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달 전, 은찬의 25시
(1) 오후 7시 50분, 고기를 사다.
꽃은 꽃이요 나무는 나무겠지만 참 헛갈린다. 너는 꽃이냐, 나무냐. 은찬이 유리창 너머로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일렬로 서 있는 해바라기 사이로 엄마와 아기가 손잡고 걸어가는 그림이다. 벌써 7년 전에 내가 다 셌는데 말이야. 너는 모두 일흔둘이다. 근데 일흔두 송이냐, 일흔두 그루냐. 고게 몹시 헛갈리네. 그때 덜커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정육점의 문이 열렸다.
“어? 안에 계셨습니까, 구 사장님?”
은찬은 너스레를 떨며 질질 끌리는 슬리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정육점 특유의 누린내가 풍겨왔다. 이어 찬 기운과 함께 붉은 조명에 에워싸였다. 벌써 침이 확 고인다. 쓰읍! 은찬은 두 눈을 번득이며 진열대로 다가갔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유리에 찰싹 붙였다. 해바라기를 노려보던 이성적인 눈이 야성의 빛을 내뿜었다. 붉은 육질을 보자마자 아드레날린이 마구 치솟았다.
“볼일은 잘 보셨습니까?”
정육점 주인 구씨는 뚱한 표정으로 쓱쓱 칼을 갈았다.
“무슨 볼일이었는데요?”
“.........”
“아저씨, 요즘 삼겹살이 잘 안 나가나 봐요?”
은찬은 돼지고기 마니아다. 목심을 보면 금방 짭짜름하고 쫄깃한 장조림을 떠올린다. 등심을 보면 고소한 돈가스, 안심을 보면 새큼달큼한 탕수육, 갈비를 보면 어느새 송곳니를 갈고 있다. 워낙 식욕이 강해 연상하는데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삼겹살 줘?”
“아뇨. 앞다리로 주세요. 김치찌개 끓이려고요.”
은찬의 머릿속에는 벌써 김치찌개가 끓고 있다. 숭덩숭덩 썬 신 김치에 적당히 비계 붙은 돼지고기가 진한 국물에 빠져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꼴깍 침을 삼키던 은찬은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머리를 들었다. 구씨 아저씨가 너무 조용했다. 방문턱에 앉아 유리 안에 고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동그랑땡같은 아저씨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물기 하나 없이 퍽퍽해 보였다. 쫌 상한 동그랑땡이다.
“아저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물끄러미 고기만 보던 아저씨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찬아, 넌, 이 고기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
“고기 말입니까요?”
“그래.”
“어쩐 고기 말예요? 이거, 사태요?”
“아니, 전반적으로.”
“돼지고기 쇠고기 다요?”
“장난치지 말고.”
“족발에 꼬리까지?”
“야, 그냥 고기 말이야. 고기!”
갑자기 구씨 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까지 장난이던 은찬은 흠칫 놀라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러다 곧 히죽 웃고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진정하세요. 진정, 혈압올라요. 아이고, 벌써 얼굴이 시뻘게지셨네.”
“집어치워라, 집어쳐. 자식이 진지한 구석이 없어. 그러니까 니가 매일 고 모양, 고 꼴인 거야.”
“어허, 또 삐치신다. 왜 그러시는데요? 어디서 또 돼지 콜레라 퍼졌답니까?”
“됐다. 내가 너 붙잡고 무슨 말을 하겠냐. 말을 말자.”
“에이, 왜 또 소심해지시나. 그러지 말고 말해 보세요.”
“이 자식아, 네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렇지! 그냥 이 고기 말이야! 이 고기!”
“그건 아까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고기가 뭐냐고요. 안심인지 등심인지 말을 해야 알죠.”
“에이씨이!”
흥분한 구씨 아저씨가 진열대 안에서 고기 쟁반을 하나씩 꺼내 올리기 시작했다. 턱 소리를 내며 올라온 쟁반 위에서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육질이 춤을 추었다. 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가만 보고 있으려니 덩달아서 점검 열이 올랐다. 도대체 이 아저씨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전부 다라고 하면 딱 알아들어야지! 뽈살도 고기고 대포살도 고기지 안심, 등심만 고기냐!”
아저씬 손가락으로 등심, 안심을 푹푹 찔러댔다. 그럴 때마다 은찬의 눈이 홱홱 커지고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아저씨가 보자 보자 하니까, 쯧! 아까운 고기에 흠집은 왜 내고 난리야! 저걸 누구 먹으라고! 더러운 손톱이 반이상 푹 박혔다 나왔는데 저걸 어떻게 팔려고! 순간 떠오른 생각에 흥분이 슝 가라앉았다. 안 팔아야지 뭐. 팔면 양심 없는 거지. 그래도 버리긴 아까우니까 뒤처리를 해달라면, 뭐 받아줄 수는 있지. 구워 먹으면 되니까. 우씨, 그래도 열나네. 군소리 없이 몸 바치고 있는 고기가 무슨 죄라고 학대를 해!
“아무리 비싸봤자 한우 제 놈도 고기고, 퇴계도 고기란 말이야! 알겠어, 이놈아! 이 고기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엉!”
“고기가 고기지, 생각이 들 게 뭐 있어요?”
“왜 없어. 이 돌대가리야!”
“도, 돌대가리?”
순간, 은찬도 발끈했다.
“씨이, 내가 왜 돌대가리예요! 고기 보면 먹고 싶지, 그거 말고 무슨 생각이 들어요!”
“계집애가 감정이 메말라 가지고!”
“거기서 계집애는 왜 나와요! 늙다리 노총각 주제에!”
“이 돼지가, 너 말 다 했어! 네가 나 늙는데 뭐 보태준 거 있냐!”
“그러는 아저씬, 내가 계집애로 태어나는데 도움 준거 있어요!”
“계집애가 총각이라고 불러도 아무 말도 못하고, 등신 같은 놈.”
“입 아프니까 그렇죠!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설명하려니까...., 이씨! 다 알면서 왜 그래요!”
“너, 은근히 즐기지?”
“예? 제가 뭘 즐기는데요?”
“사람들이 너 남자로 보는 거 즐기잖아. 여학생들이 꽥꽥 소리 지르면서 사진 찍어대는 거 사실 기분 좋지? 안 그래?”
“아저씨, 누굴 변태로 아세요? 다 알면서 노친네가 사람 염장을 지르나.”
“뭐? 노친네? 그래,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 엉!”
“어디서 뺨 맞고 와가지고 나한테 화풀이십니까. 네? 내가 아저씨 북이에요? 툭하면 나한테 화풀이하고.”
“나는 화풀이좀 하면 안 되냐! 신춘문예 열네 번 떨어진 놈은 대놓고 화풀이도 못해!”
“열네 번 떨어진 게 무슨 자랑이라고......”
순간 은찬은 뭔가 걸린다는 걸 깨달았다. 아, 어제까지만 해도 열세 번이었다! 그제야 곧 터질 것 같은 아저씨의 얼굴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발표....났어요?”
쯧쯧, 또 떨어졌나 보네.
“꿈이 적중했어. 며칠 전에 젖소한테 깔려서 질식하는 꿈꿨거든. 소가 젖통으로 내 숨통을 조르면서 잘라 봐, 이러는 거야.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버둥거리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소 밑에 깔린 채로 부위별로 자르고 있더라.”
그러면서 아저씨는 도마 위에 돼지 앞다리 살을 올려놓고 뭉툭하게 썰었다.
“근데 이놈의 칼이 잘 안 들잖아. 톱질하듯이 짓이기고 있는데 소가 웃는 거야. 잘라 봐, 이러면서.”
“그래도 좋았겠네요. 뭐.”
“좋긴 뭐가 좋아?”
“젖소 부인 좋아하잖아요.”
“야!”
“아저씨 방에 젖소 부인 붙어 있는 거 다 알아요.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99년도 달력을 아직까지 붙이고 있냐.”
“내가 젖소 부인 때문에 놔두는 거냐? 우리 엄마 아빠 돌아가신 날이니까 붙여놓은 거지. 너는 그게 문제야. 계집애가 생각하는게 영 구려. 그래 가지고 무슨 애들을 가르친다고. 나는 애 생기면 절대로 너한테 안 맡긴다.”
“장가나 가시고 그런 말씀하지죠.”
“장가 안 가도 애는 생길 수 있는 거잖아. 자식아.”
“어떻게요? 입양하게요?”
“야, 누가.......하여간 너랑 말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 어디까지 말했냐?”
“개꿈 꿨다는 것까지요.”
“빌어먹을 새끼들. 지들이 뭘 알아. 심사하는 놈들 뻔하다고. 문학계도 썩어서 아는 놈들끼리 다 해먹는 거야.”
“맞아요. 썩을 때로 썩었어요.”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는 은찬의 시선은 도마 위에 꽂혀 있었다. 조각난 앞다리 살의 양이 점검 늘어나고 있다. 저러다가 다져지는 게 아닐까.
“시라는 게 뭐야. 감동 그 자체 아냐. 차분히 한 구절, 한 구절, 여백까지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끝까지 다 읽어야지 반전의 묘미를 알고, 옳거니! 그제야 무릎을 치는 건데 말이야. 이놈들은 제목만 보고 휙, 한두 줄만 읽고 휙휙 시인이고 소설가면 뭐 해. 감상하는 마음가짐이 안 돼 있는데.”
“이번엔 제목이 뭐였어요?”
“생고기 무한 육면각체. 뚝뚝 떨어지는 핏물, 차진 육질, 허연 비계, 단단한 뼛속에 숨어 있는 진한 엑기스. 그 한덩어리의 생고기를 육면각체로 뚝뚝 잘라내는 고깃간 주인의 삶, 애환, 고독. 내 시에는 그런 게 다 스며 있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고기 보면 무슨 생각 드느냐고 물었던 것입니까요?”
“그래, 나는 이 고기 보면 차암.....”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흥분해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들었다. 고기가 이미 잘게 썰려 있단 걸 알아주었으면 좋으련만.
“나한테 고기는 내 인생 그 자체인데 말이야.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애증의 대상. 그 심오한 뜻을 모르다니. 참 답답하다.”
“채식주의자인가 보죠 뭐.”
“뭐?”
“심사 위원들이 고기를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웰빙 시대니까.”
은찬은 아저씨가 칼을 놓고 벙벙해 있는 틈을 타 얼른 고기를 구해냈다.
“웰빙?”
“네. 그래서 요즘은 야채 값이 더 비싸잖아요. 모르셨삼?”
찌개 거리로는 터무니없이 잔 고기를 챙기고 5천원을 내밀었다
“됐다.”
“왜요?”
아저씨는 멍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사 위원이 채식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그냥 해본 말인데.
(2) 오후 8시 05분, 날아라 태권 소년
주인이 살지 않는 4층짜리 건물의 2층, 동문 태권도 학원이 은찬의 일터다. 건물 왼쪽에 작은 입구가 있다. 어른 한 명이 서면 꽉 차는 1인용 계단이 흙먼지로 지저분하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균열된 계단 벽에는 쓰고 지운 낙서가 오래된 액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액자의 반은 유리가 깨져 테이프로 땜질한 상태다. 액자에는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딴 학원생들의 기념사진이 들어 있다. 목에는 화환을 두르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학생 옆에는 엉거주춤한 표정의 관장이 서 있다. 메달의 주인공이 바뀌어도 사진 속 관장의 표정과 화환은 바뀌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도. 은찬은 계단에 떨어진 껌 종이를 좁고 비뚤어진 액자를 고쳐 놓았다. 남은 세 계단을 훌쩍 뛰어올라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범님!”
“응?”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이른다.
“승경이가 심바 데리고 왔어요.”
은찬은 돼지고기가 든 비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뒤돌아보았다. 승경이 작은 푸들 한 마리를 안고 서 있었다. 승경을 에워싼 아이들은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방청객처럼 은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 왜 집에 안가? 수련 끝났으면 얼른 집에 가야지.”
“피자 먹고 가려고요. 왜, 안돼요?
한 번 붙어보시겠습니까 하는 말투의 주인공은 봉태원이다. 하느님, 이 녀석의 사춘기는 대체 언제 끝나느냐고요.
“승경이가 피자 시켰거든요. 사범님 것도 시켰어요. 사범님 오늘 엄마 안 계시죠? 승경이 엄마도 오늘 어디 가셨대요.”
숨 가쁘게 설명하는 건 승경이 심바를 데려온 것을 이른 연정이었다.
“야, 어디가 아니라 뮤지컬 보러 가신 거거든.”
“맞다. 뮤지컬.”
승경이 ‘어휴, 이 바보.’ 하는 표정으로 쏘아봐도 연정이는 히죽 웃었다.
“집에 심바 혼자 있어서요. 불쌍해서 데려왔어요. 엄마 올때까지 여기서 놓아도 되죠?”
봉태원처럼 공격적이지 않아도 승경의 말투는 다분히 도도하다. 열두 살 먹은 소녀한테 위압감을 느껴야 한다니, 대체 우리 애들은 다 왜 이럴까.
“어디 신성한 도장에다 개를 풀어!” 라고 말할수도 없다. 이 아이들이 밥줄이니. 쩝.
“30분밖에 시간이 없을 텐데? 곧 일반부 수련 시간이잖아.”
“30분이면 돼요. 금방 배달 와요. 내가 사범님 좋아하는 불고기 피자 시켰어요.”
순간, 은찬의 눈이 번득였다. 오 예, 불고기!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괜히 서랍을 뒤적거렸다.
“니, 니들끼리 먹지........”
“승경아, 이검 심바 먹어도 돼?”
“맘대로.”
아이들이 소시지를 들고 심바를 유혹했다. 개와 아이들이 마룻바닥을 쿵쾅대며 뛰어다녀도 은찬은 소리치지 않았다. 성질 같았으면 “야! 조용히 안 걸어! 먼지 나잖아!” 하고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은찬은 고이는 침을 삼키며 아이들을 흐믓하게 바라보았다. 승경은 은찬을 황홀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그런 은찬을 태원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올해 6학년으로 올라가는 둘은 톰과 제리처럼 아옹다옹하면서도 잘붙어 다니는 편이다. 승경이 입관한 이틀 뒤에 태원이 입관했으니, 아마 태원이 톰일 것이다. 둘에게 은찬은 트러블의 중심에 있는 치즈. 은찬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저녁 먹을 생각뿐이다. 관장님께 일반부 수련을 맡기고 옥탑방으로 올라가 저녁을 먹겠다는 계획에 홀릭 상태다. 그 전에 애피타이저로 피자를 먹는 거지. 그 담에 주 메뉴로 김치찌개랑 밥을 먹고, 입가심으로 엄마표 이뻐 샐러드를 먹는 거다. 흐흐흐. 그때 승경이 말했다.
“사범님, 침 나왔어요.”
“응? 아....”
은찬은 민망하게 웃으며 소맷자락으로 침을 쓱 닦았다. 태원은 아, 더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승경은 그것도 멋있다는 듯 감탄 어린 표정을 했다.
“사범님, 내가 보낸 메일 읽어보셨어요?”
“나한테 메일 보냈어?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은찬은 컴퓨터랑 그다지 친하지 않다. 사실은 메일 주소도 가물가물하다. 난처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로 손을 뻗었다.
“그, 그럼 볼까? 우리 승경이가 무슨 메일을 보냈을까?”
“아, 아뇨!”
승경이 휙 몸을 날려 컴퓨터를 꺼버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모니터를 가리고는 태원의 눈치를 살폈다.
“나, 나중에 보세요. 어, 피자 왔다!”
승경이 조르르 달려가 분홍 지갑을 열었다. 은찬은 제자가 계산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바쁜 척 딴 짓을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태원과 눈이 마주쳤다.
“왜?”
태원은 은찬을 한심하다는 듯 보고는 휙 가버렸다.
“아, 저 자식이....”
“사범님, 얼른 오세요!”
“어, 잠깐만. 나 이것 좀 하고, 먼저 먹고 있어.”
어떻게 덥석 물어뜯겠니. 사범 체면이 있지. 은찬은 괜히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몇 초 버티지 못했다. 피자 냄새가 솔솔 풍겨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어찌나 쪽쪽 소리를 내며 먹는지 귀에서 침이 나올 것 같았다.
“어, 어디 한 조각만 먹어볼까?”
괜히 혼자 중얼거리고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사범님. 여기.”
승경이 따로 챙겨둔 큰 조각을 들어 내밀었다. 어이구, 예쁜 것. 그때 태원이 말했다.
“사범님, 전화왔는데요.”
“응?”
태원이 책상 쪽을 가리켰다. 말도 아깝다는 듯이 턱으로 말이다. 오감이 피자에만 쏠려 있던 은찬은 그제야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기대에 찼던 위가 벌컥 화를 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린 은찬은 책상 위에 놓은 휴대폰을 집어들었따.
“여보세요?”
[오빠, 나]
순간 은찬의 눈에 불꽃이 퍽 튀었다. 어떤 년이 또 장난 전화질이야! 오빠라고 부르면 알조다. 여중3년. 여고3년 동안 남성 페로몬 결핍으로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온 후배들에게 수도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심지어 같은 학년의 여학생들마저 오빠, 오빠하며 숨을 할딱거렸다.근데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빠라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훽 끊어버리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말했다.
[오빠! 나야 나. 은해.]
“빨리 끊어, 임마.”
[왜?]
왜는 왜야, 내가 지금.....
승경이 커다란 피자 조각을 내보이며 어서 와 먹으라고 은찬을 홀려댔다. 은찬은 환하게 웃으며 끄덕거렸다.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해. 끊는다.”
[오빠 내가 지금 더 급해. 어떤 양아치 놈이 자꾸 괴롭힌단 말이야.]
“뭐!”
은찬의 동공에 맺혀 있던 피자 조각이 휙 날아갔다.
“어떤 양아치?”
[싫다는데도 자꾸만 쫓아오잖아. 지금 내 앞에 있어. 오빠가 좀 와줘.]
“어느 개새 .... 거기 어디야!”
[커피프린스]
먹을 걸 앞에 둔 은찬을 불러낼 수 있는 건 엄마와 은새뿐이었다. 은찬은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휘날리며 점퍼를 낚아채듯 들었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출구 쪽으로 걸었다.
“넌 뭐 그딴 놈이랑 어울려!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 밖에서 뭐 하는 거야!”
[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꾸만 얘가....]
“시끄러! 너 하여간 가서 봐. 야, 아저씨 계시지?”
[아저씨? 응. 저기 카운터에서 쳐다보고 계셔.]
“그럼 꼼짝 말고....”
그 순간 은찬의 두 다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으악!”
그리고 등부터 쿵 떨어졌다. 피자를 먹던 아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은찬을 보았다. 한 팔은 점퍼 속에 넣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쥔 은찬이 누워 있었다. 한쪽 다리는 무릎을 세워 바닥을 짚고 있었고, 한쪽 다리는 치켜들고 있었다. 은찬의 발바닥에서 심바의 용변이 뚝 떨어져 내렸다. 이..... 이 개.....새끼. 주리를 확!
[오빠, 왜그래? 오빠?]
전화기에서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과 동시에 장식장이 흔들거렸다. 은찬과 아이들의 시선이 장식장으로 향하는 순간 트로피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은찬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
간신히 트로피를 받았지만, 안도의 한숨이 채 식기도 전에 태권 소년의 머리가 트로피에서 이탈해 데구루루 굴러갔다.
“헉”
아이들 사이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과 동정의 시선이 은찬을 향했다.
“관장님 아시면....”
‘에이씨이.’
태권 소년의 머리도 붙여야 하고, 발도 씻어야 하는데 승경은 계속 붕대를 감았다.
“사범님 피나요.”
트로피 모서리에 찍혀 엄지와 검지 사이가 조금 찢긴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승경을 말리지 못했다.
“치료부터 해야 돼요. 안 그러면 피가 계속 날지도 몰라요!”
승경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반창고 하나면 끝이었다. 그런데 승경인 그 위에다 붕대를 끊임없이 칭칭 감아대는 거였다. 붕대가 손에서 손목까지 올라와 깁스한 것처럼 뻣뻣해졌다. 그래도 승경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승경이 피를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승경은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현장에 승경이 있었다고 한다.
(3) 08시 55분, 까마귀 나라 양아치를 만나다.
소맷자락에는 침을, 바지 자락에는 개똥을 묻힌 은찬이 나타났다.
“오빠, 손은 왜 그래? 다쳤어?”
“고은새, 너 또....”
때로는 동생인 은새를 알아볼 수가 없다. 아침에 등교할 때랑 영 딴판이니까. 오늘도 교복은 지하철 사물함에 있나 보다.
“오빤.... 싸움 좀 그만 해. 매일 깡패들 패고 다니니까 그 손이 성할 날이 없잖아. 성질 좀 죽여 ”
은새가 닭살 돋게 반겨 맞았다. 무슨 여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나저나 뭐 먹을 거 없나.
“뭐야, 이거. 이게 네 애인이라고? 허, 되게 웃긴다. 응?”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찬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년을 힐끗 보았다. 뜨악했다. 까마귀 나라 양아치인가. 너무 새까맣다. 게다가 곱슬머리! 치명적이다. 초조한 건지, 일부러를 불량스럽게 보이려고 허세를 부리는 건지 몰라도 청년은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으.....”
은찬은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의자에 기대는데 삭신이 다 쑤셨다. 머리도 지끈거렸다. 넘어진 후유증이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오른쪽 귀 옆 3cm지점에 5백원짜리 동전만 한 땜통이 생긴 탓이다. 넘어지면서 마룻바닥에 뱉어놓은 풍선껌이 머리에 붙은 것이다.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뱉어놓은 건지 잡히기만 하면 가만 안 두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평소 뚝뚝한 태원이 머리를 잘라주겠다고 가위 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승경이 붕대를 감는 동안 태원이 묘한 표정으로 서서 머리를 잘라주었다. 은찬은 쓱싹쓱싹 가위질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흡사 공포영화 같았다. 결국 도장에 걸린 관장님의 모자를 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가 자율 방범대 모자를.
“야, 고은새. 이 비릿하게 생긴 놈 때문에 날 찬다는 거야? 차! 어이가 상실이다, 정말.”
녀석이 비웃자 은새가 옆에 딱 달라붙어 팔짱을 껴왔다. 청년이 보고 눈을 부릅떴다. 새까만 얼굴이 일그러지니까 참 볼품없다. 은찬은 매섭게 꼬아 보는 청년을 보며 짧게 바람을 불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그렇게 불어 올리는 게 은찬의 버릇이었다. 그런데 모자가 들썩거려서 얼른 모자를 꾹 눌러써야 했다.
“오빠, 얘 좀 떼어줘. 얘가 자꾸 나 귀찮게 해서 미치겠어. 나 사귀는 오빠 있다고 하는데도 안 믿는 거 있지.”
이번에도 오빠는 아니고 가짜 애인 행세를 하라는 건가 보다. 어이가 상실이긴 이쪽이 더하다. 언제쯤 정신 차릴래. 고은새. 난 네 언니란 말이다! 기가 딱 막혀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자 커피프린스의 아저씨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손은 왜 그랬어? 격파하다 다쳤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근데 아저씨, 뭐 먹을 거 좀 없습니까?”
“먹을 거? 비스킷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줄까?”
한숨이 푹 나왔다. 은새가 양아치니 뭐니 하지 않았으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왔을 것이다. 물론 피자도 먹고 말이다. 책상 위에 돼지고기를 그대로 두고 온 게 더 마음에 걸린다.
“그거라도 주세요.”
“차는 뭐?”
“에이, 우리 사이에...”
찻값을 아끼려고 얼렁뚱땅 넘기려던 은찬은 옆에 웬 새까만 청년이 앉아 있다는 걸 상기했다. 뭐, 이 녀석이 내겠지.
“그럼 생과일 주스 주세요. 양 많이요.”
“꼭 지 같은 걸 시키네. 야 너 이거랑 정말 사귀는 거 맞아? 너 왜그러냐? 이 오빠가 그랬잖아. 불쌍한 애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응?”
청년의 조롱에 은새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지랄하고 있네. 야, 황민달. 니가 무슨 오빠니 순 양아치 주제에.”
“민달이가 아니고 민엽이. 근데 어떻게 고렇게 얌통머리 없이 말해도 예쁘냐? 에이, 귀여운것.”
우욱! 토할 것 같다. 은새가 옆구리를 툭 쳤다. 앞에 있는 녀석을 빨리 해결하라는 뜻이다. 은찬은 제 머리에 비해 좀 큰 모자챙 밑으로 청년을 훑어보았다. 승경이 붕대를 묶자마자 대걸레에 대충 발을 문대고 후다닥 뛰쳐나왔다. 오로지 은새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나왔는데, 막상 맞은편에 앉은 상대를 대하고 보니 한숨만 폭폭 나왔다. 저건 양아치 축에도 못 끼는, 그러니까 동네 놀이터에서 초등학생들 코 묻은 돈이나 뜯을 것 같은 놈이다. 입만 걸지 눈에 독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쌈꾼의 기질 같은 것도 없고 말이다.
“야, 이거 중딩 아냐?”
청년이 은찬을 깔보며 말했다.
“야,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은새의 성질이 나왔다.
“어따 대고 자꾸 이거야!”
흥분하는 은새가 별로 달가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핏줄이라고 편드는 걸 보니 조금 대견하다. 짜아식.
“너보다 네 살이나 많아. 존댓말해!”
“뭐? 야, 이게 나보다 네 살이나 많다고. 누굴 장님으로 아냐? 비릿한 게. 그래, 많아야 이제 고삐리 됐겠다. 뭐야, 이게 너한테 스물넷이래? 너 속은 거야. 인마, 야! 너 이 새끼, 똑바로 말해 봐. 몇 살이나 처먹었어?”
“내가 이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야. 어떻게 사람을 다 삐딱하게 보니? 다 너 같은 줄 알아? 네가 순 입만 열면 구라를 치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런 걸로 보이지? 어휴, 이 구라쟁이야.”
은새가 조롱하자 청년이 발끈했다.
“뭐! 이게 정말!”
“어쭈. 어따 눈을 부릅뜨고 지랄이야. 때리기라도 하겠단 거야? 그래, 차라리 한 대 팍 쳐라. 그리고 깨끗이 끝내자.”
“씨바, 정말 내가....”
이게 고등학생들의 대화일까. 도대체 나는 왜 부른 걸까. 저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은찬은 의자 깊숙이 앉아 머리를 기댄 채 생과일 주스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은새가 눈치를 주며 또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봐.”
은새의 눈이 모자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은찬의 눈을 찾아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어, 음.....”
목이 칼칼했다. 은찬은 주린 배를 쥐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애인을 시키더라도 뭘 좀 먹이고 시켜야지. 일찍이 동막골 어르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뭘 많이 먹어야 한다고. 이거야 원, 기운이 딸려서..... 중저음인 은찬의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너...이름이 뭐냐?”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은새가 짜증을 부렸다. 은찬은 모자 밑으로 청년을 쳐다보면서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은새가 좋냐?”
“오빠, 그런 건 뭐 하러 물어 봐?”
은찬은 상대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선 키에서부터 은찬이 밀렸다. 은찬이 아무리 오빠 부대를 끌고 다닌다고 해도 기본 체격이 보통 남자와 맞먹을 정도는 아니다. 173cm에 보통의 여자보다 좀 굵은 골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자식 참 말귀 되게 못 알아듣네.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인마. 내 말은 우리 은새가....”
그때 생과일 주스가 도착했다. 은찬은 말을 멈추고 대뜸 팔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붕대를 너무 감아 주먹도 잘 쥐어지지 않는 거였다. 제길. 하는 수 없이 손을 바꿔 내밀었다.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찼다. 은찬은 곧장 원삿을 했다. 생과일 주스 한 잔을 깨끗이 비우는데 불과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크으”
“오빠”
“꺼윽”
“어휴. 정말 내가 못 살아.”
“야, 이 말 저말 길게 할 것 없이 그냥 한판 뜨자.”
성질 급한 청년이 말했다. 앵돌아졌던 은새가 눈을 반짝이며 은찬을 보았다. 어서 한판 떠주었으면 하는 눈길이었다. 그 일로 불렀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끔은 정말 이게 동생인가 싶다. 언니를 링 위에 올려놓고 저는 라운드 걸이나 하겠다는 심사다. 은찬은 입맛을 다시며 입가를 닦았다. 잠시 주스를 리필해 달랄까 생각했다.
“야, 귓구멍이 막혔냐? 밖으로 나오라로.”
녀석이 선전 포고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갔지만 은찬은 움직이지 않았다.
“애, 괜찮네. 남자답고.”
“아저씨!”
은새가 펄쩍 뛰며 주인아저씨를 째려보았다. 그래도 아저씨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전에는 요 앞에서 둘이 다정하게 걸어가더니. 그새 싫증 났어?”
“쟤 본성을 이제야 안 거예요.”
“본성이 어떤데?”
“순 양아치에요. 여자 앞에서 아무 데나 침 찍찍 뱉고, 매너도 꽝이고, 성질도 더럽고, 졸업해서 재수한다더니 한 학년 꿇은 거 있죠.”
“아하, 그게 결정적이구나.”
“참 내, 기가 막혀서 정말! 공대 간다더니 공고 다니는 고삐리예요. 순 뻥쟁이!”
“공고고, 공대고 네 걱정이나 해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으이고!”
은찬까지 타박을 주자 수세에 몰린 은새가 애절 모드로 돌아섰다.
“아이 참, 얘긴 나중에 집에서 하면 안 돼? 나 정말 힘들단 말이야.”
“아이고, 그러셔? 연애하느라 힘들지? 참 딱하기도 하셔라.”
“지금 공부가 문제야? 동생이 납치될 판국인데?”
“납치는 무슨. 애 생긴 거 보니까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겠구먼.”
“언니가 몰라서 그래. 아까 나를 강제로 막 자기 자취방에 데리고 가려고 했단 말이야.”
“너는 꼭 너 아쉬울 때만 찬이더러 언니라더라.”
아저씨의 이죽거림과 은새의 칼날같은 눈빛이 격돌했다.
“어이고, 무서워라.”
유들유들 웃는 아저씨는 과장스럽게 말하고선 카운터 뒤로 몸을 숨겼다.
“언니.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신 이런 거 안 시킬게.”
은찬은 한숨을 쉬며 은새를 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을 상기시켜 줘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 물어봤다.
“너 딴놈 생겼지?”
“아니, 절대 아냐.”
“그럼 왜 떼놓으려는 건데?”
“공부하려고, 이제 고 3인데 정말 공부해야지. 예술 대학가서 제대로 음악 공부하면 가수되는 것도 쉬울 것 같고.”
“정말이야?”
“나도 이제 철들어야지. 언제까지나 언니한테 용돈 타서 쓰기도 미안하잖아. 대학 들어가면 아르바이트해서 내 용돈 정도는 내가 벌어 쓸 거야. 그러니까 언니, 이번 한 해만 더 고생해.”
바라지도 않던 뜻밖의 말에 은찬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동생에게 이런 기특한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은찬은 그저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은새가 말썽 부리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스스로 용돈을 벌겠다는 말을 하다니, 대감동이다.
“아냐, 야. 언니가 무슨 고생한다고....”
그때 밖으로 나갔던 녀석이 머리를 디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안 나오고 뭐 해! 졸아서 발이 안 떨어지냐, 새끼야?”
“배고파서 그런다, 인마.”
“뭐?”
“일단 들어와 봐.”
“이게 누굴 똥개 훈련시켜? 빨리 안 나와?”
“앉아 봐”
씩씩거리며 들어온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비로소 은찬의 도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에는 점퍼를 입고 있지만 아래는 도복 바지 그대로였다. 그냥 흰 바지가 아님을 알게 된 건 아마 점퍼 밑으로 나온 검은 띠 때문인가 보다.
“ 이 엉아가 말이다. 누굴 팰 입장이 아니거든.”
“뭐라는 거야. 이 씹탱이가!”
욕설을 듣자 은찬도 욱해버렸다.
“너 말 곱게 안 할래? 사포로 혓바닥을 확 문대버린다!”
“뭐, 이딴 새끼가!”
“조용히 안해!”
은찬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설득조로 말했다.
“너 패면 경찰서를 가야 되는데 그럼 내 밥줄 끊겨. 그러니까 딴 걸로 해결 보자.”
“노가리를 까고 있네. 그냥 붙어. 새끼야!”
“너 잘하는 걸로 하면 되잖아.”
“쳇! 폼 재긴. 야, 뭘 해도 내가 널 못 이기겠냐?”
“그래? 그럼 좋다.”
은찬은 고개를 들어 아저써를 찾았다. 가게에는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어지간히 장사가 안되는 가게다.
“아저씨, 용궁반점에 전화 좀 해 봐요.”
“야, 관둬라. 냄새 나.”
“에이, 금방 끝나요.”
“나 참, 모르겠다. 오랜만이니까 봐주는 거야. 알겠어?”
“네, 사장님.”
아저씨가 용궁반점에 전화 거는 걸 보고 은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저녁을 집에 가서 좀 먹지.”
은찬은 못들은 척하고 청년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너, 돈 있냐?”
“왜. 나한테 삥 뜯게? 별 지랄을 다 해라. 응?”
“지금부터 우리가 자장면 먹기 내기를 할 거거든. 진 사람이 계산하는 게 도리지 않겠냐?”
“뭐? 자장면? 새끼, 진짜 깨네. 쥐방울만 한 놈이 먹기 내기를 하자고? 별.... 쯧. 그래 봐줬다. 세숫대야가 밥맛이라 좀 주물러 주려고 했더니 맞기는 싫다 이거지? 대신. 고은새 너 딴말하기 없기다. 여기서 이 자식 아작 내면 내거 한다고 약속 한 거 기억하지?”
“약속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알았다고. 뻥쟁이야.”
그러고 은새는 은찬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빨리 끝내. 오빠. 알았지?”
자장면 열 그릇이 한꺼번에 배달돼 왔을 때 청년은 살짝 움찔했다.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은찬의 눈이 형광 빛일 발한 걸 알았으면 더 놀랐을 것이다. 13초 만에 첫 번째 그릇을 비운 은찬의 얼굴을 천사처럼 해맑았다. 얼굴을 그릇에 거의 파묻다시피 하고 먹어댔지만 입가는 그다지 지저분하지 않았다. 자장이 입가에 묻는 것조차 아까운 은찬이다. 한편 청년은 초조함과 약간의 주눅이 들어 위축된 위장에 면발을 쑤셔 넣느라 곤욕이었다. 세 그릇까지는 어느 정도 경쟁이 돼서 긴장감이 있었다. 그러나 네 그릇째에서 확연히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개밥, 오징어 잡탕, 피자, 돼지죽.”
먼저 항복을 하거나 토하는 쪽이 지는 거다.
“마가린, 식용유, 돼지 껍데기, 꼬리곰탕.”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은새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무료한 표정으로 툭툭 내뱉는 단어 단어가 참 느끼했다.
“잡채, 치즈, 삶은 계란, 생크림”
은새는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양 선수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했다. 다섯 그릇을 비운 은찬이 고개를 들었을 때 청년은 이제 다섯 번째 그릇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얼굴도 엉망이었지만 속은 더 엉망인 모양이었다.
“바나나, 요플레...”
“우욱!”
은새가 좀 심했는지도 모른다. 불쌍하게도 청년은 입을 틀어막을 채 화장실로 뛰어갔다. 더 미안하게도 그 뒤통수에 대고 아저씨가 말해다.
“야, 바닥에 흘리지 않게 조심해.”
(4) 09시 55분, 반지원정대
은새는 토악질을 해대는 녀석을 흘려놓고 달아나 버렸다.
“어머 해욱아, 어디야? 학원 마쳤어? 어, 나 지금 거기 근처인데.... 정말? 금방 갈게.”
전화 한 통 걸더니 헤실헤실 물러서며 팔랑거렸다.
“오빠, 나 좀 늦는다.”
“야! 고은새!”
의자에 걸레처럼 널브러진 놈은 고장 난 펌프처럼 계속 웩웩거렸다. 그래도 별수 없다. 은찬의 주머니에는 고작 1,500원뿐이 없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그래도 게임은 게임이니까. 그렇지?”
잠깐 사이에 핼쑥해진 청년이 제 손으로 자장면 값을 치르는 동안 은찬은 물만 마셔댔다. 자장면이 좀 짰다.
“너도 물 좀 마실래?”
물을 권했지만 청년은 도끼눈으로 노려보고는 휙 나가버렸다. 자존심이 상했나.
“그래도 아주 밑바닥인 녀석은 아닌가 보네. 계산은 하지 않냐.”
“그러게요. 아, 배부르다”
은찬은 배를 쓸며 아저씨에게 고맙단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밤 기온이 쑥 내려갔는지 날씨가 쌀쌀했다. 고은새, 나쁜 년, 딴 놈 없다더니 고새를 못 참고 도망가!
“믿는 순두부에 이빨이 빠개진다더니, 나쁜 계집애!”
은찬은 혼자 밤길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해욱이는 또 누구야? 대체 몇 놈이나 사귀는 거야!”
은찬은 계속 중얼거리며 시장으로 들어왔다. 옥탑방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데 벼락 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고은찬! 너 이 녀석. 말도 없이!”
“과, 관장님....”
도장 입구에 장승처럼 서 있는 관장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순간 머리가 날아간 태권 소년이며, 피자 먹느라고 어수선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휙 떠올랐다.
“그, 그게 말입니다. 관장님. 어. 제가....”
“야! 그거 내 모자 아냐? 이놈이 남의 방범대 모자를 왜 쓰고 다녀!”
“어, 엇!”
관장은 단번에 모잘르 휙 벗겨갔다.
“참, 희한한 놈일세. 커서 맞지도 않는 것을 뭐 하러 쓰고 나가?”
누군 쓰고 싶어 썼나요? 머리에 땜통이.... 어두워서 관장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은찬은 신경이 쓰여 연방 머리를 매만졌다. 고거 뚫렸다고 춥네. 그나저나 태권 소년 머리는 어떻게 됐나. 승경이가 제대로 붙여놓았을까.
“이거나 받아.”
“뭔데요?”
관장님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흔드셨다. 아, 내 고기! 은찬은 후다닥 다가가 얼른 고기를 받아 들었다.
“도복 입고 나다니지 말랬지. 요놈아!”
“아얏!”
꿀밤 하나라도 관장님 건 호되게 아파서 머리 저체가 지잉 울렸다.
“아이씨, 사부님! 머리에 구멍 나겠어요.”
“어디서 아이씨야, 이놈이! 어서 올라가기나 해. 어머니 혼자 계신가 보더라.”
“네”
“문단속 잘하고”
“네. 안녕히 가십시오.”
“오냐”
관장을 배웅한 은찬은 연방 머리를 문질렀다. 꿀밤 맞은 곳이 아직도 얼얼했다.
“아, 쓰으....”
옥탑방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PC방을 지나 당구장을 지나 옥상에 다다랐다. 이 낡고 오래된 건물에 은찬네가 살 방을 만들어 준 건 관장이었다. 또 관장은 건물 주인을 설득해 전기료와 수도료만 내도록 해주었다. 관장은 돌아가신 은찬의 아버지와 해병대 동기였다. 은차은 그 인연으로 집이며 직장까지. 한 마디로 생활 자체를 신세를 지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 우리 왕자님 왔엉?”
“동창회는 잘 다녀오셨어?”
방문을 열고 들어선 은찬은 종이 팩을 하고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오늘도 자줏빛 홈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으셨다.
“오자마자 마사지하는 거야?”
“바로바로 진정시키지 않으면 금방 까칠해져. 바람이 어찌나 차고 매서운지. 보드라운 살이 다 까지게 생겼어.”
“에이, 설마. 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정말이라니까? 여기 만져봐.”
은찬은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종이 팩 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질러 보았다.
“어, 진짜 좀 까칠한데? 완전 수세미네.”
“어머? 정말!”
“농담, 놈담.”
“얘는! 안 그래도 속상한데, 쯧.”
“무슨 팩인데?”
“수분 팩. 화장품을 좋은 걸 못 쓰니까 팩이라도 자주 해야지. 신경 써서 제때 관리해 주니까 이정도지. 스킨로션 4, 5만원짜리 쓰면서 이 정도 피부 되는 여자는 나 밖에 없을 거다. 내 나이에 말이야.”
“고럼 나 여사님 피부야 백만 불짜리지.”
“음, 촉촉해. 참, 너 저녁 안 먹었니? 냉장고에 샐러드 그대로 있더라?”
“먹고 왔어.”
“뭐 먹었는데?”
“자장면”
“아유, 얘. 엄마가 그런 밀가루 음식 먹지 말랬잖아. 피부에 나쁘다니깐.”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엄만 뭐 먹었는데?”
“나야 이태리 요리지.”
“비스트로 갔어? 맛있었겠다.”
자장면 다섯 그릇은 어디가고 은찬의 입 안은 빠르게 군침이 돌았다.
“근데 오늘은 좀 그랬어. 내 친구들은 다 맛있다고 쩝쩝거리면서 먹는데, 난 딱 알겠던데 뭘. 셰프가 바뀌었는지 소스가 제 맛이 아니야.”
“우리 엄마 혀가 예민하긴 하지. 그래서 실망했겠네?”
“그러려니 하고 먹어줬지. 근데 이게 무슨 냄새니? 어디서 구린내가 난다?”
“구린내?”
점퍼를 벗던 은찬은 도복 윗도리 끝 자락에 누런 게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헉!
“나, 나는 안 나는데? 그, 소스가 뭐라고?”
“소스?”
“거, 거기 소스 말이야. 전에 괜찮은 거 있다 그러지 않았어?”
“아, 샤프란 폼. 오늘은 그거 안 먹었어. 그건 연어랑.....”
이어. 대 략 10년 전에 이태리 요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 코스를 약 5주. 그러니깐 5회 정도 학습한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은찬은 옷을 갈아입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한 어머니가 아시면 바깥에서 벗으라고 하셨을 거다. 그놈의 심반지, 샅반지. 다시 도장에 들이나 봐라! 은찬이 몰래 도복을 뭉쳐 드는데 어머니가 물었다.
“은새는?”
“조, 좀 늦는대.”
“또? 고건 엉덩이에 가시가 돋았다니? 어떻게 잠시도 엉덩일 안 붙이고 있어? 고3이 공부는 안하고 밖으로만 돌아서 어쩌려고 그러는지. 원, 거기 전화기 좀 줘봐.”
은찬은 전화기를 건네고 얼른 욕실로 향했다. 세탁기에 도복을 넣고 돌려놓고 샤워를 했다. 보일러가 시원찮아 덜덜 떨면서 씻었다. 씻는 동안 내내 어머니의 통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새가 말을 듣지 않는지 어머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거칠어졌다 했다.
“으, 냉수마찰이 따로 없네.”
시원찮은 물줄기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후닥닥 마무리를 하고 얼른 옷을 입었다.
“아, 정말, 이걸 어떻게 가리냐?”
머리를 말리던 중 은찬은 좀 난감해졌다. 머리카락으로 어떻게 가려보려 해도 허연 빈틈이 자꾸만 보이는 것이다.
“봉태원 솜씨 참 죽여준다. 바짝도 깎아놨네.”
아무래도 무슨 조치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래 가지고선 도저히......은찬은 욕식 선반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땜통 크기와 비슷하게 거즈를 자른 다음 테이프로 붙였다. 당분간은 이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은찬이 욕실을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머, 동옥이니?“
참 낭랑하기도 하셔라. 은찬은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랩이 씌워진 화려한 접시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접시 안에 한 주먹도 안 될 것 같은 야채들이 보였다. 이른바, 예뻐 샐러드다. 사람들이 말하건데 어머니의 요리 솜씨라면 근사한 양식집 주방장을 해도 되겠다고 한다. 그러니 맛에서 불만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은찬도 별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문제는 양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뛰고 뒹굴고 씨름하는 은찬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말씀 하시곤 했다.
“어머, 찬아. 그거 다 먹으면 살쪄. 사람은 채식을 해야지 건강한 거야. 너 그거 아니? 사람 식탐만큼 추한 거 없다. 엄만 청국장, 김치찌개 이런 건 잘 못해도 스파게티, 샐러드는 잘 만들잖니. 그것만 만들어? 케이크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지. 또 뭐가 있더라? 그래, 해물 리조또, 감자 스프.....”
어머니의 요리는 맛있다. 재료비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것만큼 맛있다. 단지 은찬이 삼계탕, 불고기, 삼겹살을 더 좋아할 뿐이다.
“뭐? 반지? 무슨 반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은찬은 머리카락으로 반창고를 가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그걸 내가? 누가 그래? 아, 진향이..... 아. 아니......”
갑자기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응? 그, 그럼. 자, 잘 갖고 있지. 당연하지, 얘는...”
기어서 방을 한 바퀴 돈 어머니는 그대로 마루를 더듬거렸다. 은찬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았다.
“왜 그래, 엄마?”
“아. 알았다. 내가 자, 잘 보관하고 있을게. 응? 어, 언제? 다, 닷새 뒤? 아우, 참 힘들겠다. 아무튼 잘 치르고, 으응.”
어머니는 전화를 끊자마자 은찬을 붙들었다.
“너 반지 못 봤니?”
“무슨 반지?”
“봤어, 못 봤어? 아, 어떡해. 기억이 안 나. 그 반지가, 반지가....”
“반지가 어쨌는데?”
“내가 내가 여기 끼고 있었단 밀이야. 다이아몬드 반진데..... 어, 어디 있을 거야 .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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