썼다. 잔소리를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은찬은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주고 경직된 자세로 뻣뻣하게 쳐다봤다.

" 어머니는 좀 괜찮으시냐?"
" 네."

 은찬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짧게 대꾸했다.

" 너 혹시 땡땡이치려고 거짓말한 거 아냐?"
" 제가 앱니까? 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은찬의 퉁명한 말투에 한결이 미간을 찡그렸다.

" 학교를 다니긴 했냐?"
" 왜 또 시비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아침부터……."

 아차! 3초를 못 버티고 은찬은 성질을 드러내고 말았다. 은찬은 혀를 깨물었다.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이 인간은 사장이고, 난 종업원이다. 그뿐이다. 딴생각은 말자. 그 여자도 생각 말고, 둘이 무슨 관계인지도 생각하지 말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거다.

" 사장님 말씀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이 자식 오늘 왜 이래? 너 오늘 아침 못 먹었어?"
" 먹었습니다."
" 반찬이 부실했냐?"
" 아닙니다."
" 시장에 커피 배달했어?"
" 아뇨. 여기 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 몸이 몇 개나 되는 줄 아십니까?"
" 워낙 괴물 같은 놈이라 다 하고 왔는지 알았지. 우유 배달은?"
" 했죠."

 은찬은 지극히 반항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다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는 한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말씀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 생선 가게는 프림 몇이야?"
" 네?"

 갑작스런 질문 공격에 은찬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 두, 둘이오. 설탕도 둘."
" 반찬 가게는?"
" 거기 아줌만 블랙이에요."
" 야채 가게는?"
" 프림 하나, 설탕 둘. 아저씬 설탕만 둘. 근데 왜요?"
" 됐다. 일해."

 그러고 나서 한결은 홍 사장을 쳐다봤다. 홍사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봐서 은찬은 입으로만 왜요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버렸다.

" 뭐야? 사람을 무시하고 있어, 씨이."

 삐죽거리며 빗질을 하는데 자각했다. 실패다. 사장으로만 대할 수가 없다. 사람으로만 대할 수도 없다. 아, 난 어떻게 돼버린 걸까!

 은찬이 자괴감에 빠져 있는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지하철을 타고 온 직장인들이었다. 은찬은 잽싸게 표정을 바꾸고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 커피프린스 테이크아웃 합니다! 드시러 오십시오!"

 휙 보던 아가씨 둘이 생글 웃더니 가게로 들어왔다. 은찬은 꾸벅 인사를 하며 손님을 안으로 모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두 명씩 몰려오더니 급기야 30분도 안 돼 가게 안이 꽉 차버렸다.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홍 사장이 바빠져 한결까지 주방으로 투입됐고, 손재주가 거의 없는 은찬은 선기와 함께 주문과 계산을 맡았다. 낙균과 하림은 손님을 안내하고 물을 서비스하고 간단히 얘기도 나눴다. 하림은 익살맞게 굴었고 낙균은 점잖고 친절하게 대했다. 손님들이 웃고 즐거워했다. 기다리는 손님들은 비치해 둔 신문과 책도 보고 컴퓨터 앞에도 앉아 있었다.

 2시간 동안 앉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일했지만 은찬은 시간 가는 줄도,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최근 들어 이렇게 바쁘고 활기찬 적이 없었다. 마음이 척척 맞아서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손님을 치러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듯 손님들이 나간 뒤 일동은 공황 상태로 침묵에 빠졌다. 그 순간 하림이 펄쩍 뛰며 외쳤다.

" 야호!"

 그제야 실감이 났다. 너무 좋아서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처음이라 서툰 점도 있었지만 서로 잘했다고 칭찬했다.

" 와, 여자들 화장품 냄새가 장난 아니네. 난 아까 막 어질어질하더라니까."
"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과장은."
" 참 사장님, 아까 여기 중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파마머리 여자 보셨어요?"
" 라떼 4개 포장?"
" 네. 그 여자가 사장님 나이가 몇이냐고 묻던데요?"

 은찬이 날카롭게 하림과 한결을 째려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림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 사장님이 우리 중에 인기가 젤 많은 거 같아요. 아무래도 여기 여자들이 나이가 좀 있어서 그런가 봐. 어쨌든 좋으시겠어요?"
" 허리에 지방 흡입 수술하고 앞머리 이식 좀 하면 괜찮겠더라."
" 예? 와, 진짜 예리하다. 거기서 그걸 다 보셨어요? 역시 선수는 틀리다니까."
" 담에 와서 내 나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
" 장사 망칠 일 있어요?"

 은찬은 한결의 대답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렇게 나무랐다. 싸가지 없는 게 그럴 땐 괜찮단 말이야.

" 근데 미니 정원 옆에 테이블은 완전 악몽이었어. 안 그렇냐?"

 하림이 낙균을 보자 낙균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 EOD 부르고 싶더라."
" 뭐? 뭘 불러?"

 은찬이 되묻자 주방에서 한결이 말했다.

" 폭발물 처리반."
" 폭발물……. 야, 권낙균. 너도 은근히 밝히는구나. 몰랐네."
" 이 나이 때 안 밝히면 언제 밝히겠어요. 인도 속담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 미녀는 이 세상의 것이고 추녀는 그대만의 것이다.' 공유할 수 있을 때 공유해야죠."

 하여간 사내놈들이란, 쯧쯧.

" 아, 배고프다."

 은찬은 하품을 하며 말하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오늘 테이크아웃 개시한 기념으로 제가 쏠게요."
" 정말요?"
"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냐?"
" 샌드위치 만들어드릴게요. 얘들아, 잠깐만 기다려. 이 엉아가 고은찬표 특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마."
" 야, 네가 직접?"
" 그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 그냥 편의점에 가서 삼각 김밥이나 사 오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찬은 기어이 샌드위치 재료를 사와 주방에 부려놓았다. 내 손으로 뭘 해먹이고 싶은 애정이 마구 넘치는데 어쩌랴. 여자의 본능이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참치 샌드위치가 한창 진행 중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은찬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 네, 맛있는 커피프린스입니다."

 순간 각자 흩어져 뭔가를 하고 있던 직원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부 도깨비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은찬을 보았다. 다들 왜 이래? 은찬은 영문을 모른 채 하림을 보며 다시 말했다.

" 여보세요?"

 이상하게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근데 또 아무도 받을 생각을 안 했다.

" 전화 안 받아?"
" 차, 찬아……."

 홍 사장 아저씨를 돌아보려는데 그가 소리쳤다.

" 움직이지 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찬이 답답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 찍소리도 말고 가만있어!"

 한결이 소리치며 그것조차 못하게 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은찬은 긴장된 분위기에 자신을 보는 눈초리들이 예사롭지 않아서 가슴이 뛰었다. 같이 동화돼서 긴장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반응들이 심상찮아서 이상하고 불안했다. 같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까 더 불안하고 조바심이 났다.

" 얼굴 돌리지 말고……."

 사장이 가만가만 다가오더니 갑자기 손에 든 전화기를 홱 낚아채 갔다.

 순간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 어후!"
" 야……. 고은찬 이 자식……."
" 내가 진짜 저 형 때문에 못 산다니까!"

 홍 사장은 맥을 놓고 의자에 쓰러지고, 하림은 소리 지르며 화내고, 낙균은 미치겠다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의 무반응한 선기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이 생겼던 게 틀림없다. 그것도 자신과 관계된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 이 자식!"

 딱!

" 아야!"

 은찬은 한결에서 뒤통수를 맞고 억울해 소리를 질렀다.

" 아, 왜 때려요!"
" 너 이리 나와."
" 그래. 고은찬 너, 주방 출입 금지다. 어차피 컵이나 깨고 별 도움 안 되니까 아예 얼씬하지도 마."
" 아이 참, 왜……."

 그 때 한결이 눈앞에 시퍼런 식칼을 들이댔다.

" 이게 전화기냐, 자식아! 넌 전화도 받지 마! 알았어!"

 한결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은찬은 그제야 도마 위에 있넌 식칼을 귀에 대고 ' 여보세요.' 라고 한 걸 알았다.

" 아! 모, 몰랐어요."
" 치매냐!"
" 아, 진짜. 왜 그랬지? 나 때문에 다들 놀랐구나? 쏘리, 쏘리."
" 으이고, 이걸 그냥……."
" 고흐처럼 귀라도 자르게?"

 하림이 놀려대자 그제야 살벌했던 분위기가 좀 나아졌다. 홍 사장은 유난히 놀라 사색이 되었던 한결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장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옆에서 헤헤거리는 은찬의 눈빛도…….

" 사장님, 수명 단축됐어요? 어쩌나? 안 그래도 늙었는데 이제 사십대 됐겠다."

 아침의 짜증이랑 화는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본디 화가 오래 가는 편도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사장의 표정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 저리 안 꺼져?"
" 꺼지긴 어떻게 꺼져요. 제가 촛불인가요?"
" 이걸 그냥 확……."

 그때 유리문을 열고 웬 중년 부인이 들어섰다.

" 어서 오십시오."

 맨 먼저 본 선기가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돌아본 하림이 짧게 외쳤다.

" 어, 엄마!"

 모두 놀란 가운데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가게 구석 테이블에 모자가 마주 앉았다. 은찬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페라떼를 대접했다. 응어리진 게 있으면 카페라떼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풀기를 바랐다.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 광일이한테 들었다."
" 그 자식은 말하지 말라니까……."
"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잠은 어디서 잔 거야?"
" 그냥 여기저기……."
" 돈도 없으면서, 너 노숙한 거니?"
" 아, 아냐. 여기서 잤어. 가게에서……."

 순간 구석에 모여 엿듣고 있던 눈들이 일제히 커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한결이 은찬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은찬은 그의 매서운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하게도 사장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챈다.

 참 신기하네. 혹시 내가 미리 켕기는 표정을 짓나?

" 그러니 몸이 성할 리 있어? 얼굴이 그게 뭐야? 정말 속상해서……."
" 잘 먹고 잘 자는데 뭐. 걱정 안 해도 돼."
" 하나뿐인 자식이 집을 나갔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하림아, 그러지 말고 엄마랑 들어가자. 응? 아버지도 너 많이 걱정하셔."
" 싫어."
" 하림아."
" 지금 들어가 봤자 어차피 반복이야. 엄마도 알잖아. 아버지 나가라고 소리나 치실 게 뻔해."
" 그럼 이대로 계속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은찬은 처음으로 하림의 진지하고 우울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림이 가출한 줄 몰랐던 직원들은 속았단 표정으로 은찬을 째려보았다. 낮은 목소리로 낙균이 물어왔다.

" 왜 가출한 거예요?"
" 진학 문제."
" 아아."

 하림의 어머니가 울며 사정하셨다. 하림은 나름대로 어머니를 달래긴 했지만 고집을 굽힐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컴퓨터를 하고 있던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어 하림의 테이블로 갔다. 숨죽여 지켜보던 이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찬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한결의 등을 보았다.

 아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 진하림."

 하림이 부스스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 너 당장 짐 싸서 나가."
" 예?"

 은찬은 놀라서 후닥닥 뛰어가 한결을 말리려 했다.

" 사장님, 잠깐만요."
하지만 한결은 단호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은찬을 밀어냈다. 그리고 다시 하림을 보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버지랑 타협 보고 와. 그 전에는 내 가게에 발 못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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