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숙취에는 레몬 커피
“머리카락도 가늘고, 수염도 없고, 목 이렇게 해봐”
은찬은 깜짝 놀라 사장을 보았다. 제지할 새도 없이 턱이 잡혀 휙 올려졌다.
“아담스 애플도 없고.”
“그, 그게 뭔데요?”
“너, 진짜 남자 맞아?”
은찬은 3cm 쯤 입을 벌린 채 땡땡 얼어서 그를 보았다.
“자식. 또 덤비려고 하네. 왜. 한판 뜨고 싶냐? 뜨더라도 밥이나 먹고 뜨자.”
나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은찬은 숨도 못 쉬고 있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를 보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대로 가버릴까 싶었다. 이러다 심장병에 걸려 죽을지도모른다. 역시 거짓말은 신상에 좋지 않은 거다. 토끼자.
“야, 늑장 부리지 말고 빨리 좀 와.”
S11호의 문을 붙들고 그가 소리쳤다. 아씨이. 시간당 5가 발목을 잡네. 안으로 들어서자 쾌적한 훈기가 은찬을 맞았다. S11호는 언제든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좀 궁금해졌다. 여기가 이 사람 집일까?
“씻어.”
“예?”
“안 씻을 거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밥 먹을래?”
“괜찮아요. 좀 있으면 자연적으로 말라요.”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서랍장을 열면서 투덜거렸다.
“애가 웬만큼 작아야지. 자, 이거 입어.”
“아, 됐어요. 내가 사장님 걸 왜 입어요?”
“잔소리 말고 빨리 씻고 와.”
검정색 셔츠와 카키색 바지, 그리고 포장도 안 뜯은 속옷이 날아왔다. 절대 남자 속옷 같은 건 입을 생각이 없지만 화장실은 써야 할 것 같다. 소변이 급했다. 하는 수없이 옷을 받아 들고 욕실로 간 은찬은 문을 꼭 잠그고 얼른 소변을 봤다. 보면서 둘러보니 욕실이 여간 좋은게 아니다. 집의 욕실은 으슬으슬 추운 데다 더운 물도 잘 안 나오고 바닥은 냉골이어서 씻기가 고역이었다. 몇 년가 살면서 단련이 됐다곤 해도 이렇게 따뜻하고 아늑한 욕실을 두고 그냥 가기는 좀 아쉬웠다. 다시 문이 잠긴 걸 확인한 은찬은 과감히 샤워에 도전했다.
“이게 뭐야? 샴푸가 뭐 이렇게 많아?”
은찬은 욕조 주변에 즐비하게 놓여 있는 통들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죄다 꼬부랑 글자여서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샴푸 하나 알아본 게 다였다. 그 이외 필요한 것도 없으니 알아본들 뭐 하겠는가.
“으, 좋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친 은찬은 제 키만 한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대충 털고서 자신의 옷을 들었다. 그런데 젖어 있어서 입기가 불편했따. 그나마 속옷은 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은찬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은찬은 셔츠의 소매와 바짓단을 걷고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바지허리가 딱 맞는 게 짜증났다. 자신의 허리랑 같은 사이즈라니. 남자 허리가 28인치라니! 밥맛이야, 정말
“다 씻었냐?”
이건 스테이크 냄새다.
“이 바지 고등학교 때 입었던 거죠?”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때 걸 아직까지 입어?”
“그럼 작아서 못 입는 거예요?”
“인마, 갖고 싶으면 그냥 갖고 싶다 그래. 사내자식이 바지하나 가지고 빙빙 말 돌리긴. 어차피 너 입었던거 안 입을 거니까 가져가.”
“어디 가요?”
“손 씻으러”
“나 먼저 먹어요?”
“못 먹게 하면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리라면....”
“나 새디스트 아니니까 먹어.”
은차은 신이 나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엄청나게 새하얀 식탁 위에 비싸고 맛있어 보이는음식이 잔뜩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먹을 거니까.
“음. 죽인다 송아지 고긴가? 진짜 연하네.”
마늘 향이 감도는 볶음 면을 후루룩후루룩 먹고 있을 때 그가 앉았다. 와인을 잔을 따르면서 쯧쯧 혀를 찼다.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따로 없겠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은찬은 행복하게 웃으며 쩝쩝 소리 내 맛있게 먹었다. 그가 따라준 와인도 벌컥벌컥 비우면서 말이다.
“너 또 취해서 대들면 죽는다”
은찬은 고기를 입 안 한가득 넣어 씹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사람에거 어찌 대들겠는가.
“이거 어디서 가져오는 거예요? 호텔에서 객실 손님한테 그냥 주는 거예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게 다 돈이지.”
엄청 비쌀 게 분명하다. 좀 아껴 먹어야겠다.
“여기 호텔에 있는 이태리 식당이야. ‘마이 엑스 와이프스 시크리트 레시피’라고 들어봤어?”
은찬은 아삭거리는 신선한 샐러드를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방장이 이탈리아 사람인데, 사장이 이탈리아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반해서 아예 데려왔데. 프렌치 이탈리안풍인데. 꽤 맛있지? 아마 니 입이 황공무지할 것이다.”
“근데 아까 이름이 무슨 와이프요? 너무 길어서 못 들었어요.”
“내 전처의 비밀 요리법”
“그게 식당 이름이에요?”
“아마 해석하면 그렇게 될걸.”
“아마? 에이, 사장님도 잘 모르는구나. 사장님도 영어 잘 못하죠? 미국 유학 가서 침묵 수행했죠?”
“밥이나 먹어라.”
스테이크 소스에 빵을 찍어 먹고, 달고 아삭한 사과 위에 올려진 무스를 입가심을 해치웠다. 근데 좀 이상했다. 먹으면 보통 때는 기운이 펄펄 났는데 지금은 점점 더 나른해졌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너무 편하고 좋아졌다. 은찬은 빈 잔을 내밀었다. 아직 식사 중인 그가 와인을 따라 주었다.
“자세하고는, 똑바로 안자서 먹어.”
은찬은 의자 위에 다리 하나를 마저 올려 아예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다 먹었는데요 뭐.”
“표정이 어째 그러냐?”
“어떤데요?”
“고사상에 올라 있는 돼지 머리 같다.”
“말 참 밉게 하시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사장님이 좋다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아마 돈 복 쫓아다니는 걸 거예요. 그렇죠? 근데 사장님은 결혼이 싫어요? 선보러 나온 아가씨들 보니까 다들 쓸만하더만, 아! 혹시 어디 짱박아 둔 여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는 넌 말 참 예쁘게 하다. 짱박아 둔 여자가 뭐냐? 여자가 물건이냐? 짱박아 두게.?”
은찬은 와인이 달아서 쪽쪽 소리를 내며 마셔댔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알딸딸해졌다. 더 나른해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그때 그 여자도 괜찮았는데. 좀 시끄럽긴 해도.”
“어떤 여잔지 몰라도 여잔 다 시끄러워.”
“아, 알았다. 여성 혐오증이구나. 맞죠?”
“그게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고 지껄여?”
“알죠. 여자 실허하는 거잖아요.”
“여잘 왜 싫어해? 30초마다 섹스 생각하면서 여잘 싫어하면 어떻게 처리해?”
은찬은 그만 사례에 걸리고 말았다. 컥컥거리니까 코로 와인이 튀어나왔다. 그가 냅킨을 던져주며 말했다. 민망한 주제인지라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와 키스했던 때의 감촉이 상기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도 모르게 그이 입술에 시서니 가려해서 눈을 이리저리 빙빙 돌렸다.
“하긴 남자한테 처리하는 방법도 있지.”
갈수록 태산이다.
“왜 겁나냐?”
“겁은 무슨....”
은찬은 자신도 모르게 경직돼 콧방귀를 시원찮게 뀌고 말았다. 정말 턱도 없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뻥뀌고 말았다. 정말 턱도 없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뻥 뀌었어야 하는데.
“표정은 겁났는데 뭘. 야, 나도 구역질 나서 가글을 세 번 이나 했으니까 더 이상 언급도 하지마.”
“내가 입이라도 벙긋했나요? 자기가 계속 얘기하고선”
“생각해 보니까 우습다.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겪어.”
“누가 할 소릴.”
“게이 친구 놈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놈 머릿속은 온통 섹스생각 뿐이거든. 너도 지금 한창때니까 치마만 두르면 눈이 뒤집히겠다. 응? 인생 선배로서 얘기하는데 고 나이 때 몸조심 해야 되는 거야. 아랫도리 아무렇게나 굴리다간 인생 종친다고. 그런 명에선 그놈이 편할지도 모르지. 아니, 정말 그렇겠네. 임신 걱정 없으니까 책임 질 일도 없고.”
“에, 에이즈 걸리잖아요.”
“참 고리타분한 소리 하고 있네. 너21세기 놈 맞아? 게이라고 다 에이즈 걸려?? 얘야, 콘돔은 풍선 놀이 하라고 만든 게 아니거든.”
그때 갑자기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꿰뚫어 보듯 쳐다봤다. 은찬은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새삼 단줄이 호텔방에 있다는게 상기돼 심장이 벌렁거렸다. 겉으로 남자처럼 보여도 은찬도 속은 평범한 여자였다.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남자랑 같이 있으니 두근거리는게 당연한 거였다. 가슴이 뛰고 긴장이 돼 말이 떨려 나왔다.
“왜, 왜그렇게 봐요?”
“너 콘돔....아니다. 설마 그 나이에 안 써봤을라고. 응?”
“애, 애기 싫어해요?”
맥박 속도의 위험을 느낀 은찬은 얼른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결혼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넌 네가 한사람의 인생을 20년 가까지 보살피면서 바른길로 잘 이끌어 갈수 있을 것 같아?”
갑작스럽게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은찬은 말문이 막혔다
“그, 그렇게 거창하게 물으니까 할 말이....”
“때때로, 아니, 아주 자주,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지는게 인생이야. 나이 사십되고 오십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거 같아? 세상 더러운 때에 머리는 찌들고 몸은 늙고 지쳐서, 결국에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될 지경이 되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거라고.”
그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다.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눈에 눈에 잡혔다. 입가에 별로 묻지도 않고 깔끔하게 빨려 들어가는 와인과. 잔을 잡은 손가락,와인을 삼킬 때 오목하게 들어가는 와인과 잔을 잡은 손가락 와인을 삼킬 때 오목하게 들어가는 볼. 45도 각도로 내리뜬 시선. 은찬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생긴 나자란 걸 다시 한 번 이정해야겠다. 잘생긴 남자한테 끌리는 건 암컷의 본능일 것이다. 별달리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해 봐. 자기도 잘못하고 실수하고 후회하면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는 거 자격이 있어?”
“부모도 인간이니깐 실수하는 거야 당연하죠.”
“자식에게 하면?”
“에이.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잘못하신 것보다 내가 부모님한테 잘못한 게 더 많은데요. 뭐.어렸을 땐 상처받기도 하지만 자라면서 이해하게 되잖아요. 어른이 돼보면 어른이 완벽한 건 아니라는 거 알게 되니까.”
“상처로 끝나면 다행이지. 원해서건 원치 않아서건 한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 가난해서일 수도 있고, 아파서일 수도 있고, 니 아버지처럼 갑자기 사고를 당할 수도 잇고.”
“우리 아버지요?”
은찬은 술이 확 깼다.
“지금 우리 아버지가 내 인생 망쳤단, 지금 그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망쳤다고 하지 않았어. 망칠 수도 있다고 했지!”
“그 얘기가 그 얘기 잖아요.”
“소리 지르지마, 인마.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란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와. 정말 삐딱한 인간이네.”
“안 되겠다. 너 고만 마셔.”
“일찍 돌아가신 게 우리 아버지 잘못이에요? 그리고 우리 아버진요. 베란다에서 장난치다가 떨어진 날 받았다고요. 아시겠어요? 당신 팔이 부러졌는데도 아픈 것도 모르시고, 놀라서는 저를 안고 병원으로 뛰셨다고요. 그때 아버지가 저를 안받으셨으면 전 지금 이세상에 없어요. 그게 부모인 거예요. 자식에게라면 무조건 무한정 주는 게 부모예요.”
은찬은 술기운에 아버지 생각까지 곁들여 코끝이 찡했다. 근데 그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조롱하듯 말했다.
“베란다에서 장난치며 위험하단 건 애가 모르지. 어른은 알면서도 부주의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런위험도 겪지 않았잖아. 신생아가 태어나면서 왜 그렇게 자지러지게 우는지 알아? 태어난 걸 저주하는 거야. ‘니들 맘대로 태어나게 해놓고 헤죽거리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절규하는 거야. 사람이 신과 가장 맞닿아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아는 거지. 이 세상이 지옥이랑 별반 다를 게 없다는거 .”
“아예 모노드라마를 찍으시지 그래요? 쯧쯧. 어쩌다 사람이 그렇게 삐뚤어졌어요? 자라면서 누군한테 크게 상처받은 일있어요?”
“내가 그런 일이 어디 있어. 인마. 이날 이때껏 부족한 거 없이 자랐는데.”
“쳇. 그럼 여태 얘기가 다 공염불이었단 거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버호를 확인한 그는 전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있어요. 네, 여기가 펺요.”
은찬은 와인 잔을 들고 식당을 나와 거실을 어슬렁거렸다. 화려한 장식장이며 벽안에 있는 수족관, 봄 풍경의 그림, 커다란 화병과 컬러.......
“마음대로 하시라고 해요. 아버지가 언제 내 허락받고 하셨어요?”
[막내야.]
“할아버지가 나한테 물려주신 거에요. 왜 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게 해요! 계좌 막기만 하세요. 땅이고 채권이고 다 팔아 버릴 거니까.
[잠만. 응?]
“잠남 잘 거 집에서 왜 자꾸 들어오라는 거예요? 아버지도 나 보기 싫어 하시잖아요.”
[억지 부릴래? 아버지도 너 걱정하셔.]
“잘도 걱정하시겠네요.”
[할머니 더 기다리시게 하면 너 정말 나쁜 손자야.]
“휴유, 정말”
[오늘까지만 거기서 자. 이 엄마가 잘 둘러댈 테니까. 알았지 아들?]
“들어가도 잠만 잘 거에요. 딴소리 하지 마세요.”
[역시 우리 아들은 착해]
“끊습니다.”
전화를 침대 위로 내던진 한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집에 들어가면 사사건건 형과 아버지한테 부딪칠 것이고, 말씀은 안하셔도 이제라도 회사에 들어와 줬으면 하는 할머니의 착한 눈을 견뎌야 하고, 잘난 장관댁 딸이라 눈이 너무 높은 형수 눈치까지 봐야 한다. 도무지 그 집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젠장 독립을 하든지 해야지”
한결은 중얼거리며 거실을 지나쳐 식당으로 걸어갔다.
“야 늦었다. 그만 마시고....”
식당은 비어 있었다. 거실로 다시 나온 한결은 소파에 누워 있는 은찬을 발견했다.
“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야, 야!”
어깨를 흔들며 부르자 그제야 눈을 부스스 떴다.
“나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자고 가면 안 돼요?”
“그러게 작작 좀 마시라니까”
“2시간만 잘게요”
“야, 니 집에 가서 자. 빨리 일어나”
“야박하게 왜 그래요. 딱 2시간만 잘게요”
한결은 몸을 웅크리고 잠에 빠져드는 은찬이 어이가 없었다.
“아주 제멋대로구먼.”
“2시간 뒤에 깨워주셔야 돼요. 꼭...”
“야, 여기서 자면 숙박비가 얼만지 알아? 반은 네가 내야 된다?”
“우유 배달도 가야 하고....커피도 팔아야 돼요..”
“야....”
“야채 가게는 프림하나, 설탕 둘. 생선 가게는 프림둘, 설탕둘. 반찬 가게는 블랙. 신발 가게는...”
한결은 중얼거리다 잠든 은찬을 내려다보았다. 1분도 안돼서 곤한 숨소리가 쌕쌕 들려왔다.
“완전 곯아 떨어졌네.”
몸을 돌리다가 한결은 진주빛 탁자 위에 한 장씩 펼쳐놓은 전단지를 보았다. 집어치우라고 했더니 기어이 말려서 다시 돌릴 작정인가 보다.
“바보 등신인지. 순박한건지...그게 그거지 뭐”
한결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쌔근쌔근 자는 녀석이 귀엽게 보였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불을 꼭꼭 여며주는데 왠지 마음이 쓰여서 애처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사내자식이 살결은 뽀 얘가지고는. 솜털 봐라. 솜털. 어떻게 수염이 안나고....아무래도 발육 부진이다. 못 먹고 자라서 그래. 그러니까 걸신 들린 듯이 먹어대지. 뒤에 크는 놈들이 있긴 있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내자식 피부가.... 손이 절로 뺨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피부에 닿을 찰나 한결은 뜨끔해서 얼른 손을 위로 올렸다. 얼떨껼에 머리를 만지게 됐다. 그때도 그랬지만 감촉이 참.....또 전율이 전해져 왔다 화들짝 놀란 한결은 손가락으로 은찬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이래도 꿈쩍도 안 하네. 으이그. 잠탱이”
아니에요. 저에요. 제가 F4예요. 하림이. 낙균이. 선기 그리고 저란 말이에요. 사장님이 아니라...어! 지금 뭐 하는 거에요? 남의 옷을 왜 벗기려는 거예요? 아, 씨이! 저 F4맞다니 까요. 이, 이거 놔요. 이거놔!
“놔! 이씨!”
경칩 개구리처럼 팔딱 일어난 은찬은 부스스 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 아! 우유”
후닥닥 몸을 일으킨 은차은 탁자에 무릎을 찧고, 의자를 쓰러뜨렸다 세우며 거실을 휘젓고 다녔다.
“내옷! 내 양말! 아이씨!”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지만 옷걸이에 걸려 있는 점퍼만 겨우 찾아냈다.
“2시간 있다 깨워달라니까 정말!”
“야”
은찬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깨, 깼어요? 깨우려던 거 아닌데.”
“속은 괜찮아?”
트렁크 팬티라도 입고 있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여긴 그의 구역이니까.
“속은 괜찮은데...머리가 좀...”
“그렇게 먹고 마셨으니까 당연히 속은 괜찮겠지”
그가 나와 식당 쪽으로 갔다. 군살 없는 등이랑 털이 숭숭 난 다리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허리, 젠장, 저렇게 매끈할 수가.
“나, 나 갈게요.”
“기다려”
“아니. 지금 우유배달하러 가야 해요. 늦엇....”
그가 컵에 뭔가를 들고 나왔다.
“마셔”
“이게 뭔데요?”
컵을 받아든 은찬은 향과 색깔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커피?”
“숙취에 좋으니까 마셔. 마시고 조용히 문 닫고 가. 잘 거니까.”
그는 컵을 건네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향도 색깔도 분명히 커피인데 숙취에 좋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뭔가를 챙겨주는 성의가 괘씸해 입을 대보았다. 분명히 커피 맛인데 새콤달콤했다.  조용히 S11호를 나온 은찬은 택시를 타고 곧장 대리점으로 향했다. 10분 지각한 상태로 간신히 도착해 배달을 시작했다. 배달을 끝낼 무렵에는 땀이 나고 허기가 졌다.
“아, 배고파. 집에 가 아침부터 챙겨 먹어야겠다”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달리던 은찬은 문득 커피프린스에 불이 더 환하게 보였다. 어, 누가 벌써 출근을 했나?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유리문을 두드리며 하림을 불렀다. 돌아본 하림의 손에 라면이 쥐어져 있었다.
“형, 이 새벽에 웬일이야?”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건데?”
가게 안으로 들어간 은찬은 바닥에 스트리폼과 담요가 깔린걸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여기서 잤어?”
“그럴 일이 좀 있어. 아, 잘 됐다. 형, 나 배고파. 밥 사줘.”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붙잡힌 은찬은 영문도 모른 채 하림을 데리고 식장에 갔다.
“아줌마. 여기 선짓국 둘이오.”
“선지 많이 주세요. 밥도요.”
“은찬적인 주문이네.”
“뭐? 무슨적인?”
“요즘 우리가 만들어낸 신조어야. 은찬적이다. 은찬스럽다. 은찬하다. 사용 범위는 무지 광범위해. 담을 수 있는 부피. 무게 수를 초과해 얻어내거나 집어넣을 때 반겅 2m 내에 있는 모든 사물과 부딪쳐서 부수거나 상처를 입어도 무감각할 때.”
“뭐 그런걸 만들어 쓰고 그러냐? 내가 그렇게 개성적인가? 야, 나보다 울 사장이 더 이상하지 않아?”
그 순간 은찬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며 두 눈을 빛냈다.
“한결적이다. 한결틱하다. 이건 뭘 거 같아? 쫀존하고 밴댕이 속알딱지에 돈 좀 있다고 사람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엄청 잘난척하면서 으스대고....”
“사실 잘났잖아.”
“생긴 것만 미끈하면 뭐 해 사람이 정신이 올발라야지. 넌 아직 몰라서 그래. 사람이 얼마나 비관적인데.”
은찬은 말하는 도중 선짓국이 도착했다. 밥을 거꾸로 들어국에 퍽퍽 말았다. 먼저 뜨거운 국물을 후르르 맛보고 우거지를 건져 덥석 먹었다.
“으앗, 뜨거”
“형은 꼭 여자처럼 생겼는데 식성은 어째 강호동 같아?”
대꾸도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먹은 은찬은 먹고 있는 하림을 보며 여유 있게 공깃밥을 추가로주문했다.
“아줌마, 깍두기도 더 주세요.”
밥을 시켜놓고 은찬은 무슨 심각한 얘기가 있던던 것 같아서 잠시 머리를 굴렸다. 아!
“야, 잊어먹고 있었는데 너 바른 대로 얘기해봐. 집은 어쩌고 가게 바닥에서 자?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어. 그냥 캠핑한 거야.”
“한 여름도 아닌데 캠핑은 무슨 캠핑. 너 똑바로 얘기 안 하면 밴댕이 속알딱지한테 확 일러버린다.”
“아이 참. 의리없게 그럴 거야?”
“그러니까 말을 해. 이제 한솥밥 먹는 식군데 무슨 일 있으면 서로 도와야지 안그래?”
“슈바이처 나셨네.”
“비꼬지 말고 ,, 자식아”
은찬은 추가고 나온 밥을 말고 깍두기 국물을 부었다. 푹푹 말며 자꾸 채근하자 하림이 말했다.
“집 나왔어”
“왜?”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벽지가 마음에 안들어, 장판이 맘에 안 들어? 뭐가 맘에 안드는데?”
“에이.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그러니까 확 다 얘기하면 되잖아.”
“아빠가 가기 싫은 학교 가라해서 나왔어. 뻔한 스토이야. 나는 예술 대학, 아버진 의대. 작년에 합격했는데 아빠가 등록금을 안 줘서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다리를 좀 다쳤어. 6주간 깁스해 있는 동안 학교는 물건나 갔고.”
“그때부터 집 나온 거야?”
“나왔다 들어갔다. 이번에는 한 두 달 됐나? 자취하는 친구 집에 있었는데 자식이 여친 생겼다고 눈치를 주더라고 의리 없는 새끼.”
“야. 그래도 어떻게 아버지랑 타협을 봐야지. 집 나오면 너만 고생이야. 춥지. 배고푸지. 외롭지. 그 나이에 노숙자 될래?”
“우리 영감이랑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다른 타협안도 없어. 무조건 의사야.”
“넌 뭐 하고 싶은데?”
“난 미술 감독. 영화 같은 데 보면 벽지나 작은 소품 하나로 분위기가 살잖아. 그런 거 보면 배우나 감독보다 훨씬 멋있어. 왠지 나서지 않고 뒤에서 받쳐 주고 있는 힘 같은 게 느껴지거든. 카리스마 같은거.”
마냥 헤헤거리고 다녀서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구체적인 대답이 나왔다. 은찬은 새삼 하림을 다시 봤다.
“아버지가 너 여기 있는건 알고 계셔?”
“그걸 얘기하면 그게 가출이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못 찾게 확 은둔을 해야 자식이 귀한줄 알지.”
“은둔은 자식! 네가 무슨 오사마 빈 라덴이냐!”
은찬은 먹던 숟가락으로 하림의 머리를 퍽 때렸다.
“아이씨이~ 왜 때려. 밥 먹는데.”
“아, 그래.먹어라.”
밥 먹는데 건드린 게 미안해서 황금 같은 선지 한 덩이를 하림의 그릇에 넣어 줬다. 좋아라 하며 먹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좀 뿌듯했다.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마음이 이럴까?
“으, 배부르다. 배고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형, 우리 사우나나 하러 가자.”
“응? 아, 난.......씨,씻었어. 아침에 샤워하고 나왔어.”
“그게 씻은 얼굴이야?”
“너 혼자 가. 난 커피도 팔아야 하고. 집에가서 출근 준비 해야지.”
“그럼.”
하림이 손을 내밀었다. 은찬은 선짓국 먹을 걸 계산하고 주머니 탈탈 털어 하림의 사우나 비를 내놓았다. 하림이 당분간 가게에서 잔다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인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동생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감기나 걸리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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