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자라서 행복해요.
은새는 요즘 하루 일과처럼 가게에 들렀다. 학원에 가는 길이라며 꼬박꼬박 찾아와 공짜 커피를 마시고 간다. 마시는 동안 별 얘기도, 하는 것도 없으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간다.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정말 도움이 안 된다.

 홍 사장 아저씨와 선기가 가고 은찬은 퇴근 준비를 했다. 포장마차로 갈 참이다. 낙균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만 맡겨두는 게 불안하셔서 한사코 나와 계신다. 그러니 늦어서 낙균이 혼자 준비하고 있으면 괜스레 미안해지는 것이다.

 후닥닥 옷을 갈아입으려던 은찬은 그만 셔츠 단추에 머리카락이 걸리고 말았다.

" 아야!"

 엉킨 머리를 푸느라 낑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 거기 누구야!"

 은찬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문 잠그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 아, 난 또 누구라고……."

 문을 열고 들어선 하림의 시선이 은찬의 러닝셔츠에 닿았다. 러닝셔츠 안에 압박붕대를 하고 있지만 볼록한 곡선은 완전히 눌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 혀, 형……."

 게다가 목의 쇄골이라든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곡선 같은 것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었다.

" 이, 이거 좀……."

 은찬은 셔츠 단추에 엉킨 머리를 내밀었다. 엉거주춤 다가온 하림은 어디다 손을 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머리카락을 잡았다. 머릿속이 하얀 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림이 셔츠를 들고 뒤로 물러나자마자 은찬은 자신의 옷을 얼른 껴입었다.

" 노, 노크도 없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면 어떡해."
" 혀, 형…… 혹시 말이야……."
" 너 말하면 죽어."

 은찬은 점퍼를 입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 혀, 형 그러면 정말……."

 어째서 하림이야! 고르고 골라 하필이면 입이 젤 싼 놈한테 들킬 게 뭐냐고!

" 으, 으, 으아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하림이 소리를 질러댔다. 뒤를 돌아본 은찬은 발광하며 뛰어다니는 하림을 노려보았다.

"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말도 안 돼! 으악!"
" 야."
" 고은찬이, 고은찬이 여자라고? 여, 여자야? 여자였어? 으악!"

 하림은 의자를 찼다가 벽에 머리를 박다가 별 원맨쇼를 다 하고 있었다.

" 야!"

 보다 못한 은찬이 뛰어가 하림을 붙들었다. 그러자 하림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다.

" 거, 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 이게 정말……."

 화를 내려던 은찬은 마음을 고쳐먹고 사정했다.

" 하림아, 부탁하자. 절대,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응? 알겠지?"
" 왜, 왜 속였어? 여기 알바하려고?"
"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 그럼 서서 오줌 싼 건?"

 하림의 눈이 새삼스레 은찬을 아래 위로 꼼꼼히 훑어 내렸다. 특히 가슴 부위에 머문 시선에 은찬은 참지 못하고 하림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버렸다. 하림은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은찬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래서 유니폼도 한 치수 큰 거 입었지? 힙합 패션이니 뭐니 그러더니, 쯧쯧. 이제야 알겠네. 나는 사람이 워낙 작아서 그것도 땅콩만 하겠거니 했지. 통 표가 안나더란 말이야."

 으, 참자, 참어. 이 말 많은 녀석의 입을 봉하려면 참아야 한다. 선기면 얼마나 좋았을까.

" 아, 정말 적응 안 된다. 타이레놀 먹어야지."

 주방 쪽으로 움직이는 하림을 보는데 시계가 11시를 가리켰다.

" 너 정말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너 말하면, 나도 너 여기서 자는 거 다 불어버릴 거야. 알겠어?"
" 근데 왜 형, 아니 누, 누나 동생은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다 짠 거야?"
" 걘 원래 그래."
" 하긴 헛갈리게도 생겼어. 가슴이 거의……. 혹시 중성 아냐?"
" 그래,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난 간다."
" 어, 어디 가! 나 이대로 두고 가면 쇼크사 할지도 몰라. 벌써 심장이 벌렁거린다고. 정서에 혼란이 와서 돌아버릴 것 같아."
" 차라리 돌아라."
" 내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 좀 기다려 봐. 아니 어떻게 준비를 할 수가 있겠어?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나 말고 또 누가 아는데? 아무도 몰라?"
" 홍 사장 아저씨. 너 정말 아무한테도, 특히 사장한테 말하면 죽어."
" 지금 내 심장이 내 심장이 아니야. 아, 어지럽다."

 장난치듯 제 잠자리로 쓰러지는 하림을 보고 은찬은 분을 꾹 눌러 참았다. 하림은 어느새 충격에서 헤어나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철없는 녀석은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다.

 은찬은 진정이 될 때까지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조르는 하림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게를 나왔다.

" 미친놈. 어후, 내 팔자야. 어쩌다 저 녀석한테 걸려서……."

 투덜거리며 나오는데 가게 입구로 웬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가게 앞에 주차하려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빼줘야 된단 말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 어!"
" 벌써 문 닫은 건가?"
" 아, 안녕하세요?"

 뽁뽁이 남자였다. 오늘은 어째 일진이 안 좋은가 보다. 정체를 아는 남자들이랑 자꾸 부딪치니 말이다.

" 사장님은 퇴근하셨는데요."

 여자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 왠지 그 여자가 지난번 오픈식 대 온, 양아치가 낚아챈 핸드백의 주인, 바로 그 여자라는 직감이 들었다. 직감이 발동하는 걸 보면 자신도 영락없이 여자인 것 같다. 사장은 밝은 표정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쏜살같이 나갔다. 그걸 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농땡이 치는 사장이 못마땅했기 때문이겠지.

" 한결이가 아니라 아가씨 만나러 왔어."
" 저, 저요?"
" 타지. 퇴근하는 길인 것 같은데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 아, 아니……."

 은찬은 거절하려다 늦었단 생각과 차비라도 아끼잔 생각에 얼른 제의를 받아들였다.

" 그럼 저 가는 데까지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 그러지. 타."

 근래 들어 고급 승용차에 자꾸 타게 된다. 은찬은 널찍한 차 내부에 감탄하며 한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소음도 없는 차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조용히 달렸다. 운전하는 걸 보면 사람의 성품이 나온다는데, 이 남잔 참 점잖고 정확하면서도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다. 깔끔한 양복이 참 잘 어울려 보인다. 금빛 커프스단추랑 넥타이핀까지, 어디 한군데 빈틈이 없어 보인다.

 살펴보던 은찬은 좀 주눅이 드는 걸 느끼며 물었다.

" 근데 하실 말씀이 뭐예요?"
" 지난번에 한 번 봐달라고 했지?"

 아앗! 치사하게 뭘 요구할 모양이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또 돈도 많아 보이구먼. 씨이, 벼룩의 간을 내먹지.

"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 그게 뭔데요?"

 은찬은 퉁명스럽게 물으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 하루, 아니 오후랑 저녁 시간만 비워줘."
" 네? 뭐 하게요? 설마 가정부 같은 거 아니죠? 저 아무것도 못해요."

 은찬은 열심히 고개를 흔들며 설명했다.

" 제가 성별만 여자지, 여자들이 하는 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밥도 못하고 설거지도 못하고 빨래도 못해요. 청소도 제가 하면 다 부수고 막 그렇거든요. 보셨잖아요. 다숲에서 이틀 만에 잘린 거. 오죽하면 그렇겠어요."
"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냥 나랑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면 돼."
" 데, 데이트?"

 은찬은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니까 남자는 어이없게도 싱긋 웃으며 즐거워했다. 차가 도로가에 있는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 엄청 놀라는 거 보니까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봤나 보지?"
" 그, 그게 아니라…… 취,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여기 세워 주세요."

 남자는 다시 쿡쿡 웃더니 차를 세우며 말했다.

" 모레 오후 3시에 데리러 올게."
" 아, 아니! 절대로 데리러 오지 마세요. 사장이 보면 큰일 나요."
" 그럼 전화번호를 받아야겠군."

 남자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 저, 정말 꼭 이러셔야 겠어요?"

 은찬은 다소 의심에 찬 눈빛으로 한성을 쳐다봤다.

 사장이 형이라고 불렀던가? 차도 좋고 스타일도 괜찮고. 나쁜 사람 같진 않지만,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 그럼 이걸로 다, 다시 딴소리하시기 없기에요?"

 은찬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이 전화번호를 찍었다. 남자가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호감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남자 표정이 그랬다. 그냥 일로 얘기하는 사람처럼 건조해 보였다.

" 근데 정말 데이트예요?"
" 그럼 가짜 데이트도 있나?"

 남잔 고개를 까닥하더니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했다. 차에서 내린 은찬은 이래저래 복잡하고 혼란스런 기분으로 낙균의 포장마차로 갔다. 동시에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 아저씨. 누구 마음대로 다시 장사를 해!"

 차를 출발시키려던 한성이 멈추고 깡패들을 보았다. 은찬은 놀라 후닥닥 달려갔다. 낙균의 아버지 허리를 삐끗게 한 놈들이었다.

" 야! 가! 깐 데 가서 처먹어! 쓰으! 이 새끼들, 안 꺼져!"
" 씨바, 사람 말을 왜 안 들어!"

 깡패들은 욕설을 일삼으며 손님을 내쫓고 있었다.

" 자릿세를 내든지. 아니면 우리 구역에서 장사 못한다고 했잖아, 이 양반아!"

 일동은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기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 니들 뭐야! 이 개새끼들!"

 낙균이 소리쳤다. 은찬은 무섭게 노려보며 달려들 기세인 낙균을 보고 생각했다. 태권도 사범 못해도 할 수 없겠다.

" 아버님, 낙균이 좀 잡으세요!"

 은찬은 공중을 날아 이단 옆차기를 현란하게 선보였다. 가볍게 뛰며 뒤돌아 휘둘려차기.

" 이야앗!"

 이런 날을 위해 태권도를 배운 건지도 모른다. 세상의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건 폭력에 맞서는 폭력일 뿐이다. 그래서 은찬은 제대로 짧게 급소만 공격해서 이 씁쓸한 싸움을 빨리 끝내려 한다.

" 대체 무슨 일이야!"

 한성이 달려왔다. 은찬은 옆에 와 있는 한성을 보고 소리쳤다.

" 오지 마세요! 다쳐요!"
" 야, 내가 그래도 남잔데……. 너나 뒤에 가 있어."

 갑자기 한성이 은찬의 앞을 휙 막아섰다. 은찬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등판에 깜짝 놀랐다. 한성은 재킷을 벗어 은찬에게 휙 던졌다.

" 여자는 그거나 들고 있는 거야."

 은찬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재킷을 받아 들었다.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얼떨떨했다. 누가 자신을 대신해서 뭘 해준 적이 있던가.

 한성이 제법 주먹질을 하는 걸 보고 은찬은 오호, 감탄을 했다. 하지만 곧 밀리고 있는 낙균을 보고 도우러 뛰어갔다.

" 낙균아, 너 비켜!"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 뭐야!"

 어, 어! 저 인간은?

" 이 개새끼들, 뭐야?"

 은찬은 갑작스레 뛰어든 한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얼굴을 맞고서 나가떨어지는 한결이 보였다. 아, 아니 도대체 뭐야, 저 아저씨!

" 사장님!"

 낙균이 뛰어가 사장을 부축했다. 더 분기탱천한 한결은 낙균을 뿌리치고 다시 난동을 부렸다.

" 이 새끼들 오늘 다 죽었어!"

 대체 왜 온 거냐고요, 젠장!

 은찬은 서둘러서 마무리를 하고 싶어졌다.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중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다. 놈들은 도망을 가고 난장판 속에서 은찬이 망연자실한 채 서 있었다. 한결은 놈들을 쫓아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 아버님, 괜찮으세요?"

 경찰이 온 걸 한성이 상대했다. 은찬은 침착하게 경찰을 다루고 있는 한성을 보았다. 왠지 든든했다.

" 낙균아, 아버님 모시고 들어가. 여긴 내가 치울게."

 낙균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멍한 표정으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넋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공사판에 나갈 수 있겠네요. 차라리 잘됐어……."

 낙균은 포장마차 일이 마땅찮았나 보다. 낙균이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간 뒤 한결이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어디까지 쫓아갔다 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식기와 부러진 의자와 탁자를 치우던 은찬은 손을 멈추고 한결을 보았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은찬은 굴러다니는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다가갔다.

" 그러게 뭐 하러 와서……."

 피를 닦으려는 순간 한결이 픽 주저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린 모양이다. 은찬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결의 턱을 잡아 올렸다.

" 으, 술 냄새. 술 마시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먹이 다 헛방이지."

 그러자 그가 은찬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 물이나 줘."

 그러더니 손등으로 피를 쓱 닦아버렸다. 터프한 척하긴. 한숨을 쉬며 일어난 은찬은 땅에 떨어진 컵에 물을 부었다. 평소 같으면 세균 있다고 손도 안 댈 게 뻔한데 덥석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타긴 엄청 탔나 보다.

" 괜찮아요?"
" 그 새끼들 뭐야?"
" 여기 조폭인가 봐요."
" 왜 지랄들인 거야?"
" 자릿세 내놓으라고요."
" 새끼들…… 가만 안 둬."

 경찰을 보내고 한성이 다가왔다. 은찬은 한쪽에 둔 그의 재킷을 찾아와 건넸다.

" 괜찮으세요?"
" 바벨 든 효과를 보긴 하는군."
" 아, 여기 좀 긁히셨다. 소독해야겠어요."

 은찬은 고마운 마음이 들어 상냥한 태도로 말했다. 휴지에 물을 묻혀 한성의 손등을 닦아주었다.

" 형이 여긴 웬일이야?"

 화난 한결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한결은 몹시 성난 표정으로 한성의 손을 잡고 있는 은찬의 팔을 덥석 잡아뗐다.

" 아!"

 순간 은찬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성을 불쾌하게 보던 한결이 은찬을 보았다. 아파하는 은찬을 보고 은찬의 셔츠 소매를 단번에 걷어 올렸다. 팔에 검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떤 놈이 내려친 각목에 맞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한성이 다가와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 괜찮아? 멍이 심하게 들었는데……."
" 괜찮아요."

 한성이 상처 부위에 손을 대려 하자 한결이 은찬의 어깨는 홱 잡아끌었다.

" 병원 가자."
" 예에? 이런 걸로 무슨 병원을…… 파스 붙이면 돼요."

 은찬은 잡아끄는 한결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돼서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데다 거친 숨소리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너무 꽉 붙잡고 있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내 차로 가. 데려다 줄게."
" 됐어. 택시 타고 가면 돼."

 한결은 한성을 무시하듯 버려두고 은찬을 잡아끌었다. 뒤에 남은 한성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한결을 봤지만 한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은찬은 뒤돌아보며 가까스로 말했다.

" 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아, 이것 좀 놓고 가지……."
" 앞만 보고 걸어, 자식아."
" 왜 나한테 성질을 내고 그래요?"
" 저 형은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포장마차까지 접수한대? 저 형까지 홀렸냐? 사내자식이 꼬리가 아흔아홉 개야."
"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예요?"
" 몰라, 새끼야!"
" 아, 왜 소리는 지르고……. 정말 성질 이상하시네. 암튼 연구 대상이에요, 사장님은."
" 그래, 나도 날 모르겠다. 빌어먹을."

 한결은 끝내 은찬을 억지로 끌고 병원에 갔다. 근처의 병원이라도 괜찮은데 좀 멀리 있는 동이한방센터까지 갔다. 매우 경미한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은찬은 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간단히 파스만 뿌려도 되는 정도인데 전자빔 같은 걸 쬐고 냄새가 지독한 연고까지 발라야 했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그가 다리를 좀 절뚝거린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부어 있을 줄은 몰랐다. 멍든 팔을 치료하는 내내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심한지 정말 몰랐다. 터진 입술이 아니라 부은 발목을 내보인 그는 무덤덤했다. 침을 맞고 피를 뽑고 찜질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은찬도 그의 옆에서 내내 지켜보았다. 왠지 아버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부러진 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으로 뛰셨던…….



" 어, 형! 놔둬, 내가 할게."

 벤자민 화분을 내놓으려는데 하림이 와 말렸다.

" 남자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해야지. 내가 더 잘하니까."

 또 하림이다. 홍 사장이 웬일이냐며 쳐다봤다. 조마조마해 미치겠다.

" 어허, 못은 내가 박는다니까."

 그리고 귀에다 징그럽게 속삭인다.

" 이런 건 남자가 해야지."

 이런 걸 팔자가 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모 CF의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 어? 쟤 낙균이 아냐?"

 입구로 낙균이 들어오고 있었다. 놀라서 쳐다보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 저 왔어요."
" 웬일이야? 다시 출근하는 거야?"
" 네."
" 정말?"

 은찬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낙균을 따라가려 했다. 근데 입구에서 하림에게 제지당했다.

" 여기까지. 더 이상은 안 돼."
" 야."

은찬은 눈을 부라리며 하림을 밀어내려 했다.

" 이보세요, 누님. 그동안 구경한 걸로 충분하잖아."
" 야, 누가……."

 은찬은 귀까지 빨개졌다. 사실 옷을 갈아입는 걸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자친 척하기 위해서 그들과 섞여 있었던 것이다. 훔쳐보려거나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단 말이다.

" 뭐 볼 것도 없더구먼. 특히 진하림, 너. 제일……."

 은찬은 영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하림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 뭐! 씨이! 다 불어버린다!"
" 야!"

 은찬은 하림의 입을 막으려다 나오는 낙균을 보고 헤실 웃어보였다.

"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예요?"
" 아, 아니 너랑 얘기 좀 하려고."

 은찬은 낙균을 붙들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어떻게 됐어? 공사판에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 사장님이 포장마차를 고쳐주셨어요."
" 정말이야? 그 삐딱이가 웬일이지? 그래서 다시 포장마차 하려고? 그 자식들은 어떡하고?"
" 그 자식들 다 잡았어요."

 은찬이 놀라서 눈이 똥그래지자 낙균이 키득 웃었다.

" 형 그런 표정 지을 때 완전 여자 같은 거 알아요?"
" 뭐, 뭐야?"

 은찬은 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 그, 그날 나 싸우는 거 못 봤어? 내가 울 사장보다 백배 나았잖아."
" 맞아요. 형 진짜 날더라."

 낙균이 이렇게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됐다.

" 이 세상에 빽으로 안 되는 게 없잖아요. 어떻게 줄을 썼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 자식들이 다 자수했대요."
" 제 발로?"
" 네. 나도 참 어이가 없어서 안 믿었는데, 정말로 그랬대요. 고소 안 하는 조건으로 당분간 그놈들이 아버지 포장마차 도울거예요."
" 우와!"
" 가게에 다시 나오기로 했어요. 등록금 모아서 담 학기에 복학하려고요."
" 그건 정말 생각 잘했다. 근데 사장이 너……."
" 사내자식들이 일 안하고 왜 여기서 노닥거려?"

 귀신같이 한결이 등장했다. 어젠 바쁘다면서 가게에 나오지 않았던 한결이다. 발목이 더 부어서 못 나오나 했더니 정말 바빴던 것 같다. 깡패들 자수시키느라…….

 " 안녕하세요?"

 낙균이 일어서 인사를 하자 한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갔다. 오호, 나오기로 얘기가 다 됐나 보다. 가차없이 자를 땐 언제고…….

 한결을 뒤따라 들어간 은찬은 얼른 커피를 준비했다. 자신의 지정석에 앉은 한결에게로 커피를 날랐다.

" 발목은 좀 괜찮아요?"
" 괜찮아."
" 제 팔 어떤지는 안 물어보세요?"
" ……."

 은찬은 소매를 걷어 누렇게 변한 멍을 보이며 말했다.

" 거의 다 나았어요. 그 불빛 같은 게 효과가 있나 봐요. 뜨끈뜨끈한 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모른 척하면서도 힐끗 멍 자국을 보는 한결을 보고 은찬은 씩 웃었다. 쟁반을 들고 옆에 선 은찬은 상냥한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 사장님."
" 왜?"
" 오늘 조퇴를 좀 하려고요."

 신문을 보며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한결이 눈을 들고 쳐다봤다.

" 세, 세시… 아니 두시 반에……."
" 여기가 학교냐? 조퇴 같은 게 어디 있어."

 은찬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자 그가 물었다.

" 어디 아파?"
" 아뇨. 아, 그게…… 네."
" 어디가?"
" 아니 사실은 엄마가요. 엄마가 몸살이 나셨는지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뼈마디가 막 쑤시고, 토, 토할 것 같다고……. 은새를 학원에도 가야 되고 해서……."
" 내일부터 6시 반이다. 1분이라도 늦으면 죽어."
" 예? 아, 그럼요!"

 은찬은 활짝 웃다가 고개를 살짝 숙여 한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사장님, 땡큐베리감사."

 찡그리고 쳐다보는 한결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한성이 도착했을 때 헐렁한 청바지에 회색 점퍼를 입은 아가씨는 통화 중이었다. 차를 대자 손을 흔들더니 웃음소리를 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 안녕하세요?"

 여자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 아, 동네 아줌마요. 괜찮다니까요? 웬일이십니까? 울 엄마 걱정까지 다 해주고. 사장님, 다 늦게 철나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던데……."

 그러자 전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확 잘라버린다.]
" 뭘 잘라요? 머리?"

 남자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최한결 같다. 저쪽에서 뭐라는지 여자가 킬킬 웃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결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한성은 좀 의외였다. 최한결이 누구랑 이렇게 편하게 통화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아, 죄송합니다."

 한성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통화를 끝낸 여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 우리 사장님이에요. 엄마가 편찮으시다고 거짓말했더니 병원에 모시고 가라는 거예요. 자기가 전화해 놓는다고 그러는데, 그거 진짜 오버 아니에요? 자기가 전화하면 의사가 다 대기하고 있고 그러나? 쳇. 그것도 다 제가 조퇴한 게 못마땅해서 그러는 거예요. 어머니가 빨리 나아야지 네가 다시 조퇴한단 말을 안 할 거 아니냐 그러더라고요. 진짜 왕싸가지……."

 뱉어놓고 너무 지나쳤다 싶었는지 여자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 지난번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암튼 고마웠습니다. 손은 괜찮으세요?"
" 한결이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아가씬 괜찮았어?"
" 원래 그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하잖아요."
" 글쎄, 그런 놈이었나……."
"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 가보면 알아."

 은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성을 쳐다봤다.

" 왜?"
" 설마 애인인 척해 달라 그런 건 아니죠?"

 한성은 놀랐지만 그리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 애인까진 아니야.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돼."

 갑자기 은찬이 차창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한성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한성에게도 당황스런 일이었다.

" 아우! 아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척하면 척이에요. 어떻게 나만 보면 다들…… 이참에 애인 대행 서비스 센터 같은 거나 차릴까 보네."
" 누가 또……."

 한성은 금세 눈치를 챘다. 두 달 전쯤 한결이 미소년 같은 애를 데리고 다닌다는 해괴한 소문을 얼핏 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문득 헛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포장마차에서 한결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말이다. 혹시 여잔 줄 눈치 채고선 모른 척하고 있는 건가?

" 경험이 있으니 잘하겠군. 한결이랑은 꽤 친해졌나 보지?"
" 친하긴요. 매일 싸우고 소리 지르고. 아무튼 요즘 우리 최사장이랑 나랑은 엄청 깨지고 있어요. 영 궁합이 안 맞나 봐요. 아, 그런 사주 말고요. 사람의 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게 안 맞는 것 같아요. 근데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친형제는 아니죠?"
" 사촌."
" 그렇구나. 저, 그럼 그때 온 여자 분은……."

 한성이 대답하지 않자 은찬이 알아서 대답했다.

" 치, 친구구나. 그렇죠? 삼각관계 그런 건 아니죠?"

 은찬은 혼자서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다 머쓱해서 곧 웃음을 멈추고는 입을 다물었다.

 은찬이 한동안 조용하게 있으니 한성은 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다숲에서 만난 이후에도 이 여자가 가끔 생각나곤 했다. 아마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 탓이었던가 보다. 그날 유주를 만나고 마음이 무지 답답했다. 술로 풀어보려 했지만 속이 쓰리고 자존심만 상할 뿐이었다. 근데 그때 잠깐 이 여자와 대화하고 기분이 한결 풀린 걸 알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뽁뽁이를 터트리며 웃는 자신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 장사는 좀 돼?"
" 아뇨. 사실은 완전 죽 쑤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걱정이에요. 우리 사장이 장난 아니게 투자했거든요."

 한성은 한결이 할머니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한결이 잘 해내서 제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만약 할머니의 의도대로 한결이 경영에 재능을 보이고 맛을 알게 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 내일부터 테이크아웃을 하기로 했으니까 좀 나아질 거예요. 우리 사장이 다른 건 몰라도 센스는 좀 있는 것 같거든요. 절대 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 한결인 아직 몰라?"
" 네? 아, 네."
" 확실해?"
" 그럼요. 알면 가만있겠어요? 벌써 잘랐지."
" 언제까지 숨길 순 없을 텐데?"
" 후우, 저도 모르겠어요. 어떨 땐 확 말해 버릴까 싶기도 한데, 그럴 때마다 꼭 사장이랑 싸우게 되고. 그냥 사장이 눈치채 줬으면 싶다가도, 들킬까 조마조마하고.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해요."
" 그렇게 둔한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군."
" 대부분 사람들도 거의 눈치 못 채는데요 뭐. 아마 아저씨가 다숲에서 안 만났으면 몰랐을 걸요. 근데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애인이면 무슨 씨라든가, 오빠라든가, 자기, 으! 닭살이다."

 한성은 웃음이 피식 났다. 혼자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얘기하다가도 부르르 떠는 은찬의 행동이 재미있었다. 과연 개구쟁이 소년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결이 헛갈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 근데 밥은 언제 먹어요?"
" 배고파?"
" 아, 아니 뭐 그냥…… 네."
" 시간이 없는데……."

 한성이 시계를 보자 은찬은 얼른 괜찮다고 했다. 한성은 그러려니 생각하고 뷰티숍 주차장에 차를 넣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내린 한성은 뷰티숍 한쪽에 마련된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디자이너가 은찬을 데리고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은찬이 쫓겨나는 강아지 눈빛을 하고 말했다.

" 저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일을 펼쳐놓은 한성은 한동안 일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잡생각이 떠올랐다. 타인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고 냉정한 게 이 집안의 핏줄이다. 그런데 한결이 일개 종업원의 어머니 건강까지 챙기다니 정말 의외다. 게다가, 결코 예의 바르지 않고 오히려 건방지다고 할 정도로 막말을 일삼는 데도 한결이 상대를 하고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뭐라고 했더라? 다 늦게 철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직원이 사장한테 그런 말을 하는 데도 참고 있다니, 그것도 천하의 최한결이. 재미있군.

 파티에 가면 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성은 다시 서류를 들었지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막 머리 손질과 화장을 끝내고 드레스 룸으로 끌려간 고은찬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성은 일을 접고 드레스를 고르는 데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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