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청부살인사건

from sitcom diary 2009. 5. 31. 00:45

#01
2003년 10월 28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삼십대 말쯤의 초라한 모습을 한 여자가 나의 법률사무소로 찾아왔다. 튀어나온 볼 위에 파묻힌 듯한 작은 눈에서는 만만치 않은 삶의 곡절과 강인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사건을 의뢰하러 온 게 아니라 잠시 상담만 하러 왔습니다. 되나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뭔가 자신이 닥친 현실에 대해 정밀한 재 감정을 시도하려는 태도였다.

“어떻게 저를 알고 찾아오셨죠?”
나 역시 그녀의 경로를 탐색 했다. 단순한 지식검색기계가 되기 싫었다.

“저도 이런 말 하는 게 어떤지 모르는데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살인범들이 가보라고 소개를 해서 왔어요.”
다른 살인범이란 말을 쓰는 걸 보면 그녀가 살인에 관련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살인범이 다른 살인범에게 변호사인 나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따져 보니까 이럭저럭 살인사건을 많이도 맡았다. 사건마다 수면 밑의 빙산 같은 내용들이 많기도 많았다. 그 여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살인범이 소개한 게 찝찝하지만 그냥 한번 와 본 겁니다. 미안합니다.”
그 정도면 나를 선임할 의사는 없지만 솔직한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상담은 정확히 해 드리겠습니다. 유리하던 불리하던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 한 걸 정직하게 말씀드리죠. 아마 먼 훗날 실질적인 도움이 된 걸 아실 겁니다.”
어느 분야건 일단 정확한 진단이 중요했다. 브로커들의 사기가 법조계에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 여자는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듯 조심스럽게 앉았다. 긴장한 그녀의 얼굴에서 초조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저 혹시 지난해 재벌부인이 판사사위하고 사귄다는 여대생을 청부살인한 사건 아세요? 여대생이 공기총에 맞아 죽었는데요. 텔레비전하고 신문에 많이 났는데... 그 범인중의 한 사람이 제 남편입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는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 뉴스와 2580 시사프로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 사내가 누런 점퍼를 푹 뒤집어 쓴 채 봉고차에서 내려 허리를 구부리고 경찰서문을 향해 다급히 가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쉬가 그들의 등짝에 가시같이 가서 박히고 있었다. 그들 두 명은 한 재벌부인으로부터 청부를 받고 여대생을 살해한 후 해외로 도주했었다. 재벌과 판사, 치정과 청부살인이란 우리사회 상부 층의 정신적 빈혈 증세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시사프로인 2580에서 재벌부인에게 전화로 묻는 장면이 나왔다. 회장부인은 침착한 어조로 담당 피디를 타이르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말도 안 되죠. 제가 어떻게 살인을 교사할 수 있겠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입니다.”
잔잔한 어조와 내세우는 논리에서 난 완전범죄를 시도한다는 냄새를 느꼈다. 음지의 세계에서 살인도 하나의 독특한 돈벌이였다. 의뢰인 중에는 악덕기업인이나 사이비교주, 부패 정치인들이 많았다. 걸리면 사후처리 방법도 일정했다. 변호사를 사고 관료들을 매수했다. 감옥 사는 값을 충분히 치르면 범인도 입을 닫았다. 그러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그 여자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도 초등학생하고 중학생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그 죽은 여대생 집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남편이지만 극형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조금만 더 절제를 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여튼 모든 게 남편의 잘못입니다.”

그녀는 간단히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보험회사 직원이던 그녀는 한 고객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남편 집안의 고모부는 재벌이라고 했다. 여러 계열회사와 호텔을 가지고 있고 제주도 등 곳곳에 땅도 많았다. IMF 외환위기의 파도는 그녀 가족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지하 셋방에서 그녀는 녹즙배달을 하고 남편은 가방공장에 나갔다. 나중에는 고모인 회장부인의 운전기사를 했다.

회장부인의 기사를 하는 남편의 얼굴은 항상 수심이 가득했다. 곤란한 일들만 시킨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판사 사위를 미행하는 게 남편의 일이라고 했다. 아침에 판사 뒤를 따라 같이 출근하고 하루 종일 법원 앞에서 죽치다가 저녁에 돌아가 보고하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회장부인은 매번 화를 벌컥 냈다고 했다. 회장부인은 한번 누구를 의심하면 그걸 푸는 법이 없었다. 회장부인은 병적으로 사위를 의심했다. 심지어 딸 내외의 방에 도청장치까지 하고 감시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마담뚜의 소개로 딸을 결혼시킬 때 괴 전화가 왔었다. 누군가 판사사위의 과거를 제보했다는 것이다.

회장부인은 현직형사, 심부름 센터 등 수십 명을 고용하고 다시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로 그녀의 남편을 부렸다. 그리고 회장부인은 다시 종종 현장에 나타나 남편을 감시하는 이중, 삼중의 망을 구축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도 못 잤다. 회장부인한테서 수시로 지시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은 아내에게까지 비밀로 전화를 받곤 했다. 그녀가 마당에서 김장을 하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은 통장 하나를 그녀에게 던져 주고는 황급하게 출국했다. 그 직후 검단산 기슭에 묻혀있는 여대생 시체를 한 등산객이 발견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2003년 11월 25일.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회장부인과 주눅 든 두 명의 남자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부인은 오십대 말의 나이인데도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 계란형의 얼굴에 검은 눈동자였다. 그녀는 베이지색의 고급 쟈켓을 입고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청석에는 회장 측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대형 로펌에서 나온 거물급 변호사들이 회장부인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 옆에 곱슬머리의 남자가 안경 뒤로 눈을 질끈 감은 채 뭔가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그 옆은 살인청부를 맡았던 킬러였다. 짧은 머리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 삼십대 말의 남자였다. 그의 눈에서 알지 못할 섬뜩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진공상태 같은 법정분위기였다. 돋보기를 코에 걸친 재판장이 기록을 읽다가 킬러를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

“여기 기록을 보니까 총알이 네발이나 귀밑의 같은 곳을 관통했네?”
프로급 살인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재판장이 말을 계속했다.

“이 정도면 총구를 머리통에 들이대고 계속 갈겨 확인사살을 한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나?”
재판장이 킬러를 쏘아봤다.

“아, 아닙니다. 일 미터 이상 물러서서 고개를 돌리고 쐈습니다.”
킬러도 뭔가 감지한 듯 완연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마추어라는 것이다.

“안보고 쐈는데도 그렇게 잘 쏘나?”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그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처음에 그 여대생 얼굴을 보고 한번은 총구를 겨냥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두발 째부터는 보지 않고 쐈습니다.”
첫발은 이마를 관통해서 총알이 뇌에 박혀 있었다. 그 말을 듣던 방청석 구석의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는 얼굴이 백짓장 같이 창백해 있었다.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 그는 직장까지 팽개치고 혼자 범인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고 했다. 그 앞으로는 만약에 대비해 교도관들로 벽이 쳐져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팔뼈가 세 동강이 나 있던데 왜 그랬지?”
재판장이 물었다. 여대생은 죽기 직전에 극도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킬러가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둘러메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집어 던졌나? 그래서 팔뼈가 부러졌나?”
재판장이 다그쳤다.

“아닙니다. 죽이기 전 땅에 내려놓을 때조차 안 듯이 내려놨습니다요.”
킬러가 안절부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안 듯이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때 움직였어? 이미 죽어있었어?”
재판장은 짐승몰이를 하듯 킬러를 여유 있게 쫓고 있었다.

“그 여대생을 푸대 자루 속에 넣어 산으로 메고 올라가는데 힘이 들어 잠시 내려놓고 쉬었습니다. 그때 발이 꼼지락거리는 걸 봤습니다요.”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디까?”
재판장이 물었다.

“입에 청 테이프를 붙여 놔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죽여주는데 얼마를 받기로 했지?”
“저는 2억원을 달라고 하고 사모님은 1억5천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그 중간금액인 1억7천5백만 원에 낙찰이 됐습니다요.”
“살인을 청부받은 게 그거 하난가?”
“아닙니다. 그 전에 두 건을 더 청부 받았었는데 실패해서 사례비를 못 받았습니다.”
회장부인의 섬뜩한 다른 살인청부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재판장님 먼저 이쪽에서 모두진술을 해야겠습니다.”
그때 회장 부인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모두진술은 국민의 권리였다. 그런데 변호사를 이십년 해오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 재판 때 보고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법정에서 그 절차는 생략됐다.

“하시죠.”
재판장이 허락했다. 경력을 나타내는 듯 점잖은 은발의 변호사가 준비해 온 글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회장부인의 법정변호사중 대표였다.

“이 사건에서 명백한 건 여대생이 살해됐다는 사실 뿐입니다. 회장부인은 살인을 해 달라고 교사를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또 잃을 것이 많은 대기업 회장의 부인이 그런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부탁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여유 있게 계속했다.

“회장부인이 했다는 살인교사의 증거는 실제로 살인을 한 두 사람의 증언 밖에는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은 회장부인이 살인을 지시했다고 하면서 물귀신처럼 이 사건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고 늘어지면 재력이 있는 회장부인이 죽은 여대생의 가족과 합의를 해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이 감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회장부인이 그 여대생의 미행을 부탁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인범인 두 사람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납치를 결정했습니다. 납치 후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강난 팔뼈가 그 정황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대생을 죽이고 해외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체포가 되자 회장부인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회장부인의 얼굴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02
구치소에서 만난 사십대 초반의 김용국씨는 도무지 살인범 같지가 않았다.이웃에서 볼 수 있는 마음 좋은 아저씨 타입이었다. 그가 바로 뉴스화면에서 점퍼를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던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그는 회장부인의 살인청부 대리인이고 나중에는 직접 범행에도 가담했다. 그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불쑥 내게 한마디 던졌다.

“앞으로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감옥에서 삽니까?”
그는 막막할 것이다. 일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말려야 할 입장이 어떻게 살인청부를 하고 또 직접 가담까지 했죠?”
내가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인간은 사랑해도 죄는 먼저 미워해야 했다.

그는 판사사위가 불륜관계가 없다는 걸 미행과정에서 알았었다. 회장부인의 병적인 오해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대생의 죽음을 막아야 했다.

“나쁜 짓거리인건 알았지만 계약을 했으니까 이행해야 하는 거지요.”
그가 또 불쑥 내뱉었다. 난 깜짝 놀랐다. 그에게 청부살인도 계약이었다.

이런 악령들이 이 사회를 떠돌고 있었다. 범죄계약을 해도 돈만 벌면 된다는 의식이었다. 거액만 준다면 변호사들도 사실을 왜곡시키고 위증을 시켰다. 정의보다는 의뢰인이 건네는 돈값을 먼저 해야 한다는 사고다. 거짓증언을 하는 인간들도 받은 돈에 대한 대가는 분명했다. 선악과 진실보다는 결과와 돈이 절대다. 그래도 그는 잡히니까 원망스러운 것 같았다.

“난 괜히 중간에서 껴 버렸어요. 사모님 대리인으로 우선 5천만원을 살인청부업자에게 줬는데 일이 잘 안됐어요. 사람 죽이는 게 어디 그렇게 영화같이 쉽나요?그런데 사모님은 계약일까지 안 죽였다고 절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중간에서 돈 떼먹은 줄 알아요. 너 같은 놈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살인청부로 받은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살인청부업자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 킬러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 동안 살인 준비하는 비용으로 다 써버렸대요. 독극물도 사야죠. 총도 사야 되죠. 그 여대생을 파악하는 데 썼다는 거예요. 그리고 착수금은 돌려주지 않는 거래요. 돈이 하나님인 사모님은 그런 거 들을 여자가 아니죠. 그러면 대신 내가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만약 안 주면 우리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서 해코지 하겠다고 악을 썼어요. 돈 있는 사람들은 더 무서워요. 돈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니까요. 그러니 저로서는 어떻게 하겠어요. 빨리 여대생을 죽여야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수사기록과 그의 말을 통해 파악한 사건의 발단은 대충 이랬다.

회장 집은 호텔과 나이트클럽 외에 여러 회사를 인수해서 성장한 신흥부자였다. 결혼할 딸이 있는 회장부인은 거물급 마담뚜의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예비판사 명단 중 27세의 사법연수생 김태환을 찍었다. 마담뚜의 명단에 오른 인물들은 고급 명품 같은 거래대상이었다. 남자 측은 결혼비용 명목으로 7억원을 요구했다. 실질은 몸값이다. 마담뚜는 건너가는 돈의 십 퍼센트를 받는 게 관례였다. 그 외 양가에서 각 3천만원씩의 중개료를 내야했다.

김태환이 임관이 되자 결혼식이 거행됐고 신랑 측에 대금이 지급됐다. 회장부인은 뚜 마담에게 약속대로 3천만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사위가 된 김 판사는 자기부모에게 소개료를 주지 말라고 했다. 소송으로 청구할 수 없는 돈이니까 안줘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마담뚜들도 판례실력은 작지만 판 깨는 실력은 대단했다. 어느 날부터 회장부인에게 괴전화가 걸려왔다. 삼십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여자는 김 판사의 과거를 자세히도 설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회장부인은 눈이 뒤집혔다. 사위의 불륜현장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미행 작전에 돌입했다. 딸 내외의 방에 도청기를 장치했다. 밤이면 딸 내외가 자는 방 입구에 머리카락을 붙여 놓고 사위가 어디 가는지를 체크했다. 나중에는 딸이 사는 아파트 앞 현관에서 직접 밤을 새다가 눈이 퉁퉁 붓기도 했다. 회장부인은 현직 경찰관, 심부름 센터 직원 등 이십 여명을 동원해 사위 꼬리잡기 작전에 돌입했다. 불륜현장사진을 가져오면 큰 돈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형사나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목욕탕이나 전자오락실에서 시간만 때우다 돈을 받는지 감시하기 위해 승복차림으로 현장을 급습하기도 했다.

미행자들은 회장부인이 독 품은 얼굴로 “개뿔도 없는 집안 걸 사위 삼았더니 이 배은망덕한 새끼”라고 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회장부인은 사위에게 하자가 있다면서 사돈집에 찾아가 준 돈의 반을 도로 찾아갔다고 수사기록에 적혀있었다. 남을 믿지 못하는 회장부인은 미행자들과는 별개로 감시망을 구축하기 위해 지하 단칸방에 살던 조카를 끌어들였다. 끝내는 조카에게 살인까지 시켰다.

“사모님이 처음에는 판사사위 미행만 해달라고 했어요. 결혼 전에 만나던 애가 있는 것 같다고요. 얼마가 지나자 사모님은 심부름 센터를 믿지 못하겠다고 저보고 직접 현장에 나가 판사사위를 감시하라고 했어요.”
“그래 미행에서 뭔가 꼬리가 잡혔어요?”
내가 물었다. 아무래도 마담뚜들의 공작 같았다.

“나오긴 개뿔이 나와요? 다섯 달 동안 그 판사 뒤를 따라 저도 법원에 출근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도 부장 판사 따라서 구내식당에서 먹고 퇴근하면 집으로 바로 갔어요. 그런데 사모님은 도대체 믿질 않아요. 분명 뭔가 있는데 네 놈이 제대로 일을 못하고 와서 거짓말 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사위를 의심했죠?”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병적인 의심이었다.

“남편인 회장님이 원래 바람을 피워서 따로 자식이 있거든요. 사모님은 그 피해의식이 컸어요. 한번은 사모님이 젊었을 때 남편이 어떤 여자하고 차 안에 있는 현장을 잡았어요. 사모님은 자기가 운전하는 차를 몰아 가미가제 특공대 같이 여자와 남편이 있는 그 차에 가서 충돌한 적도 있어요. 정말 독해요. 딸만은 자기 같은 불행을 안겨주지 말자는 집념이죠.” 비로소 일부분은 이해가 갔다. 난 얘기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만약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하자는 계획이 있었어요?”
사건의 증거 중에는 특이한 녹음이 하나 있었다. 그가 회장부인과 통화를 하면서 모든 것을 덮어 쓴 내용이었다. 거래 끝에 조작된 증거 같았다. 지능범들은 철저했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들어 철저한 연습을 했다. 알리바이나 거짓증거도 완벽했다. 그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모님이 살인청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얘기하라고 해서 그대로 말해준 게 녹음됐고요, 잡혔을 때 진술 계획을 공책에 써서 외웠어요. 검거된 첫날 경찰에서 연습한 대로 진술했죠. 내용이 뭐냐면살인만 제3의 인물인 정사장에게 재하청해서 실행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형사들이 계속 세부적인 여러 가지 사항을 추궁하면서 이리저리 치는데 다 꾸며대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미숙한 공범이 있는 한 완전범죄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죠, 두 번째 조서를 받을 때부터는 아예 사실대로 진술했어요. 형사가 그러는데 모두 사형에 처해 질 건데 진실을 말하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그랬어요. 사실 저는 중간에서 돈 전달하고 푸대 자루 속에 넣은 여대생 운반한 죄 밖에 없어요.”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공범들이 속깨나 썩었을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검찰에서 제가 조사를 받을 때 사모님이 왔었는데 나를 보고 손바닥을 뒤집는 제스츄어를 하시더라구요. 나와 킬러가 총대를 메라는 거죠. 저만 말을 맞춰주면 완벽하다고 그랬어요. 사모님은 제 변호사까지 사줬는데 그 변호사도 저를 찾아와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주면 합의를 해서 형도 깎아 준다고 그랬어요.”
“정말 회장부인이 살인청부의 심부름을 시켰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물귀신작전으로 물고 늘어지는 겁니까?”
내가 거꾸로 쳐 봤다. 그 어떤 것도 끝까지 속단할 수 없었다.

“정말 사모님 심부름한 거 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여대생을 죽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것만 봐도 아실 수 있잖아요?” 그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지금 회장 부인 쪽 태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자기는 미행만 시켰지 절대로 살인은 교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쪽 변호사님이 오셔서 나한테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요. 작전을 잘 짜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뒤집어쓰고 사모님을 빨리 빼내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하지 왜 나를 불러 사실을 털어놓죠?” 내가 비꼬아 봤다.

“회장부인이나 그쪽에서 사 준 변호사를 안 믿기 때문에 이렇게 인권변호사님에게 따로 물어보는 거죠. 돈 문제는 사모님을 절대 안 믿죠.”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데요?”
“그냥 진실을 다 말할 거예요. 진짜 다 털어놓으면 그래도 좀 봐 주겠죠. 그 역할을 맡아주세요.”
그는 회장이나 부인은 그 어떤 사람도 매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회장부인은 살고 자신만 사형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그와회장부인 그리고 킬러 사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건 법정소설감이었다.

 

#03
깡마른 몸매에 코가 길쭉한 검사가 회장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장부인역시 만만치 않은 파란 눈길로 검사를 응시했다. 회장부인은 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권력가나 부자들은 법정에서 흔히 휠체어를 타기도 했다.회장부인의 변호인단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했고 방청석에는 회장 측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뒤쪽에서 총지휘를 하는 회장을 얼핏 보았다. 검은 얼굴에 대머리였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이다. 기록에 나타난 그 부인의 혐의 역시 몇 건의 살인청부였다. 경영권을 노리는 회사간부의 살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도 죽이려고 했다. 결국 사위와의 관계를 의심한 그 딸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피고인 김귀숙씨는 그동안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게 맞습니까?”
검사가 냉랭한 어조로 확인했다.

“아니요, 틀려요. 법원에서 진술한 게 사실입니다.”
회장부인이 도전적으로 당당한 태도였다.


“왜? 왜 그랬죠?”
검사의 눈초리가 파고드는 듯 했다.

“지금 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어떻게나 언론몰이를 하는지 방송에서는 벌써 내가 살인을 사주한 걸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어요. 또 경찰은 그 내용대로만 나를 몰아쳤고요.”
그녀는 사주라는 법률용어가 어느새 입에 밴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그럼 법원에서는 사실을 얘기한 이유는 뭐죠?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시지.”
검사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재판부에서는 이제 진실을 알아주실 것 같아 말하는 겁니다.”
회장부인은 ‘판사는 너희들과는 달라’ 하는 표정이었다.

“여대생이 죽은 걸 확인하고 나서 살인청부의 잔대금을 주셨던데?”
검사가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그건 검사님의 억측이시죠.”
회장부인이 맞받아쳤다. 살인죄로 재판을 받으면서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하여튼 사건 후 돈이 살인범 김용국에게 건네 갔던데, 그건 맞죠?”
검사가 한발 물러서면서 사실을 확인했다.

“정확한 기억은 못하겠는데 3천만원 정도 준 건 사실입니다. 제가 미행심부름을 시킨 조카 김용국이가 저에게 협박을 하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을 시켜 미행을 했는데 중간에서 사고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막 화를 냈죠. 미행만 시켰는데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욕을 해 줬어요. 그랬더니 나보고 자꾸 그런 식으로 하시면 살인을 교사 한 것으로 말아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겁도 나고 경황이 없는 중에 3천만원을 빼앗긴 겁니다.”

회장부인은 당시를 떠올리듯 겁먹은 표정으로 유연하게 진술했다.
김용국이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옆에 있는 김용국 말은 회장부인께서 살인을 직접 지시하셨다는데?”
검사가 김용국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지시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이건 김용국이 다 꾸민 일입니다”
회장부인은 얼굴을 돌려 옆의 김용국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김용국은 감히 시선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검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김귀숙 피고인은 김용국이 베트남에 도망을 갔을 때 그곳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죠? 왜 그랬죠? 통화내용 기억합니까?”
“제가 전화로 용국이를 꾸짖으면서 진상을 물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떻게 된 건지 내용을 몰랐으니까요. 제가 죽인 상황을 비로소 알고 용국이를 꾸짖었습니다.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느냐고 말이죠. 미행을 시킨 저도 도의적 책임은 있죠.” 도덕성은 인정하면서 살인의 법적책임은 빠져나갔다.

“김귀숙 피고인은 여대생이 피살된 직후 김용국을 몰래 만나 9천만원을 현찰로 준 적이 있던데 어때요? 김용국의 말은 살인 잔대금이라고 하던데.”
“집을 사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돈을 준 사실이 있어요. 그래도 용국이는 제 친정 조카예요. 친척이 어려우면 평소 도와준 적들이 있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소리였다.

“검찰에서는 그런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줬다고 그럽니까?”
“그때는 온통 매스컴에서 내가 돈을 주고 살인을 교사했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뒤집어 쓸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녀가 뭔가 생각하는지 잠시 쉬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일심에서도 그런 선입견으로 판단해서 제가 유죄판결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사건 후 9천만원 준 사실은 이제야 인정하는 거네?”
그녀는 순간 자기 변호사들을 쳐다보았다. 인정해도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피고인 김귀숙은 여대생을 살해한 청부업자인 마기룡을 알고 있었죠?”
“언론에서 떠들어서 알았어요. 그전에는 몰랐죠.”
“김용국에게 공항에서 준 돈이 현찰이던데 그렇게 현찰로 준 이유가 뭐죠?”
“사업을 하는 사람의 아내로서 항상 현찰을 많이 준비해 둡니다. 남들도 다 그래요. 검사님도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특히 친정에 주는 돈은 그렇죠.”
“남편이 바람을 피는 바람에 집안에 불화가 많았죠? 그래서 딸만은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는 집착이 강했다는데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가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사업가의 아내로서 남편의 외도에 눈을 감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남편은 그런 것들을 다른 걸로 보상해 주곤 했어요. 그런 것들이 살인의 동기라는 건 말도 안돼요. 꾸며낸 얘기라고요. 전 남편이 돈도 많이 법니다. 사위가 판사고 딸도 명문대를 나왔어요. 아들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요. 내가 뭐가 모자라서 살인을 교사하겠어요? 검사님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요.” 검사가 오히려 논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오래 미행을 계속시킨 이유가 뭐죠?”
검사가 다른 방향으로 질문했다.

“미행이라는 걸 막상 시켜보니까 정말 어렵습디다. 한 팀에게 맡기고 현장을 가보면 없어요. 근처 목욕탕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돈을 달라는 짓거리들을 해요. 다른 팀으로 바꾸고 가보면 당구장에서들 살고 있어요. 열심히 미행하면 두세 번 만에 뭔가 나올 텐데 전부 그 짓들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미행자들은 항상 여운을 남기는 거예요. 뭔가 있긴 있는데 놓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나도 그만둘 수 없죠.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서 계속했어요.”

회장부인과 조카인 김용국 중 누가 교활한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회장부인의 변호인단은 막강했다. 김용국을 묵사발을 만들면서 무죄를 주장해 갔다.

이제 김용국은 살인죄 외에 착한 고모인 회장부인을 모략한 범인이 됐다.

이차공판이 그렇게 끝났다. 법정 앞 복도는 회장 측 사람들로 웅성거렸다.그런데 그중 외롭게 겉도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김용국의 처였다. 파출부인 그녀는 회장 측에서 총대만 메주면 평생 먹고 살 돈을 주겠다고 제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돈 거짓말에 속아 남편만 사형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창문 앞에 반백의 부수수한 머리의 남자가 지친 표정으로 혼자 서 있었다. 김용국의 처는 그 남자가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저 실례합니다만 피해자인 여대생의 아버님이시죠?”
내가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했다. 그가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 김용국의 새 변호사입니다. 직업이 직업이라 살인범이라도 변호를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김용국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비슷한 또래의 딸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아픔이 어떠실지 알고 있습니다.”

그의 한 맺힌 얼굴에서 금세 눈물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저도 나름대로 명문을 나오고 삼성그룹에서 18년을 일해 왔던 사람입니다. 저는 고시에 합격해서 큰 로펌 변호사가 되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장부인 변호사들을 보면 정말 저래도 되나 한스럽습니다. 사실자체를 왜곡시키지 않습니까? 전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살인교사를 부인하는 회장측은 그에게 사죄할 수 없었다. 죄가 없는데 아무것도 미안할 수 없다. 회장부인은 법정에서 오히려 그를 언론플레이 한다고 몰아쳤다. 그가 계속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딸의 죽음을 보고 세상에는 귀신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가 달려갔어요. 제가 보는 순간 죽은 딸아이가 한쪽 눈을 뜨는 거예요. 한이 맺혀서 아빠엄마가 갈 때까지 영혼이 거기 있었나 봐요. 제가 손으로 그 눈을 감겨줬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 눈꺼풀이 올라가는 거예요. 엄마가 그 눈마저 감겨줬더니 입이 씰룩거렸습니다. 저는 딸아이의 원한을 느꼈어요. 그렇게 바쁘게 살던 아이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고 가려고 그렇게 새벽시간까지 아꼈던 것 같아요. 산속에서 죽는 그 순간 마음이 어땠겠어요?”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 역시 살인범 김용국이나 마기룡이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었다. 살인범들이 자백했다. 위험했던 그로부터도 진실을 듣고 싶었다. 장소를 옮긴 나는 그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04 
살해된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는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삼성그룹의 간부이던 그는 퇴직 후 강남구청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모든 일을 언니인 아내와 의논할 정도로 의가 좋았다. 동서도 고교후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들도 사이가 좋았다. 처제의 아들 둘은 모두 우수했다. 그중 막내인 태환이는 한동안 이모부인 그의 집에서 묵으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이모인 그의 처는 곰국을 끓여 공부하는 조카의 건강을 살폈다. 이모부인 그 역시 더러 용돈을 태환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환이는 대신 고3이던 딸 혜경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태환이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 임관 무렵 결혼얘기가 오갔다. 옆에서 혼사를 지켜보던 정의택씨는 못마땅했다. 태환이 아버지가 신부 집에 5억을 요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신부 집에서는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지 않아 3억원밖에 주지 못하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밀고 당기다 의외로 7억원에 낙착이 됐다고 했다. 그건 결혼이 아니라 판사 아들의 매매였다.

후배인 동서는 태환이 뿐만 아니라 의사인 첫아들도 그랬다. 사귀던 여자를 떼어놓고 다른 곳에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태환이는 부모 말에 절대 복종하는 타입이었다. 공부는 잘하는데 어려서부터 보면 자기 주관이 없는 아이 같았다. 여자문제도 그랬다. 태환이는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얼마의 돈을 주어 그 여자를 떼어 버리기로 부모와 아들은 결정했다. 사랑이 실종된 껍데기 명품 거래였다.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수료식 때 양가에서 식사를 같이 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될 태환이 엄마가 분위기를 풀려고 몇 마디 우스개 덕담을 했는데 회장부인은 외면하면서 마치 교양 있는 여자가 푼수를 참아준다는 얼굴이었다. 정의택씨는 결혼식도 화려한 외형과는 살풍경한 느낌을 받았다. 사돈인 회장 집 형제들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나중에 검찰수사결과에서 안 사실이지만 회장부인은 경영권 문제로 시동생도 청부살해를 시도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있던 정의택씨는 지인을 통해 사돈이 될 집의 정보를 들었다. 사채와 유흥업으로 시작해서 악랄한 방법으로 회사들을 인수한 업계의 기피인물이었다. 양가의 피로연에서 정의택씨가 잠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때 사돈이 된 회장이 들어왔다. 어려운 사이라 그는 조심하고 있었다. 회장은 바로 옆 변기로 오더니갑자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정사장! 오늘 보니까 얘기가 통할 사람 같아. 더러 만나서 골프 칩시다. 나도 배운 거 없이 고생해서 성공한 사람이요. 그런데 말이지 성공해 보니까 돈으로 안되는 게 없는 세상입디다.”
정의택씨는 당황했다. 격의 없는 소탈한 품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돈 번 막 장사꾼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봐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조심하고 자주 보지 말아야 할 사돈관계였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자리를 피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그의 인생관을 보며 씁쓸했다.

판사 조카 태환이의 결혼생활이 이따금씩 그 엄마를 통해 귀에 들어왔다.

회장부인은 판사 사위에게 끔찍한 것 같았다. 퇴근할 무렵 이면 벌써 남산터널부근부터 사위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회장부인의 애정이 아니라 감시라는 걸 알았다. 결혼 전부터 알던 여자친구들이 더러 태환이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딸인 혜경이도 이종사촌 오빠인 태환이에게 고시공부에 대해 물으려고 전화를 했었다. 회장부인은 사위에게 온 여자전화를 일일이 캐묻고 따진다는 것이다.

한번은 태환이가 장모인 회장부인과 함께 가는데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귀를 곤두세우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던 회장부인이 누구냐고 다구 쳤다. 당황한 조카 태환이는 그의 딸인 혜경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이종사촌이니까 친척동생이니까 회장부인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게 혜경의 죽음까지 몰아넣는 불행의 원인이 됐다.

2000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정의택씨 집에는 자주 이상한 전화가 왔다. 오십대 말 쯤 되는 여자의 목소리인데도 정의택씨가 누구냐고 물으면 혜경이 친구라고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민한 편인 정의택씨는 희미한 기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전화국에 발신자확인을 신청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혜경이에게도 이상한 남자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대체 딸이 남에게 미행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딸 역시 동네 독서실에 다니면서 한 시간이라도 아끼면서 고시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추석 무렵이 됐다. 회장부인이 정의택씨 집으로 국수상자를 보냈다. 판사 엄마가 된 처제가 마침 와 있었다. 정의택씨는 회장사모님에게 감사전화를 하려고 하자 김판사의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펄쩍뛰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잣집에 팔려가면 함부로 연락도 해서는 안되는 것 같았다. 처제는 혜경이도 김판사한테 전화를 하지 말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순간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딸에게 판사오빠에게 몇 번이나 연락했느냐고 물었다. 딸은 결혼하고 단 두 번이었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공부 때문에, 다른 한번은 안부전화였다고 했다. 잦은 연락도 아닌데 아무튼 이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카인 김판사가 이모인 그의 처에게 전화했다.

“이모하고 혜경이가 일본여행을 갔다 왔어요? 또 혜경이를 미국유학 보내려고 그런다면서요?”
정의택씨 부부는 깜짝 놀랐다. 조카인 김판사가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장모가 얘기해 줬어요.”
그 때 정의택씨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전구가 반짝 들어왔다. 괴전화의 오십대 여자의 목소리는 바로 회장부인이었다. 결혼 후 피로연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비로소 딸을 미행과 회장 집에는 전화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연관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네 장모는 왜 남의 딸 뒤를 캐고 미행하는지 모르겠다. 따져야겠어.”
정의택씨의 처가 소리쳤다. 온 가족이 옆에 있었다.

“이모, 만약 항의할 경우 저한테 먼저 말해주세요.”
김 판사가 뭔가 사연을 숨긴 듯 초조한 어조로 부탁했다. 정의택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딸도 회장부인의 오해를 알자 펄쩍뛰면서 가서 따지자고 했다. 정의택씨 가족은 회장 부인 집으로 항의하러 쳐들어갔다.

“딸 단속이나 잘해요. 이놈저놈하고 붙어먹고 어디 시집가서 잘 사나 봅시다. 내 말이 사실이 아니면 내 새끼 차에 갈려죽어도 괜찮아.”
설득은 씨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회장부인이 퍼붓는 저주들만 섬칫했다. 해결은 사위인 김 판사의 몫이었다.

“네가 장모 앞에서 사실이면 사실이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분명히 해라”
정의택씨가 조카인 김 판사를 다그쳤다. 김 판사는 얼굴이 백짓장같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장부인은 그가 보는 앞에서도 사위인 김판사의 배를 찌르고 멱살을 잡는 등 표독을 떨었다. 김 판사는 이미 영혼이 없는 밀납 인형 같다고 정의택씨는 느꼈다. 소득 없이 싸움만 벌인 채 회장집을 나오면서 정의택씨는 조카인 김판사가 차라리 측은했다. 달래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말했다.

“김판사, 네가 장모의 오해를 잘풀어서 이 일을 매듭지어야지.”
“이모부, 장모는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김 판사가 절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주일 후 회장부인의 조카라는 사람이 연락을 했다. 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회장부인의 화해의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호텔 커피숍에서 본 남자는 의외였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험악한 인상의 건달이었다.

“왜 그날 허락도 없이 회장님 댁에 침입했죠? 주거침입죄 아닌가요?”
위압적인 어조였다. 정의택씨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말문이 막힌 건달 같은 그는 납득이 됐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회장부인은 이긴 사람이 없어요. 한번 이거다 하면 끝까지 우기죠. 그리고삐지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 사람이에요. 회장부인은 사돈의 과거까지 다 꼬챙이에 꿰듯 파악하고 있죠.”
정의택씨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딸 혜경에 대한 괴청년 들의 미행은 더욱 집요해 졌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따라 붙었다.

“아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요. 법으로 해요.”
딸 혜경이가 선언했다. 정의택씨는 형사고소와 함께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을 했다. 회장부인은 도도했다. 판사사위와 회장이 개입하면 안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장부인이 졌다. 심하게 자존심을 다친 회장부인은 헌법소원까지 시도했다. 회장부인의 분노는 이제 제어력을 잃은 적개심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 무렵 회장부인의 조카인 김용국은 목동아파트 2단지 앞에서 고교동창인 마기룡을 만나고 있었다. 전주의 돈을 받아 사채업을 하던 마기룡은 생활에 쫓기는 형편이었다. 전주가 그로부터 돈을 회수해서 다른 건달로 하여금 사채를 놓게 했기 때문이다. 돈에 쫓기는 마기룡은 무슨 일도 할 입장이었다.

“어르신한테 부탁받았는데 사람을 없애야 하는 일이 생겼어.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줘. 완벽하게 그런 일을 할 방법이 없을까?” 김용국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아무나 시키면 안되지. 성공해도 나중에 약점을 잡으니까. 어때? 내가 직접 작업을 해 줄까? 우리사이면 뒤탈이 생길 염려는 없잖아?”
“나야 좋지.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일할 건데?”
“특수독약이 있는데 그걸 먹으면 일주일 안에 간이 상해서 죽어. 내가 그걸 구할 수 있어. 약을 먹여도 며칠 지나서 죽으니까 완전범죄지.” 김용국과 마기룡 사이에 살인청부의 흥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05
“자 이제 재판장이 몇 가지 물어 봅시다”
콧잔등에 돋보기를 걸친 재판장이 회장부인을 내려다보았다.

“판사사위에게 여자가 있다는 이상한 제보가 온 게 언제죠?”

“그러니까 결혼식날을 받아놓고 사위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기 직전이죠.”

“그러면 결혼 전부터 다른 여자의 존재를 알았네?”

“그런 셈이죠.”
재판장은 뭔가 한참을 생각했다. 사위의 바람을 의심하는 것과 여자를 청부살해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재판장은 이렇게 살인의 동기를 회장부인에게 추정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을 하고 미행정도를 하다가 오히려 고소를 당하고 접근금지가처분까지 당하고 나니까 그 여대생 가족하고 대판 원수가 된 거 아니요? 재판장인 내 생각에는 그때부터 일이 본 궤도를 벗어난 거지. 여대생부녀를 누군가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나 할 정도로 증오했겠지. 그 태도가 조카 김용국에게도 전해졌겠지. 은연중에 회장부인인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시는 김용국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재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셨으면 의리를 지키지 않고 내가 살인청부를 지시했다고 이렇게 물고 들어갈 리가 있어요?”

“그거야 김용국의 인생관이 처음과는 다르게 바뀌었을 수도 있지”
재판장은 핵심을 보고 있었다. 기록에 나타난 구체적인 살인청부과정은 이랬다. 져 본적이 없는 회장부인의 자존심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소송이 그녀에게 불리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무슨 일도 해내는 회장남편과 판사사위가 있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회장부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차라리 그것들을 없애버릴 사람을 찾을 수 없겠니?”라고 조카 김용국에게 넋두리했다.

그러면서 “일이 잘되면 조카인 너 하나 도움을 주지 못하겠느냐”고 암시했다. 눈물과 돈 약속으로 마음을 흔드는 회장부인의 능력은 원래 탁월했다. 조카 김용국은 사채업을 하는 친구 마기룡을 떠올렸다. 살인까지 해준다는 말을 들었었다. 마기룡으로부터 몇 방울 차나 술에 타 먹이면일주일 후부터 점차 내장이 썩어 들어가 죽는 특수독극물 얘기를 듣고 회장부인에게 전했다. 그들은 완전범죄를 확신했다.

마기룡은 살인대금 2억을 요구했고 회장부인은 1억5천만원을 불렀다. 중간선인 1억7천5백만원에 흥정이 됐다. 2001년10월11일 오후5시. 청담고등학교 담 옆에 김용국의 그레이스가바짝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주위를 살피면서 쇼핑백을 손에 든 회장부인이 차 문을 열고 얼른 올라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이건 착수금이고 나머지는 일 끝나면 주겠다고 그래라. 그리고 내 얘기는 절대로 그 사람한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회장부인은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든 현찰뭉치가 든 쇼핑백을 건넸다.

며칠 후 마기룡과 김용국은 정혜경이 있는 대학기숙사를 맴돌기 시작했다.

국수배달을 가장하고 정혜경의 아파트에도 갔었다.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정혜경은 그동안의 미행에 시달려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젊은 여자를 고용해서 친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비밀이 새 나갈 우려가 많았다. 도대체 공격할 틈이 없었다. 정혜경은 대학구내의 강의실과 기숙사 그리고 집 사이만 시계추 같이 반복했다. 석 달이란 시간이 소득 없이 흘렀다. 김용국은 문득 마기룡이 프로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네가 가진 특수독극물을 한번 내 앞에서 테스트 해 봐.”
회장부인인 고모는 수시로 마기룡이 사기가 아닌지 확인하라고 했다. 다음날 마기룡은 쥐 몇 마리가 든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노란액체가 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준비해온 과자에 몇 방울 묻혔다. 약병에는 아무런 표지도 글씨도 없었다. 마기룡은 그 과자를 쥐들 사이에 놓았다. 이십분이 흘렀다. 쥐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나타났다. 움직임이 서서히 둔해지더니 한 시간 후 잠자듯 조용히 죽은 것이다. 인간의 체력에 맞추어 독극물의 양을 늘리면 얼마 후 기력이 떨어지다가 원인불명으로 죽을 것 같았다. 마기룡의 말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해도 절대 잔류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차차 고양이나 개한테도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독극물을 먹이는 거였다. 정혜경이 커피숍에라도 가면 화장실 간 사이 기회를 노려 독극물 몇 방울 찻잔에 떨어뜨리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정혜경은 다른 여대생처럼 혼자 도넛집이나 커피숍에서 책을 읽거나 하는 습관이 없었다. 마침내 법원의 정식 접근금지가처분 명령이 떨어졌다. 정혜경 부녀의 승리였다. 회장부인은 더 길길이 뛰었다.

“딸보다 애비 놈이 더 악질이야. 그 애비 놈부터 먼저 처치해 봐. 술을 좋아하니까 돈 벌 사업이 있다고 접근해서 처리하면 될 거야”

증오는 회장부인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죽일 대상이 정의택으로 바뀌었다. 정의택은 대기업 무역파트와 광고기획파트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컨설팅업을 하고 있었다. 마기룡은 오퍼상으로 가장해서 접근하기로 했다. 참치사업을 한다고 부산으로 데려가든가 우동체인을 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일본 같은 데 유인해 가서 처치하면 될 것 같았다. 특정한 품목을 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물품의 수요가 있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마기룡은 가짜명함을 찍었다. 죽은 정의택의 품에서 나온 명함을 가지고 형사들은 한참을 헛고생 할지도 몰랐다. 강남 구청 역 근처의 마천빌딩 411호에 있는 정의택의 사무실의 주변을 골목까지 철저히 답사했다. 정의택과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술 먹고 골목에서 나오다 인적이 없을 때 칼을 몇 방 먹이고 강도로 위장해도 경찰은 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바로 그 무렵 정의택은 오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위반하면 회장부인을 구속할 수도 있었다. 이제 딸은 완전히 그들로부터 해방이었다. 사실 그동안 딸 혜경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미행자들이 아예 드러내놓고 딸에게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딸은 다시 새벽에 수영장회원권도 끊고 남자친구도 만나기 시작했다. 정의택씨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업계에서 정 사장님을 추천받았는데 전반적인 무역 컨설팅은 물론이고 홍보나 광고마케팅까지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바닥에 깔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그는 정의택씨의 경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일단 만나시죠.”
옛날의 동료가 보내주는 좋은 일거리 같았다. 그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정사장님께 술이라도 먼저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장소를 정해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 뵙겠습니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말투였다. 좋은 고객 같았다. 다음날 저녁 강남 구청역 근처 음식점에서 그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삼십대 말의 남자와 만났다. 만만치 않은 눈빛의 그 남자는 공손히 명함을 건넸다. 위장한 킬러 마기룡이었다. 마기룡은 정의택씨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말했다.

“농사짓던 아버지의 땅값이 크게 올라 50억 정도 유산을 받았습니다. 역삼동에서 선후배들과 사업을 했는데 2억 정도 손해보고 지금은 다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 향수나 의류를 수입해서 판매하려고 하는데 자문을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정의택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부잣집 아들이 자칫하면 사기 당하겠구나’ 하고 생각 했다. 마기룡이 담담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저는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과 제 자금을 밑천으로 공생공존하면 만족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앞으로 형님같이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의택씨는 그 남자의 낭만적인 순진한 면이 마음에 들었다.

“실례지만 저를 추천한 사람이 누굽니까?”
정의택 씨는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 회사의 이사가 다른 사람한테서 정사장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물어가지고 다음번 만나 뵐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후 순진한 오퍼상으로 위장한 마기룡이 다시 정의택씨를 갈비집으로 유인했다. 한결 친해진 분위기였다.

“어제 8억원어치 영국의류가 든 컨테이너가 부산에 도착했어요. 함께 가셔서 그 옷들을 직접 보시고 광고나 홍보기획까지 세워주셨으면 해서요.” 정의택씨는 그 청년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요자의 취향도 생각하지 않고 홍보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유통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고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시고 지금이라도 도매상이나 전문유통업자에게 빨리 물건을 넘겨 처리하는 게 그래도 손해를 줄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부산으로 갈 필요도 없어요.”  욕심내고 따라가는 것 보다 정직하게 컨설팅을 해 주는 게 먼저 신용을 얻는 길이라고 정의택씨는 생각했다. 킬러 마기룡의 얼굴에 순간 낭패의 빛이 스쳤다.

#06
살인청부를 받은 마기룡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사채꾼 겸 건달일 뿐 살인 경험이 없었다. 오피스텔 월세도 밀릴 정도로 궁한 바람에 덥석 살인해 주겠다고 내뱉었다. 여대생을 없애달라고 심부름 온 용국이는 학교 때부터 좀 어리석었었다. 라벨을 뗀 쥐약 병을 특수 독극물이라고 하면서 쥐를 죽이니까 진짜로 속았다. 그러나 회장부인은 달랐다. 그가 사채심부름을 전주들을 보면 정말 의심 많은 냉혈한들이었다.

여대생 죽이는 일이 지체되자 회장부인은 돈을 도로 찾아오라고 조카인 김용국을 닦달 했다. 하지만 마기룡은 이미 받은 돈을 다 써 버렸다. 회장부인은 그냥 돈을 뜯길 여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정의택을 죽여야 일이 끝날 것이다. 성공하면 추가로 일 억원의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하게 정의택은 미끼를 던지는데도 덥썩 물지를 않았다. 그가 본 인간들이란 몇 푼의 돈에도 눈이 확 돌았다. 그렇다고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청년실업가 김기준으로 위장한 마기룡은 다시 며칠 후 강남구청 부근의 한 호프집에서 정의택을 만났다.

“전번에 제가 영국에서 수입한 의류는 말씀대로 2억 손해보고 동대문시장 나까마에게 처분했습니다. 앞으로는 강남 중심가에 대형매장을 인수해서 수입물품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마기룡은 예민하게 눈치를 살폈다. 정의택은 묵묵히 말을 듣고 있었다. 약간은 끌리는 눈치 같기도 했다. 오늘밤이라도 기회만 오면 끝내고 싶었다.

“사업 얘기는 그만두고 오늘 밤은 화끈하게 형님을 한 번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형님 기분도 그런데 제 단골 룸살롱이 있습니다. 물도 좋구요. 오늘저녁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마기룡은 정의택을 자극했다. 회장부인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정의택이 따라만 나서면 그날 밤 둘만 있는 골목에서 골로 보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건 다음에 합시다.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정의택이 사양했다. 이어서 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참 지난번에 나를 소개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

“정 사장님을 소개한 저희회사 담당 이사가 영국으로 출장을 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 물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마기룡이 적당히 어물거렸다.

마기룡은 살해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부산이나 일본 같은 곳으로 일단 유인해 보고 그걸 거절하면 호텔방에서 실행하기로 했다. 정의택에게는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김용국을 그의 비서로 위장해 연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마기룡은 정의택에게 다시 연락했다.

“상의드릴 일이 있으니까 아미로 호텔에서 잠시 만났으면 합니다.”

“알았어요”
정의택이 승락했다. 이십분 후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던 마기룡이 정의택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형님 호텔방을 임시사무실로 빌렸습니다. 거기서 얘기하시죠.”

“그럽시다.”
정의택은 별 생각 없이 마기룡을 따랐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구석 끝의 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동굴 같은 어둠침침한 분위기였다. 두터운 카펫은 발걸음소리를 흡수했다. 619호로 들어서자 마기룡이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 정의택씨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잠깐! 답답하니까 방문은 그냥 열어놓고 얘기합시다.”
그의 본능적인 경계행동이었다. 종합상사 직원으로 해외 곳곳을 다닌 정의택씨의 습관이었다. 개인 호텔 방은 위험이 따르는 곳이기도 했다. 정의택씨는 복도 쪽으로 시선을 두고 의자에 앉았다.

“참치 도매업자가 부산에서 함께 투자해서 사업을 하자고 제의하더라고요. 부산에 가봤더니 규모도 크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한번 바람도 쐬실 겸 부산에 가서 타당성 검토를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위장한 마기룡이 말했다.

“참치는 세계적인 보호자원이기 때문에 공급에 한계가 있어요. 지금 유행하는 참치집이 확대된다면 역시 공급에 문제점이 생기겠지요. 아니면 가격이 올라 대중성을 상실하구요. 하여튼 바람직한 아이템이 아니네요.”

정의택씨가 진단을 해 주었다. 그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오퍼상이라는 그 청년의 제안은 전부 타당성이 없는 바람 잡는 얘기들이었다. 정의택씨는 혹시 그 청년이 사기를 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소개인지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 받은 명함이외에는 그 청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의 차량 번호판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호프집에서 나와 그와 헤어진 후 우연히 그가 인근의 공중전화박스에 있는 걸 봤다.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게 이상했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면 대상을 잘못 잡았다. 그 자신은 재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속아주는 체 하고 끝내자는 마음이었다. 그때 사십대 초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곱슬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김용국이었다. 그가 비서처럼 마기룡에게 보고했다.

“오늘 약속한 김 사장님이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날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비서로 위장한 김용국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슬쩍 정의택을 살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나가 봐.”
마기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의택에게 말을 계속했다.

“참, 일본의 우동아이템을 가지고 국내에서 체인사업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주일 정도 여정으로 같이 일본에 가셔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비용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론제가 아이템을 결정할 게 아니라 형님이 투자를 결정하시면 저는 거기에도 참여하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에게 필요한 자금이 있으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죠.”
정의택씨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기룡이 그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집요했다. 순간 까닭 없이 정의택의 뇌리에 회장부인의 영상이 뇌리를 스쳐갔다.

‘혹시 그 여자가 보낸 놈들이 아닐까?’  앞에 앉은 그 청년의 만만치 않은 눈빛과 그의 순진한 어조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제안 하는걸 보면 순진한 청년인데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아니야. 소송에서 졌는데 더 이상 회장부인이 나를 괴롭힐 이유가 없어.’ 그는 스스로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오늘은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정의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기룡은 이미 정의택이 낌새를 눈치챘다고 단정했다. 두 번째 살인마저 실패하자 김용국을 통해 전해오는 회장부인의 닦달에 피가 마를 것 같았다. 살인이라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보는 눈도 많고 기회도 없었다. 짐승도 도살장에 갈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데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마기룡은 돈에 코가 꿰어 주먹노예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누구를 뒤따르라고 하면 뒤따르고 폭행하라고 하면 폭행하고 죽이라면 죽여야 하는 신세였다. 회장부인은 세 번째로 그룹의 김 감사를 죽이라고 했다. 한번은 미행하는 차 안에서 김용국이 이렇게 내뱉었다.

“지금 미행하는 김 감사가 회장이 없을 때 간부들과 짜고 회사를 통째로 들어먹으려고 한다는 거야. 어르신이 그걸 알고 펄펄 뛰는 거지.”

그 무렵 회장은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이 됐었다. 이번에는 살인의 방법을 교통사고와 독극물로 바꾸기로 계획했다. 뒤에서 차로 따라가다가 김 감사가 혼자 걸어가는 기회가 오면 그대로 밀어버리기로 했다. 목격자가 없으면 그대로 차에 싣고 가져가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접촉사고를 내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먹이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마기룡은 가명으로 SM5 렌트카를 빌렸다. 이번에는 건달 후배를 동원했다. 김 감사는 의외로 운전버릇이 거칠었다. 과속은 보통이고 미꾸라지 같이 차량들 사이를 빠져 다녔다. 따라가다가 오히려 마기룡이 교통사고로 죽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신호등에서 대기하고 있는 김 감사의 차를 건달후배가 들이받는데 성공했다. 후배는 김 감사와 다음날 지정된 자동차 수리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마기룡은 포도주스를 구입해서 주사기로 그 안에 독극물을 주입했다. 수리공장에서 그를 만나 합의하는 체 하고 안심시키며 그걸 먹게만 하면 성공하는 것이다. 다음날 오후 2시경 마기룡은 수리공장에 가서 김 감사에게 공손하게 사과했다.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다. 김 감사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마기룡은 차로 가서 미리 준비한 포도주스를 가지고 왔다. 수리 센터 직원들은 둘이 안면이 있는 사이로 알 것이다. 주스를 먹인 후 휘청거리면 병원 가는 척 하면서 자기 차로 끌고 가면 되는 것이다.

“어르신 목이라도 축이시죠.” 마기룡이 포도주스를 권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내가 장이 좋지 않아 한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차가운 포도주스는 먹지 않아요.”

또 실패였다. 마기룡은 독이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던 김용국이 돈을 돌려달라고 못살게 굴었다. 회장부인은 오히려 칠성파를 시켜 마기룡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얘기도 전해왔다. 마기룡은 사면초가였다.

 

#07
세 번의 살인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여대생 정혜경이 죽음의 대상이 됐다. 회장부인은 이제 단순한 살인지시로 끝나지 않았다. 직접 정보를 파악하고 킬러들을 더욱 압박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칠성파를 고용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 킬러 마기룡은 이번에는 총을 사용하기로 했다. 접근이 불가능하면 차안에 있다가 뒤통수에 납탄을 박아 넣는 것이다. 엽총과 공기총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엽총은 소리도 나고 파출소에 보관해야 하지만 공기총은 자유로웠다.

신형공기총은 위력이 대단했다. 판자 세 겹을 관통할 정도의 힘이었다. 특히 납탄을 두개 겹쳐서 쏘면 즉사할 위력이었다. 마기룡은 망원조준경이 달린 공기총과 리볼버, 탄창, 그리고 실탄을 샀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제 미행감시도 더 집요해 졌다. 2002년 2월 말 오후 8시경. 어둠이 내린 정의택씨 아파트 정문 앞 도로에 몇 시간 째 그랜저 한대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김용국과 마기룡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김용국의 핸드폰의 진동음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어디냐?”
회장부인이 위치를 확인하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자꾸 의심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김용국이 긴장한 표정으로 힐끗 차 주변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회장부인은 어둠 저쪽에서 그들을 보면서 핸드폰을 하는 것 같았다.잠시 후 다시 핸드폰이 떨렸다. 회장부인이었다.

“마기룡이를 잠깐 다른 데로 보내라”
회장부인은 미행을 시킬 때에는 항상 신분을 노출했다. 그러나 살인을 청부한 이후는 철저히 몸을 사렸다. 나중에 물고 늘어질 걸 철저히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지금 고모님이 근처에 온 모양인데 잠시 자리를 비켜줘”
김용국이 운전대에 앉은 마기룡에게 말했다. 회장부인의 신분을 감추다가도 이따금씩 말이 잘못 튀어 나갔다. 킬러지만 마기룡도 친구였기 때문이다. 마기룡이 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회장부인이 소리 없이 차 뒷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왜 아직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냐?”
회장부인이 김용국을 쥐어짰다. 부리는 사람을 그냥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김용국도 짜증스런 어조로 되받았다.

“처음에 큰 돈 가져갈 땐 여러 명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렇다더니 왜 너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
회장부인이 따지는 말에 김용국은 할 말이 없었다. 마기룡이 처음에 그랬었다. 그는 문득 차 뒷좌석에 있던 총이 떠올랐다.

“총도 있어요. 좌석 옆을 보세요.”
김용국은 조준경이 달린 총을 회장부인에게 가리켰다.

“아니야, 네놈들이 그동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친 거야. 여러 사람 동원한다더니 항상 보면 한명 아니면 두 명뿐이야. 이제 너희들 안 시키겠어. 너 다른 소리 말고 마기룡한테서 돈 다 도로 찾아와.” 회장부인은 그들이 돈만 받고 사기 치는 걸로 의심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김용국은 돈만 있으면 확 던져주고 돌아가고 싶었다. 회장집은 수백만원 관리비를 내는 강남의 빌라에 살면서도 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그들에게 항상 돈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하곤 했다. 더러 그 집 가정부일을 한 아내는 야박한 회장집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했었다. 회장부인이 슬쩍 덧붙였다.

“여기 경비원한테 들었는데 정혜경이가 새벽에 수영장을 간다고 하더라.”
마지막 기회를 주는 정보였다. 새벽시간은 완전범죄를 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회였다. 그날 밤 자정부터 그들은 계속 대기했다. 다음날 새벽 5시20분. 아파트는 아직 짙은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파트 3층 정혜경의 방에 불이 들어왔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정혜경이 아파트 입구로 나와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소리 없이 미행했다. 회장부인의 정보대로 정혜경은 부근의 헬스클럽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며칠간 정혜경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체크했다. 수영장에 가서 알아보니까 회원권을 끊어 새벽시간 수영반이었다. 그들은 정혜경이 한방병원을 규칙적으로 다닌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아파트 정문 앞이나 병원 근처에서 그레이스로 납치해 살해하기로 했다. 새벽시간에 혼자 아파트에서 나오는 기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 앞은 대로변이고 24시 편의점이 있었다. 목격될 위험이 다분했다. 편의점 직원이 한눈을 파는 일이초 사이에 정혜경을 납치해야 했다. 그들 두 명이 그렇게 하기는 무리였다.

마기룡은 후배건달을 동원하기로 했다. 일당을 주고 길거리에 숨었다가 정혜경을 잡아 차에 싣는 일 까지만 시키는 것이다. 정혜경이 새벽시간에 규칙적으로 혼자 나서자 일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철물점에 가서 납치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시체를 덮을 포대자루, 청테이프, 노란색 질긴 테이프, 나일론 줄등이었다. 마기룡은 살해 후 매장할 장소들도 물색했다. 청담동 정혜경의 아파트에서 나와잠실부근에서 88도로를 타고 빠지면 십 여분 내에 팔당대교주변이었다. 그 부근은 산이 깊고 한적한 곳이 많았다.

미사리 도로 끝부분에 공사장이 있었다. 공사차량이 드나들었지만 다른 차량의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드는 쳐 있지 않았다. 새벽이면 공사장에 사람이 없었다. 그 한쪽에 작은 계곡을 끼고 비스듬히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다. 차의 왕래도 없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장소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가고 있었다. 마기룡은 틈틈이 야산에 올라가 사격연습을 했다. 나무에 과녁을 만들어 쏘고 까치를 조준해 떨어뜨리기도 했다. 총알에 두꺼운 나무껍질들이 튀겨 나갔다.

그 무렵 정의택씨는 까닭 없이 불안했다. 접근금지가처분결정을 받아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마음속은 계속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경과민 같았다. 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회장부인에게 가족이 모두 너무 고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딸 혜경에게 정체불명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공포에 질린 혜경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는 딸의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형사에서 다 이긴 셈인데 회장부인이 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회장부인이 막가는 행동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혜경이는 뭐가 씌웠는지 경찰서에 가서 그 괴 전화를 조사해 달라고 하면서 신변보호요청까지 했었다. 식구들 모두 신경과민 같았다. 정의택씨도 자꾸만 주변에서 수상한 것만 보였다.

한번은 퇴근 무렵 우연히 아파트 앞 도로에 서 있는 그레이스가 신경을 자극했다. 온통 검게 한 썬팅에서 물씬 범죄냄새가 났다. 그 앞은 다단계판매 사무실이었다. 정의택은 그 사무실의 차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돌렸다. 사실 경호업체를 알아 봤었다. 일주일에 3백만원을 달라고 했다. 한달이면 천만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경찰은 사고가 터져야 개입하고 개인은 돈 없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혜경이는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혜경이는 새벽시간에 가는 수영장 회원권을 끊었다. 웅크리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느날 저녁 그는 딸 혜경이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새벽이 밤중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웬만하면 다니지 말거라”
옆에서 듣던 엄마도 끼어들었다. 걱정하는 감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 혜경아. 아침 8시로 시간을 바꾸면 엄마도 같이 수영장에 가자.”
“엄마 아빠 그렇게 하면 오전 공부시간을 그대로 낭비하게 돼요.”
혜경의 대답이었다. 순간도 아끼는 악착스런 딸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남자친구가 지어준 핸드폰의 ID는 ‘하동댁’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혜경은 ID를 갑자기 ‘초생달’로 바꾸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이름이었다. 정의택은 오전 공부 시간을 망치지 않겠다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효녀인 딸은 이틀 동안 수영장에 가는 걸 참았다.

살해되기 하루 전인 3월 5일 밤. 정의택씨는 집에서 신용카드를 초과해서 쓴 큰 아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때 혜경이 들어왔다. 혜경은 요새 대학생들 다 그렇다고 오빠를 두둔했다. 혜경은 식구들을 화합시키는 꽃이자 온기였다. 정의택씨의 마음이 풀렸다. 혜경은 방으로 가서 엄마의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그날 일을 얘기했다. 모녀지간은 조금의 비밀도 없었다. 혜경은 매일 밤 냉장고에서 마실 것들을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버릇이 있었다. 혜경은 아빠 방에 야구르트를 가지고 왔다.

정의택씨는 “그래, 알았다. 놔두고 가라”고 말했다. 그게 딸과의 사실상 마지막 대화였다. 3월 6일 새벽4시. 마기룡과 김용국 그리고 동원된 건달들을 태운 그레이스가 아파트 앞 대로변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정혜경의 방은 새벽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마기룡은 초조했다. 수영장에 가서 분명 강습일자를 확인했는데도 정혜경은 새벽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오늘도 나오지 않으면 건달들을 돌려보내고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순간 정혜경의 방에 불이 켜졌다.

“야, 불켜졌다. 모두 정신 차려.”
마기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웅크리고 졸던 건달들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 시각 정의택씨도 잠결에 “찰그락”하고 아파트 문 닫기는 소리를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듣고 녀석이 새벽에 또 나가지?’
정의택씨는 속으로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잠시 후 다시 “찰칵”하고 아파트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려갔던 혜경이 다시 올라와 우산을 가지고 나가는 것 같았다.

“새벽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죽으러 가는지도 모르고 잠에서 깬 엄마가 중얼거렸다.


#08
2002년 3월6일 새벽 5시. 어둠 속에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살인청부 대상인 여대생 정혜경의 아파트 방에 사흘 만에 불이 깜박하고 켜졌다. 오늘은 정혜경이 새벽수영을 갈 모양이었다. 그들은 벌써 3일째 밤을 꼬박 새가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용국만 빼놓고 마기룡이 동원한 세 명의 건달을 데리고 차에서 튀어 나갔다. 두 명이 아파트 문기둥 그늘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도로변에 바짝 댄 그레이스 뒤에 마기룡과 건달 한명이 긴장한 시선을 정문쪽으로 던졌다.

정혜경이 아파트 문에서 나와 몇 발자국 딛는 순간 일제히 덤벼들어 괴물의 입같이 벌어지는 차 속에 집어 던지기로 했다. 그레이스 안에서 김용국은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때 야구르트 배달 아줌마가 아파트 문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김용국은 급하게 핸드폰으로 마기룡을 불렀다.

“조심해 정문으로 누가 들어간다. 여의치 않으면 하지말자.”

“나도 봤다. 알았다.”
물러날 기색이 없는 마기룡의 어조였다. 어둠 속에서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렸다. 그때였다. 우산을 쓰고 아파트 문을 나와 걸어가는 여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깨에는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정혜경이었다. 기둥 뒤에 숨어있던 건달들이 나와 뒤에서 접근했다. 마기룡이 반대방향에서 정혜경 쪽으로 다가갔다.

정혜경이 그레이스 옆을 스치는 순간 네 명의 남자가 달려들었다. 차안에 있던 김용국이 번개같이 차문을 활짝 열면서 정혜경을 잡아끌었다. 정혜경이 “흑”하고 놀라면서도 소리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명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김용국은 재빨리 운전석으로 넘어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정혜경이 머리채를 잡은 마기룡에게 다급하게 사정했다.

“아저씨 10억 줄 테니까 나 그냥 놔줘요.”
마기룡은 정혜경을 바닥에 엎어뜨려 무릎으로 등을 누르고 팔을 뒤로 꺽은 채 나일론 줄로 팔목을 묶기 시작했다.

“돈 요구 하는 대로 줄께요. 우리 아버지 부자예요”
정혜경이 다시 애원했다. 마기룡이 청 테이프를 찢어 입에 부였다. 조용해 졌다. 동원한 건달들은 현장에서 돌아가고 그레이스는 어느새 코엑스 사거리를 지나 잠실운동장 쪽으로 가다 정지신호에 걸렸다. 김용국이 백밀러를 통해 뒤를 봤다. 마기룡이 정혜경에게 포대자루를 뒤집어씌우는 중이었다. 어느새 온몸에는 노란 질긴 테이프가 감겨져 있었다.

이른 새벽 88도로는 한적했다. 미사리 까페길을 지나 검단산 입구 공사장 안쪽에 도착하는데 이십분도 안 걸렸다. 왼쪽으로 북한강줄기가 번들거리며 흘러갔다. 산을 파헤친 흙바닥 여기저기에 판넬들이 야적된 채 있었다. 마기룡이 차에서 내려 정혜경이 든 포대자루를 끌어내얼른 어깨에 들춰 멨다.

“야 총가지고 따라와”
그가 김용국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잡목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벽등산객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사람을 들고 산길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마기룡이 뒤뚱거리며 백미터쯤 가자 더 이상 못가겠는지 정혜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좀 쉬었다 교대하자.”
마기룡이 헐떡이며 내뱉었다. 거뭇한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마기룡의 이마가 땀으로 번질거렸다. 포대자루속의 정혜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 다리가 후들거려서 못하겠어.”
김용국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쉰 마기룡은 다시 정혜경을 들춰 멨다. 다시 오십미터쯤 가다가 마기룡은 땅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지진 표정으로 말했다.

“차 안에서 너무 힘을 뺏는지 도저히 못 올라가겠어. 총 줘”
마기룡은 건네받은 총의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켰다. 자루 속의 정혜경의 얼굴이 하늘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기룡은 총구를 정혜경의 귀 뒷부분 쪽에 갖다 댔다. “퍽”하고 총알이 나가는 둔탁음이 났다. 포대자루가 순간 펄쩍 뛰어올랐다. 마기룡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탄창에 든 6발을 그렇게 한발 한발 정확히 머리에 대고 확인사살을 했다. 그들은 주위의 낙엽을 긁어 정혜경이 든 포대자루를 덮었다.

한 시간 후 그들이 탄 그레이스는 인천 쪽을 향해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기룡은 차 안에 두었던 정혜경의 가방과 외투 그리고 우산을 검은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잠시 후 그들은 길거리에 보이는 세차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썬팅을 벗기고 내부세차를 부탁한 후 근처의 된장찌개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마기룡은 들고 나온 쓰레기 봉투를 음식점 근처의 골목에 버렸다. 증거인멸까지 모든 게 끝이 났다.

오전 9시. 공중전화에서 김용국이 회장부인에게 연락했다.
“물건을 팔았습니다.” 살인에 성공했다는 그들 사이의 암호였다.
“알았다. 다시 통화하자” 회장부인이 박아둔 정보원을 통해 직접 확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 30분후 회장부인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물어보니까 정혜경이를 봤다고 하던데?” 회장부인은 의심하는 어조였다.
“정말 죽였다니까요. 나 참” 김용국이 버럭 화를 내면서 되쏘았다.
“하여튼 내가 더 확인해 본 후에 믿겠다.” 회장부인은 아직도 믿지 않았다.

그날 낮12시. 정의택씨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점심 밖에서 같이 먹읍시다.”
“알았어요. 그럼 혜경이도 같이 먹어야 겠네”
혜경이가 고시공부하는 독서실은 아빠사무실과 집 사이에 있었다. 시간을 아낀다고 집 근처의 독서실을 잡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잠시 후 아내가 정의택씨에게 전화했다.

“이상하네. 혜경이가 올 시간인데 안 오네”
혜경이의 행동은 늘 시계바늘처럼 정확했다.

“오늘 데이트약속인데 바로 거기로 가나보지”
정의택씨는 남자친구와 오후 1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는 딸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딸은 사생활도 아빠엄마에게 말했었다. 오후2시경. 혜경이가약속시간에 나오지를 않는다고 남자친구가 집에 연락했다. 정의택씨는 갑자기 불안했다. 그럴 딸이 아니었다. 정의택씨는 바로 딸이 아침에 갔을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강습회원명부에 혜경의 싸인이 없었다. 새벽에 분명히 나갔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독서실로 달려갔다. 거기서도 혜경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먼저 뺑소니사고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뇌리에는 회장부인의 잔혹한 표정이 겹쳐서 다가오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경찰서를 찾아가 뺑소니 아니면 납치라고 하면서 빨리 수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파트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으면 운전자가 혜경이를 싣고 도주할 길은 올림픽대로를 따라 미사리부근으로 가는 길 뿐이었다. 사고가 틀림없었다.

“우리 아이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수사를 좀 해주세요. 미사리 부근 산을 뒤지면 살 지도 몰라요”
아버지의 절규였다. 그러나 형사들은 근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 날 밤 혜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정의택씨는 딸의 새벽길을 구역별로 담당하는 청소부도 만나고 길거리의 오뎅 장사도 찾아 딸을 물었다. 모두들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고위경찰직에 있는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단순실종신고는 수사할 사항이 아니라는게 관할 경찰서의 의견이었다.

온 가족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꺼 놓는 때가 많지만 어쩌면 경비실의 CCTV에 혜경의 모습이 잡혔을지도 몰랐다. 천만다행으로 3월6일 새벽의 녹화장면이 있었다. 치직 거리는 흑백의 모니터 구석에 우산을 쓴 혜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그 뒤로 두 명의 남자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잠시 후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얗게 터지면서 급발진하는 차가 보였다. 분명 회장부인의 짓이었다. 정의택씨는 접근금지가처분 기록들과 CCTV필름을 경찰서에 가서 보이며 울부짖었다.

그 며칠 후 회장부인은 판사 사위로부터 혜경의 실종소식과 함께 경찰에서는 자기를 의심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위의 말에 회장부인은 비로서 정혜경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김용국과 마기룡이 혹시 혜경이를 어디 숨겨놓고거짓말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었다. 잔금을 줘야 했다.

2002년3월10일 울산고속버스터미널 부근의 중국음식점. 허름한 차림으로 변장한 채 혼자 내려온 회장부인이 앞에 앉은 김용국에게 다짐하듯 주의를 주었다.

“혹시라도 아직 죽이지 않고 데리고 있다면 꼭 죽여야 한다. 그년은 요부고 영악하니까 살려뒀다가는 너와 마기룡이 다 그 잔꾀에 넘어가 당하게 된단 말이다. 팔아먹기 위해 데리고 있거나 장난치면 절대 안돼.”
회장부인은 현찰이 든 쇼핑빽을 건네주었다. 김용국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삼천만원정도 있었다.

“아니 나머지 잔금을 다 주셔야지 이거 밖에 안주십니까?”
김용국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쳤다.

“당장 현찰을 많이 뺄 수가 없어서 그래. 기다려.”
며칠 후 다시 회장부인은 현찰을 만들어 건네면서 물었다.

“정말 죽인 게 맞냐?”
“맞다니까요”
“그러면 시체가 빨리 발견되는 게 좋으냐 아니면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좋으냐?”
혐의를 받고 있는 회장부인의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김용국이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3월 16일 오전 8시 30분경. 검단산을 올라가던 등산객에 의해 정혜경의 시체가 발견됐다. 여대생살인사건이 오후부터 대대적으로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09
2004년 1월 26일 오후2시.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밖은 영하 10도를 밑도는 한파가 몰아쳤다. 살해된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초췌한 얼굴로 증언석에 앉았다. 그 대각선 방향에 살인교사를 한 회장부인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앞을 응시했다. 그 옆으로 살인범인 김용국과 마기룡이 고개를 숙인 채 면도날 같은 신경줄을 펴고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다. 재판장이 신문 전에 먼저 위로의 말을 전했다.

“딸을 불시에 잃으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힘드시더라도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정의택씨의 지치고 쉰 목소리였다. 검사가 묻기 시작했다.

“회장부인이 전문중매를 통해 판사사위를 맞아들이고 그 부모에게 7억원을 줬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그러다가 사위가 바람이 났다고 하자 회장부인인 저 여자는 3억원을 돌려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해서 도로 가지고 갔습니다. 판사사위가 제 조카지만 더러운 매매혼에 팔려갔습니다.” 법대위 판사들의 얼굴에 순간 모멸감이 스쳐갔다. 검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계좌추적을 해 보니까 돌려받은 그 3억원으로 미행과 살인청부자금으로 한 것 같던데”
그때였다. “잠깐만요!”하고 손을 들면서 회장부인이 검사의 말을 잘랐다. 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여자였다.

“뭐죠?”
재판장의 표정에 얼핏 불쾌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저 사람 말 다 거짓말이예요. 어이가 없어서 말이지. 제 딸이 혼처가 세 군데나 나왔어요. 그 중에 지금 사위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쉬한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시켰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줬다고 합니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어떻게 한 번 준 돈을 찾아올 수 있겠어요? 상식적으로 안 그렇습니까?”
회장부인이 앙칼지게 내뱉었다. 정의택이 맞받아쳤다.

“그러면 돈을 받은 판사 부모를 불러서 물으면 되겠네요?”
그때 회장부인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거들었다.

“이보세요 증인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매매혼이라고 단정을 하시는 거죠? 회장부인이 돈을 준 적이 없다고 하잖아요?” 정의택씨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었다.

“저는 부모로부터 분명히 직접 들었습니다. 더러운 돈으로 판사사위를 끌어 들이는 게 매매혼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어째서 매매혼입니까?” 회장부인의 변호사가 다시 다그쳤다.

“내 관점에서는 더러운 매매혼입니다. 변호사님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말이죠. 각자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관점에 따라 평가는 자유롭게 할 수 있죠. 그걸 자기 잣대와 다르다고 비판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느냐 얼마나 있느냐로 가치를 평가했다. 자격증과 졸업장으로 포장만 잘되 있으면 명품인 세상이다. 그 무렵 나는 법조원로들의 한 모임에 참석했었다.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의 얘기가 잠시 화제로 떠올랐다. 사석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의견이 터져 나왔다.

“그 사건 말이지 일심에서는 잘못 선고한 것 같아. 사형을 선고하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 정도로 내렸어야 하는데 일심 재판장이 징역20년으로 너무 인심을 써 버렸어. 항소심재판장이 입장이 곤란할꺼야” 수많은 사건을 재판한 경험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참석한 전직원로판사들의 의견이 대동소이했다.

“그 사위가 됐다는 판사가 사표 쓰고 나갔지?” 좌장격인 원로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나가지 않고 버틴답니다. 얼마나 힘들게 얻은 판사자린데 나가냐면서 지방으로 가서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하기야 자기가 법적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법관징계위원회에서 내보낼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사법부를 위해서는 본인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나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은 공통적으로 법관사회에 누를 끼친 젊은 판사를 탓하고 있었다. 그가 쓴 판결문은 신뢰받기 힘든 것이다.

“참 요새 사법연수원생들이 전문 중매쟁이에게 팔려가는 수가 많다는데 정말 그래요?”
참석했던 한 검사장출신이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전임 사법연수원장에게 쏠렸다.

“연수원에서 주는 박봉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카드 빚들이 삼사천만원씩 되는 연수생들이 많더라구요. 그렇지만 국가입장에서 보면 천명에게 한달에 사무관급 본봉의 월급을 주니까 엄청난 예산이죠. 내가 사법연수원장 때 보니까 카드 빚을 진 연수생들의 마음은 그 빚만 누가 대신 갚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죠. 너무 나쁘게 생각마세요.”
예나 지금이나 그런 매매혼의 악습은 있었다. 딸 가진 부자집들 계산에서는 많은 법률비용을 들이는 것 보다 사위를 법조인으로 들이는 게 주판알을 튕기면 더 이익일 수 있었다. 그래서 전문자격증을 가진 신랑감들이 고가에 매매되는 현실이다.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거물급 전문 중매쟁이들이 은밀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혼사를 성립시키기도 방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여대생 살해사건에서도 한쪽에서 중매료를 내지 않자 괴 전화가 왔었다. 판사사위의 과거를 폭로하는 내용이었고 그것은 바로 청부살인으로 이어졌다. 그 거물급 중매쟁이의 별명은 ‘덕산 할매’였다. 덕산 할매는 수사기록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사건의 배경을 알고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덕산할매의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락처도 주소도 없었다. 덕산 할매를 안다는 그 업계의 거물을 대신 한사람 만났다. 간신히 만난 그 중매꾼은 명문여고를 나온 금년 62세의 부인이었다.

“덕산 할매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격이 뱀같이 차고 깐깐한 할매예요. 그 아래 여러 명의 남자들을 고용해서 사법연수원생들을 포섭하고 그 할매는 부잣집들의 사위주문을 받고 다녀요.”

그녀의 설명이 계속됐다.

“우리 중매꾼의 세계도 판사전문, 의사전문같이 분야별로 또 나뉘어지죠. 판사전문도 다시 사법연수생포섭담당과 부잣집담당으로 나뉘어지죠. 사법연수생담당은 인원명단과 성적까지 입수해서 연수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해요. 술도 사주고 용돈도 주면서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거죠. 사법연수원시절이라는 게 힘들 때잖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예쁜 여자 소개해 줄 테니까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슬쩍 말을 던지는 거죠. 그러겠다고 하면 연수원생 담당 중매꾼이 부잣집 딸 담당 중매꾼에게 연락을 해요. 그 쪽은 혼기에 찬 부잣집 딸들을 빠삭하게 꿰고 있거든요. 이런 전문 중매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조직으로 해요.”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얻나요?”

“그거야 한집만 알아도 아름 아름으로 금세 훤하게 되죠.”

“판사사위를 데려오면 몸값은 어떻게 내죠?”

“얼마 전 대구의 한 사업가 집안에서 판사사위를 맞아 들였는데 예단 외에 서울에 45평짜리 타워 팰리스를 사주고 현찰 2억원을 판사사위부모에게 줬어요.”

“현찰 2억원을 사위 부모에게 주는 건 무슨 뜻인가요?”

“그동안 공부시킨 값이죠.”
그 중매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가 계속했다.

“저는 판사가 아니라 의사 전문이예요. 서울대를 나온 의사를 사위로 맞아들이는데 10억원은 있어야 해요. 병원을 차려줘야죠. 하여튼 그럴듯한 사위를 들이려면 빌딩을 준다 돈을 준다 해야 돼요. 겉으로는 모두들 부정을 하지만 중매꾼인 내가 본 현실은 겉이 번지르르하고 점잖은 척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욕심이 많고 은근히 돈을 바란다니까요.”

아들을 가진 부모가 먼저 자식을 상품화한다는 얘기였다.

“중개료는 어떻습니까?”
이 살인사건의 동기가 된 부분이었다.

“여자 측에서 남자 집에 가는 총 액수의 십퍼센트를 받아요. 그걸 받아서 중매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죠. 중매가 되지 않는 경우에도 얼굴만 한번 보는데 30만원을 받게 돼 있어요. 그 덕산할매는 판사후보 남자 한명을 아침에 호텔 커피숍에 오게 하면 하루에 여자를 세 명도 보이고 네 명도 보이고 그렇게 했어요. 그것만 해도 간단히 하루 일당이 100만원이 넘게 떨어지는 거죠.

중매가 안돼도 서로 만나게 하는 횟수만 늘이면 수입이 짭짤해요. 남자 하나가 괜찮으면 수백명을 보일 수 있고 모두 아낌없이 돈을 내요. 한번은 부모끼리 상견례를 하면서 남자부모가 여자부모에게 우리 아들이 좋은거냐 판사가 좋은 거냐하고 묻는 것도 봤어요. 그걸 경험하고 시집간 여자들은 자기가 애를 낳으면 더러워서라도 판검사나 의사를 만들어야겠다고 그래요.”

“만약 중매료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법적으로 인정되는 돈이 아니었다.

“중매꾼들이 가만히 있지 않죠. 남자한테 동거하는 여자가 있다고 모략도 하고 어떻게 든 방법을 안 가리고 갈라놔요,”

“여대생 살해사건의 판사부모가 중매료를 내지 않았다던데?”
내가 마지막으로 핵심부분을 물었다.

“덕산 할매도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닌데 안받고 가만있을 사람은 아니죠.”

“이번에 범인들이 중국에서 잡혀온 그 여대생 살해사건 아시죠? 덕산 할매가 회장부인에게 중매했다던데--”

“그럼요 중매쟁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데요. 소문으로는 회장부인도 나쁘고 덕산 할매도 나쁘다고 그래요.”

“그 덕산 할매에 대해 더 해 줄 말씀 없어요?”

“나이는 칠십이 넘었는데 빼빼하고 얼굴이 얄팍해요. 더 이상은 몰라요”
껍데기 수재들 중에는 새싹 때부터 그렇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우는 경우가 많았다.

#10

재판은 계속됐다. 회장부인은 여대생살인청부를 부인했다.차 안에서 은밀히 둘만 얘기해서 증거도 없었다. 돈도 살인자금이 아니라 조카인 김용국을 도와준 돈이라고 했다. 미행하다가 실수로 여대생을 죽이고는 회장부인을 물고 늘어진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가 살해의 동기라는 검찰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회장부인 공판담당인 민 변호사가 물었다.

“남편의 외도사실이 없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사랑이 돈독한 사업가 이십니다.”

“사건이 터진 직후 김용국이 찾아와서 협박한 적이 있지요?”

“네, 애들이 실수해서 사고가 났지만 고모가 미행시킨 거니까 돈을 달라고 협박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재판에서 불리할 거라면서.”

“그래서 돈을 주셨읍니까?”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집에 보관하던 현찰을 주었는데 액수도 기억이 안 나네요.”

“이상한 전화가 오고 나서 확인하기 위해 미행은 시켰지만 죽은 정혜경과는 어떤 감정도 원한도 없는 사이시죠?”

“그렇습니다. 사돈 집 처녀됩니다.”

“옆에 있는 조카 김용국은 어려서부터 어땠습니까?”

“학교 때부터운동도 하고 좀 껄렁껄렁했어요.”

“고모가 누구를 죽이라고 할 때 말을 들을 사람인가요?”

“상식적으로 그런 살해지시를 할 고모도 없고 그걸 들을 조카가 있겠어요? 있었다면 미친 사람이죠.”

“이 사건으로 집안이 어떤 피해를 입었나요?”

“제가 딸한테는 평생 죄인이 됐습니다. 엄마가 구속돼 있는 걸 알면 그 시부모나 남편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요? 우리 딸 정말 순수합니다.”

그녀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정혜경양 아버지가 저를 고소했었어요.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을 때 혜경이를 만났는데 우리 사위가 사귀는 여자는 자기가 아니고 박미리라는 거예요. 또 정혜경양 아버지가 쓴 접근금지가처분신청서의 내용을 보면 우리사위와 그 박미리라는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나 리얼하게 써놨는지 얼굴까지 붉어 지더라구요. 어찌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신청서가 아니라 3류 소설을 써 놨어요.”

“이 사건에 대해 소감이 어떠십니까?”

“친조카인 김용국이 친고모인 제가 범행을 사주했다고 책임전가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와 허탈감을 느낍니다.”
진짜 같아 보였다. 다음은 김용국의 변호사인 내 차례였다.

“김용국 피고인!지금 회장부인이자 고모인 김귀숙 피고인이 하는 말씀을 옆에서 잘 들었죠?”

“그렇습니다.”
그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으면서 대답했다. 검은 뿔 테 안경 뒤로 보이는 작은 눈이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 피고인이 진정으로 속죄하는 방법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겁니다.”

그때 내 시선이 방청석 끝에 혼자 앉아있는 죽은 혜경의 아버지 정의택씨에게로 갔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지금 방청석 뒤에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계시는데 어떻게 하는 게 그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생각하시죠?”

“진실하게 얘기하고 법대로 처벌받겠습니다.”
정의택씨는딸이 죽었어도 진실하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평소 옆에 있는 김귀숙 피고인을 어떻게 생각했었죠?”

“재산도 많고 자식들 학벌도 좋고 판사가 사위라 우리 집안의 중심인물로 모시는 고모님이셨습니다. 부모같이 존경하고 항상 우러러보면서 순종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내가 물었다. 실망하고 분노해야 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그때 옆에 있던 회장부인이 독 오른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니?”라며 내쏘았다. 김용국이 주눅이 든 채고개를 푹 숙였다.

“십 오년 전 결혼식 때 고모가 왔었어요?”

“그때 바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조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면 정이 흐르는 사이는 아니다.

“미행이나 살인에 관여하기 전에 십 오년 간 고모님으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어요?”

“전혀 그런 적 없습니다.”

“옆에 있는 고모님은 준 돈이 살인자금이 아니라 김용국씨 집을 사는데 도와준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나요?”

“단 한 푼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집 사는데 돈을 도와줄 고모님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죠.”
주눅 들었던 그가 애써 반항하는 어조였다.

“김용국씨는누가 돈을 대서 일심변호사를 선임해 줬죠?”
사무실을 찾아온 그의 처는 회장부인이 댔다고 했다.

“모릅니다”
김용국이 갑자기 또 말을 흐렸다. 그는 분명치 않았다.

“고모로부터 여대생 정혜경을 없애줄 사람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건 분명합니까? 옆에 있는 고모는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회장부인인 김귀숙이 순간 고개를 돌려 김용국을 노려보았다. 김용국이 그 눈길을 외면하면서 대답했다.

“전 분명히 그런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낯도 모르는 여자에게 그런 일을 하겠어요?”
그의 옆에서 마기룡이 뭔가 심각히 저울질 하는 표정이었다.

“옆의 마기룡은 돈이 아니면 그 여대생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죠?”
순수한 살인청부라는 의미였다.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잡혀와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을 때 복도에서 친척을 만난 적이 있죠?”

“-----!!------”
순간 김용국이 또 당황했다. 내게 말했어도 공개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걸 숨기면 진실이 아니었다. 재판장과 방청석의 눈길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왜 대답을 하지 않죠?”

“그,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완연히 흔들렸다. 옆에 있던 회장부인이 핏빛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데요?”

내가 물었다.

“손을 뒤집어 보였어요. 그건 고모의 진술에 맞추어 주라는 싸인 이었어요.”
갑자기 회장부인의 악쓰는 소리가 법정 안을 울려 퍼졌다.

“재판장님 이게 고모를 존경한다는 놈이 하는 소립니까?”
그녀는 거의 발광 직전까지 이르렀다.

잠시 후 여대생을 사살한 마기룡의 국선변호사 권성희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갈색정장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피고인 마기룡은 어떻게 용의자가 되어 추적을 받았죠?”
권변호사가 묻기 시작했다.

“죽은 혜경양의 아버지에게 주었던 명함이 단서가 되서----”
동정을 구하는 듯한 낮고 힘 빠진 목소리였다.

“살인청부를 받은 대상인 여대생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회장 집 사위 김 판사가 과외지도를 했던 여학생인데 한 때 둘이서 연애를 했다가 김판사가 고시에 합격하고 부잣집에 장가를 들자 원한을 품고 김판사의 가정을 깨고 자기와 다시 결혼하려고 하는 나쁜 여자라고 김용국이가 말했었습니다.”

“정말 그런 여자였나요?”
권변호사가 물었다.

“죽이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까 김판사와 정혜경은 이종사촌간이라 연애할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알았더라면 당장 혐의가 올 이 사건을 맡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살인을 청부받은 겁니까?”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얼마나 돈을 주면되느냐고 묻는 바람에 진담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심코 2억원을 불러봤는데 계약이 성사되는 바람에 현실이 됐습니다.”

“돈을 받은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사실 착수금을 받은 그날부터 거의 개인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24시간 스탠바이상태에서 새벽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김용국이 지시에 따라 미행하라면 하고 누구에게 린치를 가하라면 즉각 그걸 이행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성과는 없자 김용국이는 매일같이 고모인 회장부인에게 야단맞는 눈치였습니다. 받은 돈을 다 써버려 그만두지도 못하고 정말 괴로웠습니다. 한번은 연락을 끊고 도망을 했는데 용국이가 핸드폰 메시지로 네가 안나타나면 어르신이 칠성파를 동원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고 했어요.”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누구죠?”
권변호사가 물었다.

“김용국이는 고모인 회장부인을 어르신이라고 했어요. 회장부인에게 여섯달 동안 지독히 시달려서 납치하자마자 삼십분만에 바로 죽여 버렸습니다.”

“살인 후 심정이 어땠어요?”

“이런 소리 하는 거 어떤 가 모르겠는데 도망을 다닐 때 하루 밤에는 꿈에 제가 죽인 정혜경이 나타났습니다. 열 살 정도 소녀의 모습으로 드레스를 입고춥다고하면서 저를 따라 왔어요. 언제나 불안하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일심에서 변호사가 있었어요?”

“회장부인이 보내준 사선변호사가 있는데 뭐라고 부탁 말을 하는데 내가 거절했습니다.”
사채시장에서 활동하던 살인범 마기룡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재판은 사기극일 수 있었다. 변호사들은 출연료를 받은 조역배우로 전락할 위험성도 많았다. 거액이 오가면 아예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들 간 재 타협이 되면 나와 국선 변호사는 퇴장 할 운명이었다.

#11
공판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치 그들의 거짓말 대회를 보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김용국의 처 가 따라왔다.

“남편이 진실하지 못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 했어요”
긴장한 얼굴이었다.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을 보면 맑은 샘물을 본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남편 김용국이 어떤 부분은 의도적으로 숨기는 걸 느끼고 있었다. 재판장도 계산된 정직성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오늘 방청 온 회장 측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내가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연극 같은 법정보다 그 뒷 무대가 그들의 저의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회장님이 부리는 사람들이 전부 출동했어요. 법정 내려오는 계단에서 회장님을 만났는데 저보고 ‘좋은 변호사 구했구만 잘 해봐’하고 빈정 대시더라구요. 회장님이 뒤에서 전체를 지휘하고 계시는데 친척들 말이 로펌에 거액을 줬다고 하더라구요. 자기들은 무죄로 빠져 나간대요. 로펌의 높은 변호사들이 뒤에서 검찰과 법원 고위층까지 움직일 거래요.”

요즈음 로펌은 고위직에 있던 법조인을 영입하기도 했다.

“남편 김용국씨를 위해 증언해 줄 친구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회장부인이 지난번 너무 나쁘게 말했다. 그걸 희석시켜줄 어렸을 적 친구가 필요했다.

“남편이나 마기룡을 다 아는 고등학교 동창 한 분이 보일러기사로 있어요.그렇지만 여기 올 시간은 없을텐데.”

“그럼 내일 같이 가 봅시다.”
나는 움직이기로 했다. 발로 뛰어야 한 사람의 얘기라도 더 들을 수 있다. 그들의 고교시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인천 쪽으로 가는 오후의 지하철은 붐볐다. 나는 흔들리는 차 안에서 김용국의 처에게 물어 보았다.

“회장부인과 싸운 적이 있어요?”
수사기록 중에 간단히 그런 내용이 있었다.

“남편이 잡혀 오기 전이었어요. 회장부인인 고모님이 울산의 분식점 앞에서 저를 보자고 했어요. 어떻게나 치밀한 여잔지 고모는 그때도 기록이 남는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자기 차도 타지 않고 버스로 다녔어요. 분식점 앞에 대놓은 빌린 친척차 안에서 만나자고 해서 그 차 안으로 들어갔죠. 모자를 쓰고 커다란 썬글래스를 쓰고 있더라구요.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거예요. 차안에 들어가 인사를 했는데도 도무지 말을 안 해요. 녹음이라도 할까봐 그랬나 봐요. 그때 저는 정말 화가 났어요. 남편이 베트남까지 도망을 갔는데 고모인 회장부인은 뭔가 설명이 없는 거예요. 전 그 치밀한 성격을 알기 때문에 멍청한 남편이 이용당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 집 파출부를 좀 해봐서 인간성을 알아요. 제가 막 따졌죠. 이렇게 된 판에 이젠 고모라던가 회장부인이 저하고 무슨 상관이예요? 제가 남편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어요. 진실이 뭐냐구요? 그랬더니 고모가 자기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 말에 제가 모를 리가 있느냐 뒤에서 다 시켜놓고 같이 일한 걸 아는데 그렇다면 어디 경찰서에 가서 진실을 같이 따져보자고 덤볐죠. 말하는 도중에 고모가 나보고 도대체 조카며느리라는 게 어디 이따위 버릇이 있느냐고 뺨을 한대 갈기더라구요. 저도 그동안 쌓였던 게 폭발해서 같이 덤벼 들었어요”

어느새 차창 밖으로 부천역이란 간판이 보였다.

“그 다음은 어땠어요?”
회장부인은 김용국의 처가 산통을 깨지 않을까 걱정을 했을 것이다.

“며칠 후에 시누남편을 통해 연락이 왔어요. 제 남편이 총대를 메주면 50억원을 주겠다는 거예요. 회장이 시누남편에게 그렇게 얘기했대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 했어요”

“나이 많으신 고모님이 죄 값을 받으시고 젊은 조카인 우리남편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면서 거절했어요.”

“그 돈을 받고 싶은 유혹이 없었어요?”
내가 놀라면서 물었다. 거절하기 힘든 금액이다.

“회장부부는 철저하게 남 줄 돈 안주고 해서 부자 된 사람인걸 제가 압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또 속아보세요. 평생 얼마나 한이 남겠어요? ” 그녀는 회장부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참 변호사님”
그녀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죽은 정혜경이 머리에 총을 여섯 발 맞고 죽었잖아요?”

“그랬죠”
난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총을 여러 발 쏜 건 원한의 표현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처음에 회장부인이 쏜 걸로 알았어요.”
일리가 있었다. 마기룡은 프로가 아닌 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침착하게 죽이기가 힘든 것이다.

“사위여자관계를 폭로한 처음의 그 전화는 어디서 온거죠?”
내가 물었다. 괴 전화를 한 사람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사귀던 여자 아니면 중매쟁이라고 해요.”
“그 외 이 사건에 대해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들이 흘려버린 한조각의 진실이라도 발견해 내고 싶었다.

“한참 나중에야 이해한 사실이 있어요. 회장부인이 남편과 통화를 하는데 그게 맞냐? 확실하냐? 그런 소리들을 자주 하는 걸 옆에서 들었어요. 전 그때 그 소리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죠.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건 독극물 얘기인 것 같았어요. 살인교사가 틀림없어요.”

지하철이 어느새 중동역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었다.

김용국의 친구가 보일러 일을 한다는 역 근처의 허름한 빌딩은 한산했다. 3층의 제약회사 빈 사무실에서김용국 마기룡의 고교동창이라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용국이나 기룡이는 다 고향친구고 동창이죠. 용국이 하곤 어려서부터 불알친군데 그렇게 죄를 질 독한 애는 아닌데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마음이 넉넉한 편이었어요. 동창들 모두 뉴스를 보고 놀랐죠.”
그의 표정과 말에서 진실이 느껴졌다.

“김용국은 학교 때 껄렁껄렁하고 싸움을 잘했다면서요?”
고모인 회장부인은 법정에서 그렇게 몰아쳤다. 살인을 할 수 있는 성질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용국이 원래 싸움 못해요. 전혀 그런 소질이 없다니까요.”

“그럼 마기룡이는요?”

“기룡이는 덩치도 좋고 싸움도 잘하는 편이었죠.”

“김용국을 근래에 만나 무슨 얘기를 나준 적이 없어요?”

“글쎄요 한번은 와서 자기가 미행을 하는데 같이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근무 중인 사람이 어떻게 가느냐면서 안된다고 했죠. 아마 또 다른 친구가 미행할 때 몇 번 따라갔을 거예요. 뭐라더라? 돈 받을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마기룡은 어떤 사람이죠?”
난 그의 성격도 자연스럽게 알고 싶었다.

“2002년 2월인가 동창회에서 본 일이 있어요. 기룡이가 잠깐 있더니 일이 있어 가야한다고 그랬던 게 기억이 나네요. 저보다는 용국이가 기룡이하고 더 친한데서로 아웅다웅하기도 했어요. 서로 어음을 빌려주기도 한 사이고요. 그런데 기룡이는 사채일을 하면서는친구들을 잘 만나지 않았어요.”

“마기룡씨 성품은 어때요?”

“글쎄요 용국이 보다는 좀 사기성이 있다고 할까? 순진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허풍이 엄청 세요. 항상 말이 일이백만원이 아니라 몇 억 몇 십억 해요. 보일러공하는 나하고는 차원이 다르니까 기가 죽어요. 말이 안 통하는 거죠.”

“마기룡씨는 무슨 일을 한다고 합디까?”

“어디 가서 빚 받아내는 게 전문이래요. 그것도 용국이가 전한 말이지 기룡이는 자기가뭘 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평소 선한 사람은 그런 일 못하잖아요? ”

“두 사람 성격을 비교한다면 어때요?”

“글쎄요 마기룡이는 책임을 전가하는 성격은 아니예요. 자잘한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김용국일 겁니다.”
그가 옆에 있는 김용국의 처를 보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처는 아무 말 없었다. 긍정하는 표정이었다.

삼십분 후. 나와 김용국의 처는 역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남편이 착한 성격이라고 친구가 그러는데 왜 이 사건에 말려 들었을까요?”

내가 물었다.

“회장부인인 고모가 남편에게 자기말만 잘 들으면 뭔가 해 줄 것처럼 남편을 꾀었을 거예요. 순진한 남편이 그 말을 믿고 한 면도 있을 거구요. 그렇지만 전 돈 한 푼 받아본 적 없습니다. 지금 생활비도 제가 파출부일을 하면서 법니다.”

그녀는 내가 돈에 대해 의심할까봐 미리 막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회장부인이 무기징역이라도 받으면 가장 좋은 사람이 첩일 거예요. 지금 애가 학교 갈 때가 됐는데 정식으로 그 집 사모님이 될 위치니까요. 그런 면에서 회장부인 김귀숙도 알고 보면 불쌍한 여자예요. 사랑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니까.”

그 말에 난 문득 짚이는게 있었다. 회장의 변호방향이었다. 재판장은 이미 노골적으로 유죄의 심증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펌의 변호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회장측은 김용국 부부와 마기룡 그리고 심지어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 까지 오히려 자극하고 있었다. 정의택과 김용국의 처가 다음증인으로 결정되었다.


#12
2004년 1월 29일 오후2시 40분. 창문하나 없는 법정 안은 묵지룩하고 불쾌한 기운이 흘렀다. 미리 법정에 온 나는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붉은 얼굴의 회장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으로 회장부인의 자매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명이 나와 눈길이 부딪치자 입을 삐죽거리고 흰눈을 치켜 올렸다.나는 내가 발견한 진실을 글로 적어 재판부에 제출했다. 검사역시 그가 알아낸 진실을 법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판사들은 그 싸움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회장부인과 내 의뢰인인 김용국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난 회장 측에서 돈으로 입을 막으려는 그 사실자체도 글을 통해 폭로했다.

회장은 재판이 끝나면 나를 고소하겠다고 김용국의 처를 통해 협박해 왔다. 청부살인도 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이왕 나선 김에 김용국의 처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 이차로 공개적으로 확실히 할 계획이었다.

방청석 반대편에 그들이 죽인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이 고개를 떨 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피해자인데도 방청석의 대다수인 회장 측 사람들은 자기네를 피해자로 착각하고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이제 재판시작 5분전이었다. 무료한 듯 서기가 책상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른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속기사가 모니터를 보면서 공상에 잠겨 있었다.

법정 벽 위에 매미같이 달라붙은 시계의 바늘이 정확히 세시를 가리켰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법정으로 등장했다. 벽 쪽의 문이 열리면서 회장부인의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절룩거리면서 나오는 그녀는세상의 고통을 혼자 다 진 표정이었다. 그 뒤를 따라 구깃한재소자복을 입은 김용국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 역시 입이 잔뜩 부어있었다. 바로 뒤에 마기룡이 붙어있었다.

마기룡은 허리를 낮추고 본능적으로 주위의 공기를 살폈다.

이윽고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증인석에 올라와 앉았다. 정말 치밀한 공작을 하려면 회장은 설사 살인교사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설득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대였다.회장부인의 공판담당 변호사가 일어나 정의택에게 물었다.

“증인은 진실을 밝혀 죽은 딸의 영혼을 밝힌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돈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해서 이 사건의 일심판결이 나기도 전에 회장부인을 상대로 24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전 재산을 압류했죠?” 변호사는 정의택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죽은 딸이 발견됐을 당시 범인들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그런 상태에서는 회장부인을 살인죄로 걸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전 독자적으로 살인을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검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민사로라도 진실규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그런 목적인데 그렇게 거액을 청구하신건가요?”
변호사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제가 상담한 변호사는 회장부인 같은 그런 여자는 미국같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천억이나 이천억이라도 받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서 그걸 다 빼앗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증인은 회장부인에게는 그렇게 민사배상을 청구했으면서도 김용국이나 마기룡은 그냥 놔두셨던데 왜죠?”

“저 두 사람은 회장부인의 돈으로 망가진 불쌍한 살인도구들입니다. 내가 그런 인간들에게 돈을 청구하기 싫었습니다.” 회장측은 철저히 그를 매도했다. 나도 김용국의 변호사였다. 한번쯤은 회장 측의 시각으로 정의택을 의심해 봤다. 그러나아니었다. 그는 무관심한 권력과 거대한 금력 앞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수사해 달라고 사정하는 초조한 아버지한테 술과 뇌물을 얻어먹으면서 탐욕의 눈길을 번들거리던 형사들을 증오했다. 차라리 시골의 순박한 형사가 조사를 다 해주었다고 했다. 그랬다. 돈은 경찰도 검찰도 변호사도 그 누구도 마취시켜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증인 한 가지 다시 참고삼아 묻겠습니다.”
검사가 끼어들어 물었다. 그는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집요한 수사의지로 회장부인은 공판정에 선 것 같았다. 변호사지만 속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회장부인인 김귀숙은 정의택씨가 언론플레이를 하는 바람에 자기가 억울하게 범인이 됐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회장부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언론플레이라는 말을 쓴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정치성을 느끼게 했다.

“사건이 터지고 수많은 기자들이 접근하고 인터뷰하자고 했습니다. 제 딸이 살해된 게 뭐가 그렇게 명예로운 일이겠습니까?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한번은 동아일보에서 ‘여대생이 알고 지내는 남자의 장모 구속’이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피가 끓어올라 제가 그 기자에게 항의했습니다.이종 사촌 오빠를 알고 지내는 남자로 표현하느냐고 말이죠. 그런 식이면 당신 외삼촌은 알고 지내는 여자의 동생이냐고 물었죠. 다음부터 그런 원색적인 제목은 없어졌습니다. 애비로서는 정말 언론과는 얘기도 하기 싫고 힘들었습니다. 지난 설날 모란공원에 뼈로 차갑게 남아있는 딸을 보고 왔습니다. 한창 즐거워야 할 청춘에 우리애가 왜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합니까?”

그는 특히 문제의 발단인 조카 김판사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얘기해 주는데요 김판사 자기 때문에 내 딸 혜경이가 살해당하고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얼마전 법원부장과 김판사 그녀석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판사는 이 사건을 너무나 남의 일 같이 생각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놈이라 대학때부터 이종사촌인 우리 혜경이가 좋아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은 그런 놈을 판사로 쓰고 있습니까?”

그의 분노가 재판부의 가슴에 투사되고 있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제가 이 재판 전에 이 글을 한부 드렸는데 읽으셨습니까?”

“읽었습니다.”
나는 내가 발견한 진실을 기도하고 적었었다.

“잘못 쓰거나 진실에 어긋난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일단 진실은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게 태도라는 생각이다. 변호사가 돈에 취해 사실을 왜곡하면 그건 또 다른 범죄다.

“딸의 시신을 처음 봤을 때 감정을 얘기해 주시죠.”

“우리 혜경이가 죽은 지 열흘이 됐는데도 내가 갔는데 눈을 한쪽 번쩍 떴어요. 그리고는 입을 씰룩거렸습니다. 저는 그런 걸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한 맺힌 딸의 영혼이 가지 못하고 나를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허억”하고 마른 울음을 터쳤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철저히 침착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을 계속했다.

“죽은 딸의 하얀 얼굴을 보고 처음에는 총에 맞은지 몰랐습니다. 양미간에 구멍이 보여서 굵은 송곳에 찔린 줄 알았어요. 이미 경찰이 얼굴에 피를 닦아 놓은 것 같았어요. 판사님들은 수사를 하지 않으면서 민적거리는 형사반장이나 죽은 애 아버지가 사주는 밥과 술을 느긋하게 쳐 먹는 제 마음을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차마 제가 세부적인 사항은 말씀 못드리겠습니다만 인터폴에 협조하는 것 까지 저 아니면 이 사건 밝히지 못했을 겁니다.”

“이 넥타이를 보세요”
그가 자기가 매고 있는 포도주색 넥타이를 가리켰다.

“이건 죽은 딸 혜경이가 선물한 겁니다. 저 악마 같은 더러운 여자가 끝까지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따라가서 우리 혜경이 복수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이 넥타이를 매고 나옵니다.”

그가 한 맺힌 얼굴로 고개를 돌려 회장부인을 바라보았다. 기세등등하던 회장부인이 순간 움찔했다. 나는 다음질문으로 들어갔다.

“증인역시 살해되실 뻔 했죠?”
그 말에정의택씨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야! 이 놈!”
순간 마기룡의 목이 자라같이 들어갔다.

“네가 날 죽이려고 할 때도 내가 험하게 대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내 딸을...”
정의택이 울부짖었다. 그가 재판장을 보면서 절규했다.

“재판장님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바쳐서 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싶습니다.”
법정에는 냉냉한 법만 아니라 그런 피해자의 격분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사회적분노도 판사들의 가슴에 저며 든다.  나는 그 순간 회장부인에게로 무심코 시선이 갔다. 기가 죽을 만 한데도 회장부인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검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재판장이 허락하거나 말거나 그녀가 소리쳤다.

“저 사람은 말이죠. 소설을 쓰고 있어요거짓말입니다.”
나는 악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13
회장부인의 공판담당 민 변호사가 김용국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김용국을 몰아쳐서 회장부인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그의 진술을 뒤엎어야 했다. 살인범들은 일심에서 회장측이 변호사를 붙여주고 말을 맞춰만 주면 거액을 주겠다고 유혹했었다고 내게 알렸다. 서로간의 불신 때문에 그게 뒤틀렸다. 살인 잔대금도 제때 안주는 신용 없는 여자를 어떻게 믿느냐고 그들은 투덜댔다.

회장부인만 빠져나가고 자기네만 목에 밧줄이 걸리면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젠 진흙 밭의 개싸움이었다. 때 묻은 재소자복의 김용국이 증인석에 올랐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회장부인이 앞에서 그를 뱀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방청석의 회장 측 사람들이 그에게 차디찬 시선을 보냈다. 김용국은 그걸 의식했는지 얼굴이 벌개 졌다. 우유부단한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도신문에 넘어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꿀 수 있었다.


“잠깐만요”
검사가 먼저 재판장에게 발언을 요구했다.

“지금 방청석에는 회장부인의 가족들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김용국이 아주 꺼려하는 친척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퇴정시킨 후에 진술하게 해 주십시요.”

“변호인 측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을 시작했다.

“검찰 측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인 저는 김용국이그를 미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진실을 말해야 더욱 신뢰를 얻으리라고 봅니다. 눈치 보면서 안 보이는데서 말하면계산된 정직입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관련자들이 다 그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순간적인 표정이나 감정이 더 정직했다. 김용국이 말을 할 때 회장부인의반응을 보고 싶었다. 회장부인역시 죄가 없다면 눈을 부릎뜨고 김용국의 증언을 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때 민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 김귀숙 피고인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몸도 불편하신 분인데 퇴정하게 해 주시죠.”
내가 즉각 일어서면서 반대했다.

“아닙니다. 김귀숙 피고인도 이 자리에서 김용국의 증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회장부인이 순간 의심의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재판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입회여부는 당사자의 의사에 맡기겠습니다. 김귀숙 피고인! 어떻게 할래요? 남아서 김용국이 증언하는 걸 들을래요? 아니면 먼저 교도소로 가서 쉴래요?” 회장부인은 자기 변호사에게 다시 ‘어떻게 할까?’라고 눈으로 물었다. 민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 알아서 할테니 가도된다’라는 싸인을 보냈다. 회장부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다짐하듯 한마디 했다. 아픈 듯 찡그린 표정도 지었다.

“나중에 오늘 김용국이가 한 말들을 제가 다 확인하고 진술할 수 있는 거죠?”

“다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민 변호사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갈께요.”
그녀는 천천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민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김용국을 노려보며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김용국이가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서 오늘 오전법정 내내 신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판부에 선입견을 주려는 말이었다. 김용국이 침묵했다. 나는 항의하려다 참았다. 이윽고 민면호사가 물었다.

“증인은 중국에서 잡혀 한국으로 압송된 4월11일 밤 정혜경을 살해한 적이 없다고 조사관 앞에서 진술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인 4월12일에는 정혜경을 직접 죽였다고 하면서 진술서까지 썼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첫날은 거짓말을 했던 거네요?”

“저 그게 왜냐하면 ---”

“아니 나도 그 이유는 아는데 거짓은 거짓 아닙니까?”

“----!!----”
김용국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하루 만에 말이 그렇게 달라졌을까? 왜 그랬죠?”

“처음에는 마기룡이가 나보고 중국에서 짠 씨나리오 대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기룡이를 조사한 형사가 마기룡이가 심경변화를 일으켜서 다 불었대요. 그러면서 저보고 조서를 다시 쓰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다시 말했어요. 버티면 나만 나쁜 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때 듣고 있던 검사가 “잠깐만요”하고 끼어들어 김용국을 보면서 따지듯 물었다.

“이봐요 김용국씨 진술을 번복하게 된 건 전화추적이나 금융거래추적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니까 어쩔 수 없이 했잖아?”

“그건 아니구요. 마기룡이가 말을 번복해서 저도 말을 바꾼 겁니다.”
민변호사가 씩 의미 있는 웃음을 웃으며 다시 질문을 했다.

“회장부인인 고모의 지시로 정혜경을 살해했다고 하면 선처할수 있다고저 검사가 조사할 때 회유했죠?”

“아니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김용국이 단호히 부인했다.

“없긴 뭐가 없어요? 일심에서 저 검사가 잘 봐주겠다고 하다가 사형을 구형하니까 당신부인이 저 검사를 따라가서 막 항의하고 당신 일심 변호사도 구형량을 줄여준다고 해서 협조했는데 왜 사형시키려고 하느냐고 따졌잖아요? ”

“그런 거 없었다니까요.”

“없긴 뭐가 없어요? 내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민 변호사가 단정적인 어조로 추궁했다. 방청객들의 분노가 화살이 되어 검사에게 날아갔다. 검사가 발끈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재판장을 보며 소리쳤다.

“아니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항의 받은 사실이 없어요. 오히려 김용국씨 부인이 내게 고맙다고 절까지 했어요.”
검사가 법의 도마에 올랐다. 민변호사가 날카롭게 되받았다.

“사형시켜달라고 한 사람한테 고맙다고 절까지 했다구요? 그러지 마세요. 난 분명히 그 얘기들을 들었다니까요.”

“그러면 그 증인을 불러 물어봅시다. 변호사가 어떻게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법정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들이었다. 변호사가 한 발 물러섰다.

“뭐 정 그러시면 검사에 관해 진술한 부분은 공판조서나 녹음에서 삭제해도 됩니다. 이만하면 됐습니까?”
그 말에 검사도 감정을 자제하고 자리에 앉았다. 민변호사가 김용국을 보면서 신문을 계속됐다.

“도대체 회장부인이 어떤 살해지시를 했다는 거죠?”

“고모님이 저한테 너도 알다 싶이 이사람 저사람 써서 미행을 해 봤는데 결말이 나지 않는구나.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않니? 죽여 버릴 사람을 알아보라고 하소연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네 동생 같으면 이렇게 지지부진 할 수 있느냐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니예요?”
민 변호사가 따졌다.

“늦은 시각이라 그냥 알았습니다하고 돌아왔습니다.”
김용국이 얼버무렸다.

“그럼 바로 살인을 승낙한 거네?”
민변호사가 곤란한 질문으로 치고 들어왔다.

“승낙은 아니고 그냥 알았다고 한 거죠.”
김용국이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얼버무렸다.

“그 정도가 살인교사의다예요?”
민변호사가 확인했다. 그렇다면 범죄가 아니었다.

“아니요 차로 돌아오는데 고모한테서 핸드폰이 왔어요. 다시 하소연을 했어요.”
살인교사가 단순한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회장부인은 무죄였다. 유일한 증인인 김용국의 진술이 번복되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검사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회장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한 건 제발 정혜경을 죽여 달라는 애원이었잖아요.”
검사는 김용국에게 사정조로 물었다.

“그렇죠 저는 그렇게도 받아 들였습니다.”
김용국이 검사의 눈치를 보면서 화답했다. 민변호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지금 변호인 신문 중 아닙니까? 검사가 뭐가 그렇게 근심이 되서 중간에 말을 잘라먹고 그럽니까?”
검사가 쑥 들어갔다. 민 변호사가 다시 질문했다.

“회장부인 고모가 살인을 부탁했다고 주장하는 그 무렵 증인 김용국씨는 처와 함께 방 얻을 돈을 고모한테 얻으러 갔다가 냉정히 거절당했죠? 처가 눈물까지 흘렸다면서요?”

수사기록에 그런 부분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상당히 섭섭했겠네? 다시는 고모를 보지 않고 싶었겠네?”

“그랬죠.”

“고모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시기가 바로 그 직후던데 그렇게 싫어하는 고모 말을 듣고 살인을 했단 말이죠?”

김용국이 진땀을 바작바작 흘리고 있었다. 


#14
2004년 1월 12일 새벽 4시. 나는 어둠이 짙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얀 모니터 안에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변호사인 내가 회장부인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날이었다. 어떤 걸 물어도 그녀는 머릿속에 입력된 시나리오 이외에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기가 되면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것이다. 왜 모두들 밤새 생각한 꾀가 죽을 꾀인 줄을 모를까.

잡히지만 않으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는 의식이었다. 걸려도 증거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법정은 잔꾀와 술수의 게임장이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배신자가 된다. 사람들은 거짓말 할 권리가 있다 라는 권리장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모니터에 회장부인에게 물을 사항들을 하나하나 써 나갔다. 나는 정직하게 묻고 그녀는 마음대로 거짓말하고 각자 자유다. 며칠 전 사형장에 다녀온 검사 한사람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내게 얘기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고 했었다.

오전 10시30분. 고등법원 304호 법정. 법정의 공기는 항상 답답하다. 악한 기들이 차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장부인이 도끼눈을 뜨고 표독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그녀에게서 맹수의 인광이 내게 날아왔다. 불편했다. 하지만 나의 운명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조카 김용국 부부가 댁에 자주 오는 편이었나요?”
내가 부드럽게 물었다. 신경을 곤두세웠던 회장부인이 갑자기 탐색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타일렀다.

“매번 단답식으로 검사나 변호사들이 묻는 바람에 내가 제대로 말을 못해왔어요. 저 사실은 말이죠 IMF로 집까지 날린 오빠내외가 불쌍해서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와 있게도 했어요. 그 오빠 아들이 용국이죠.”

그녀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고 있었다. 내가 또 물었다.

“김용국 내외는 말이죠 회장부인인 고모님 댁은 어려워서 자기네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나한테 말하던데 어떻습니까?”

“에이 그런 건 없어요.”
회장부인이 이빨을 살짝 보이며 묘한미소를 지었다.

“들어보니까 그동안 주위의 친척이나 친정을 잘 도와주셨다고 법정에서 말씀을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난 그녀에게 유리한 것만 묻고 있었다.

“그렇게 말했죠.”
경계하던 회장부인의 눈이 순간 깔보는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오빠내외가 힘들어 할 때 불러서 같이 살기도 하고 옆에 있는 그 아들인 용국이 내외도 기사로 썼죠.”
회장부인이 생색을 냈다.

“그 정도가 아니라조카 김용국이 내외가 집을 사는데 돈도 8천만원인가 거액을 도와주셨다면서요? 지난번 법정에서 그렇게 말씀 하셨었죠?”
수사기록에 그건 살인청부자금의 중도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죠”
경계의 빛이 거의 사라졌다.

“참 따뜻하신 고모네요. 참 한가지 물어볼 건 십 오년 전 친조카 김용국이 결혼할 때 결혼식장에 가셨습니까?”
회장부인은 가지 않았다. 회장부인이움찔했다.

“용국이가 결혼식 때 내가 지방에 살고 있었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녀가 즉석변명을 만들고 있었다. 난 어조를 조금 높였다.

“먼저 가셨었나 안가셨나 그걸 먼저 대답해 주시고 불가피한 사정을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모르겠네요”
그녀는 네 질문의 저의를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져나갔다. 그녀의 교활한 성격의 일단이 대화를 통해 노출됐다.

“조카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데 이번의 그것 말고 조카 김용국이 결혼식이후 이 사건 무렵까지 15년 동안 경제적으로 몇 번 정도 도와주셨나요?”
살인청부자금을 주기 전에는 한번도 없었다는 기록이었다.
회장부인은 의도를 알아채고 동문서답으로 나갔다.

“하여튼 액수는 정확하지 않은데 8천만원쯤인가 줬는데그 날짜는 기억 못해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나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계속했다.

“그건 이번 살인사건중간시점에 처음 주신 돈이고 그 이전 조카가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갈 때 도와주신 적이 있어요? 단 한번도 없다고 하던데”

“그래요. 그 사이에 도와준 건 없어요. 그런데 말이예요”
그녀가 발끈하면서 나를 혼내려고 시작했다.

“됐습니다. 다음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예요. 그냥 넘어가지 마요. 여보세요 왜 나는 말을 못하게 하죠? 난 단답식으로 예 아니요 하는 대답을 못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독 오른 눈으로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하시죠.”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럴때 자연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순간 재판장이 끼어들었다.

“이보세요 김귀숙피고인! 변호인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회장부인이 재판장의 눈치를 보고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흔들리는 마음의 파문이 나와야 하는데 실패했다.

“왜 살인사건이 터진 시점 전후에야 비로서 주택자금 8천만원을 주셨을까요? 그 전에는 보증금 천만원을 조카 김용국내외가 꾸러 갔을 때도 야멸차게 거절하셨다면서요.”

“여보세요 천만원이 아니라 삼천 만원이었어요.”

그녀가 흥분하며 외쳤다. 그녀의 담당 변호사는 부탁을 거절당한 김용국이 살인부탁을 들을 리가 있느냐는 식으로 다구쳤다. 난 그 반대방향으로 묻고 있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참 처음 법정에서는 김용국이가 협박을 해서 8천 만원을 주셨다고 했었죠? 왜 주신돈이 협박으로 빼앗긴 돈도 됐다가 사랑하는 조카 집사는데 준 돈도 됐다가 순간순간 바뀌죠?”
내가 물었다. 난 이미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계속 했다.

“김용국이 외국으로 도망을 친후 지방도시에서 몰래 그 처를 만나신 적이 있죠?”

“만났어요 왜요?”

“수사기록을 보면 그때 차가 흔들리도록 싸웠다고 하던데--”

“그때 조카며느리가 버릇없게 굴어서 따귀를 한대 올렸죠”

“그때 조카며느리가 우리남편 그렇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할꺼냐고 따졌다면서요? 그리고 같이 경찰서로 가자고 했죠?”

“아니예요. 그때 저년이 경찰 앞잡이가 되서 나한테 온거예요. 자기남편을 빼달라구요. 내가 직접 마기룡에게 살인교사를 한 것으로 해 주면 자기 남편은 3년6개월만 살면 되니까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방청석 뒤에서 김용국의 처가 미동도 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회장부인이입가에서 허연 거품이 튀어 나왔다.

“지금 그런 말을 듣는 조카며느리가 본 변호인에게 하는 말이 그 며칠 후 친척을 보내 총대를 메주면 50억원을 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정곡을 찔렀다.

“천만에 그런 소리 하지 마슈. 저것들이 돈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50억이 아니라 5억만 줘도 저것들은 나가 떨어지게 돼 있다니까.”
방청석 뒤에서 김용국의 처가 무서운 눈으로 회장부인을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회장부인이 씩씩거리며 내게경고했다.

“당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마. 생각해 보니까 조금 전에 내가 이리저리 휘돌린 것 같아. 그렇게 하면 못써.”
이미 그건 어떤 또 다른 협박이었다. 나는 조금 능글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알았습니다. 잘못했어요. 전 죽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변호사가 직업인데 물을 건 물어야죠.”
법정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향하는 데 김용국의 처가 따라왔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회장부인은 어떤 수를 써서도 감옥에서 나올 여자입니다. 그렇게 석방되면 나를 꼭 죽일 거예요. 난 괜찮아요. 변호사님도 조심하세요.” 모골이 송연했다. 직업적 일인데도 사건마다 저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는 날 까지 살면서 내 일을 하는 것이다.


오후 재판이 시작됐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양복을 입은 자그마한 남자가 증언 석에 올랐다. 안경 뒤로 선한 눈이 보이는 회사원타입의 사십대 남자였다. 그는 살인범 마기룡의 선처를 위해 스스로 증언석에 올랐다. 세상이 모두 살인범 마기룡을 흉측하게 봐도 또 그렇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도 있다.

“마기룡과는 어떤 사입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사회친구입니다. 제가 마기룡의 총을 보관해줬다가 구속됐었습니다.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탁한다고 살인에 사용한 총을 보관해 줍니까? 증인은 마기룡을 어떻게 봅니까?”

“제 시각에서는 마기룡이 사람이 여리고 착합니다. 저는 저 친구가 좋아 면회도 두 번 갔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제가 야채납품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마기룡은 틈이 있으면 제 야채장사를 진심으로 도와줬습니다.”
질퍽거리는 쓰레기통에서 갑자기 한 송이 꽃을 보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범죄 속에서도 하번 베푼 마기룡의 따뜻한 마음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난 그를 다시 보게 됐다. 


#15
“검사 의견 진술 하시죠”
재판장이 논고를 명령했다. 검사가 흥분한 표정의 붉은 얼굴로 일어섰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재판장님 이 법정에서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검사의 솔직한 심경을 얘기하고 논고문은 나중에 내겠습니다.” 검사 대각선 방향의 피고인석에 앉은 회장부인이 독기 품은 눈으로 검사를 노려보았다.

“회장부인은 미행만 시켰다고 하면서 살인교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신 회장부인이 아주 교묘하게 살인범인 김용국과 마기룡을 해외로 도피시켰습니다. 정말 미행만 시켰다면 왜 범인들을 도피시키셨을까요? 도피시킨 사실 그 자체가 벌써 살인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해 오면서 회장부인인 이 김귀숙 같이 뻔뻔스런 여자를 정말 처음 봤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여자입니다.”

김귀숙의 얼굴에 냉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형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웃음을 짓는 인간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검사가 계속했다.

“여대생 정혜경양의 시신이 발견되고 범인들이 해외로 도피했을 때 수사검사인 저는회장부인이신 저 여자 김귀숙에 대해 살인혐의를 걸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죠. 그때 김귀숙이 저를 찾아와서 뭐라고 한 지 아십니까? 빨리 김용국이가 잡혀 와서 진상이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교양 있는 지도층인사의 부인인 양 가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김용국이 잡혀 왔습니다. 회장부인은 검찰청에 와서 김용국을 보자마자 이번에는 ‘네가 거기서 죽지 왜 이렇게 왔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조카인 김용국이 명문가문의 망신이라도 시킨 듯 말입니다. 이건 검사인 제가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김귀숙은 모든 사실을 무조건 부인했습니다. 검사인 저는 김용국과의 통화내역서를 뽑아 하나하나 들이대야 마지못해 거짓을 섞어 조금 인정하는 독한 인간이었습니다. 김귀숙은 살인청부 자금을 단 일원까지도 현찰로 줬습니다. 그것도 차 안에서 은밀히 말입니다. 김귀숙은 한번은 조카 김용국에게 실수로 10만원 짜리 수표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얼마 후 돌려달라고 하고 만원 짜리로 바꾸어줄 정도로 증거인멸의 습관이 뼈에까지 박힌 인간입니다. 살인청부자금을 현찰로 만들어 가지고 김용국에게 전하는 모습도 007을 방불케 합니다. 몇 대나 되는 자기차를 쓰고 기사를 대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혼자 변장을 하고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급할 때도 절대로 자신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꼭 공중전화를 사용했습니다. 김귀숙은 이렇게 완전범죄를 노린 무서운 인간입니다.”

나는 오랜만에 용기 있는 검사를 본 것 같다. 그의 집요함이 아니면 회장부인은 이미 무혐의로 석방되었을 것이다. 살인교사가 유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이비 교주들이 광신자를 시켜서 사람을 살해해도 무죄였다. 살인지시를 한 조폭 두목들도 쉽게 법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돈의 힘은 살인청부업자들만 아니라 권력의 칼도 솜방망이로 만들곤 했다. 회장부인은 바로 그 힘을 신앙같이 믿고 있는 듯 했다.

“김귀숙 측은 참 교활하게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검찰에서 추정한 사망시점과 실제 사망시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트집 잡으면서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뇌에 대못이 박히고도 생존한 사람의 뉴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또 몸에 바늘이 여러 개 들어 있어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죽은 정혜경양도 실제로는 아주 작은 공기총알이 뇌에 박혔습니다. 숨골을 건드리는 치명상이 아니고 대뇌피질에 박혔다면 즉사하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을 받으면서 서서히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시각은 총기발사시각보다 훨씬 후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3월의 기온이 낮은 산기슭에서는 부패가 아주 늦게 진행됩니다. 회장부인 김귀숙 측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교묘하게 사건을 흐리고 있습니다.”

난 악마변호사란 미국영화장면이 떠올랐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소만이 많은 돈 많이 변호사의 목표인 것이다.

“회장부인 김귀숙측 변호인은 범인이 여러명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화내역이나 CCTV에 촬영된 걸 보면 다른 인물들이 개입됐다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김용국이나 마기룡이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몽땅 뒤집어쓰고 갈 이유도 없습니다. 다른 범인들이 있다면 죄가 훨씬 가벼워지는데 사형의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 김귀숙 측은 죽은 정혜경의 머리통에서 나온 총알이 앞이마 뿐만 아니라 뒷통수에서도 발견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기룡이 한 방향으로만 총을 쐈다는데 왜 앞뒤 다른 곳에서 총알이 나오느냐는 주장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검사는 손가락을 총모양으로 해서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주먹으로 맞아도 머리가 즉각 반대쪽으로 반응합니다. 앞을 쏘면 머리가 돌아가고 그러면 다음총알은 뒷통수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동으로 다시 머리통이 돌아와 앞에 총알이 맞을 수 있습니다.”

검사는 총구처럼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마치 서부영화의 결투장면처럼 머리를 획 돌렸다가 다시 반동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코믹하게 연기했다. 순간 나의 눈에 방청석 끝에 있는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이 보였다. 그의 붉어진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그때 갑자기 김귀숙이 손을 번쩍 들면서 발악을 했다.

“재판장님 저 검사가 소설을 써요 소설을.”

“가만있지 못해요?”
재판장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어떤 다른 힘을 광신하는 그녀에게 재판은 국가와의 게임이었다. 자기무덤을 파는 그녀에게 차라리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김귀숙은 번복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씩 말을 바꾸는 인간 이하였습니다. 처음에 김귀숙은 저에게 너무너무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김귀숙의 태도에 검사인 저도 깜빡 속아 저도 살인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심해서 조사를 해 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살인혐의는 배제하고 체포감금정도로만 조사했었습니다. 김귀숙은 검사를 그렇게 현혹시키고 그 와중에 김용국과 마기룡을 도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베트남에 전화를걸어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게 하고 그걸 녹음해서 증거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검사인 제게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조카인 김용국이가 빨리 잡혀야 진실이 밝혀진다고 울먹이는 연기를 했습니다. 혐의를 받고 있는 자체도 명예가 훼손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다 정작 김용국이 잡혀오자 독 오른 얼굴로 김용국을 죽으라고 하면서 덤비는 걸 보고 검사인 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정말 독하고 치밀하고 잔인한 여자입니다.”

나는 회장부인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속된 피고인 신분이면서도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도 미모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리석은 김용국의 자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부자의 착한 사모님일 것이다.

“저 김귀숙이가 얼마나 다그쳤으면 김용국이나 마기룡이가 여대생을 잡자마자 죽였겠습니까?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은 김귀숙의 남편인 회장이 주가조작으로 대구에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김귀숙의 변호인들은 남편이 구속된 상황에서 어떻게 옥바라지에 바쁜 부인이 살인교사를 할 수 있었겠느냐 주장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의 그런 주장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귀숙은 그 상식선을 넘어서 그런 상황에서도 밤에 서울로 상경해서 죽은 정혜경양 아파트 앞에 와서 김용국이 보여주는 총까지 확인하고 다시 내려갔습니다. 본 검사가 항공기 탑승내역과 비행기표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저 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부인했을 겁니다.”

난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봐요 검사님!”
회장부인이 다시 손을 들면서 소리쳤다.

“가만 있지 못해요?”
재판장이 화를 내면서 어조를 높였다. 교도관이 와서 회장부인을 제지시켰다.논고는결론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김귀숙은 살인청부자금을 주지 않았다고 계속 잡아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본 검사가 김용국의 동생통장을 들이대야 비로서 조용해졌습니다. 살인수고비를 간접적으로 위장해서 준 거니까요. 물론 이 법정에서는 그 돈들이 다 친척을 도와준 따뜻한 돈으로 변신을 시켰지만 말입니다. 본 검사는 돈을 받고 죽은 정혜경양을 미행한 자들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여대생을 미행시키고 회장부인 김귀숙은 미행자를 미행하는 독한 여자였습니다. 미행자들에게 여대생 정혜경을 조금도 놓치지 말고 밀착감시하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여대생 정혜경이 가다가 자기를 따라오는 낌새가 있어 방향을 백팔십도 바꿔 돌아서서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행자들도 정혜경이 보는데서 백팔십도 돌아서 따라오더라는 겁니다. 그 뒤에서 회장부인 김귀숙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그랬다는 겁니다. 검사실에 붙잡혀온 미행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알량한 돈 몇 푼 때문에 그랬다고 자백했습니다. 김귀숙은 심지어 판사사위집 현관에도 실을 붙여두고 미행자의 감시를 재확인 하는 여자였습니다. 김귀숙은 백퍼센트의 완전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극악무도한 인간입니다. 지금 이 법정에서도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뻔뻔스런 모습을 보십시요. 단지 자신의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인 저 여자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살인을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소설 속에서나 있을 엽기적이고 패륜적인 살인얘기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또 민사소송에 걸리게 되자 그 많은 재산을 빼돌리면서도 피해자 측에 단돈 1원도 공탁하지 않는 집안입니다. 재판장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악마를 보십시요.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 여자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사형을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다음은 김용국과 마기룡에 대한 검사의 논고였다. 김용국은 뭔가 희망하는 얼굴이었다.

“김용국의 경우는 그래도 뒤늦게나마 반성하고 진실을 말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대생 정혜경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걸 알면서도 중간에서 바른 처신을 하지 않고 회장부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점, 또 상황이 난처해지자 해외로 도피한 파렴치한 점이 있습니다. 마기룡의 경우는 처자식도 없는 혼자의 몸이면서도 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사람을 확인사살까지 했습니다. 더구나 마기룡은 해외에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한 치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 사형에 처해 주십시요.”

김용국과 마기룡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회장부인 김귀숙도 처음으로 초조한 듯 손가락을 주물렀다. 

#16
2004년 2월 4일 고등법원 304호 법정. 붉은 주단 의자에 앉은재판장의 표정이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된 회장부인에 대한 변론의 순간이었다. 대형 로펌의 거물급 변호사들이 동원된 법정이었다. 먼저 장관급을 지낸 대표 변호사가 준비된 변론문을 들고 첫 포성을 울렸다. 그들은 변론조차 나누어서 했다.

“오랫동안 심리를 해 주신 재판장과 배석판사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검찰이 여러 가지 의문점을 발견해서 진실을 밝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검찰의 태도는 오히려 오해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여대생의 사체가 산기슭에서 발견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수사가 됐습니다. 현장에서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고 여대생을 담고 올라갔다는 포대자루에 총구멍도 없었습니다. 총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저희 변호인단은 여대생이 제3의 장소에서 살해되어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범인들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그들과의 전화내역 만으로 회장부인 김귀숙을 구속했습니다. 그것도 살인죄가 아닌 체포 감금혐의정도였습니다.”

사건이 교묘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중국에서 범인들이 압송되어 첫 진술을 했을 때저희 변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들이 제3자에게 부탁해서 한 범행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범인 김용국의 말이 번복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수사는 김용국의 말에 꿰어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김용국의 거짓말을 근거로 한 이 수사는 결국 추리소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담당변호사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면서 변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부인 김귀숙은 거물급 변호사의 지원사격에 비 맞은 식물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회장부인의 공판전담 변호사가 그 뒤를 이어 변론했다.

“김귀숙이 살인교사를 했다는 점에 대한 증거는 오직 김용국의 진술뿐입니다. 검사의 말처럼 김귀숙이 치밀하고 독한 여자라면 범행방법이나 사체처리에 대해서도 역시 면밀히 계획을 세워 실행했어야 마땅합니다. 치밀한 회장부인 김귀숙은 미행을 시키고도 다시 그 뒤를 미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대생을 살해한 뒤에는 그 모든 걸 김용국에게 맡기고 전혀 관여하지 않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성격상 과연 그게 일관성 있는 맞는 행동일까요?”

죽은 시신을 낙엽만 덮어둔 사실도 허술했다.

“김용국은 미행을 하면서 회장부인으로부터 차도 지원받고 돈도 얻어 썼습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지시받았다면 얼마나 거액을 약속받았을까요? 그런데도 경찰에서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김용국은 고모인 회장부인으로부터 살인에 관해 자기는 단 한 푼도 약속도 하지 않고 돈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받은 1억5천 만원의 살인청부자금은 모두 마기룡에게 전달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김용국이 과연 고모인 회장부인을 위해 그렇게 충성했을까요? 더구나 이 사건 살인시점은 김용국 부부가 고모인 회장부인을 찾아가서 방을 얻을 돈을 도와달라고 했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했습니다. 퍽이나 섭섭했다는 감정 표현이 수사기록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그렇게 섭섭한 고모의 살인부탁을그냥 해 주었다는 게 과연맞는 말일까요?더구나 김용국은 살인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고백한 진실은 순수한 진실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어눌한 모습을 하면서 철저하게 계산된 형식적인 진실입니다.”

변호사인 나 역시 일말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민변호사가 계속 지적해 나갔다.

“이 사건수사의 논리적인 모순점을 대도록 하겠습니다. 김용국은 살인계약금을 이미 전달했는데 회장부인 김귀숙이 그걸 돌려달라고 하면서 안주면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 행패를 부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살인까지 했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성립할 수 있는 얘기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미행이란 건 부도덕하지만 큰 범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살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돈을 돌려달라고 공개적으로 아우성 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자신의 살인청부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상장회사들을 거느린 그룹의 회장부인입니다. 살인계약금을 돌려달라고 난리난리 쳤다는 김용국의 말이 맞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모두다 김용국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방청석이 술렁댔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옆에 있는 김용국을 쏘아보고 있었다. 민변호사가 서서히 결론을 짓고 있었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증의 정도는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판례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무죄입니다.”

방청석의 회장 측 사람들로부터 소리 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결국은 연결고리인 김용국의 유일한 증언이 신빙성을 잃고 있었다.나 역시 김용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은 일을 우물쭈물 하다가큰 의심을 받는 바보였다.

다음은 나의 차례였다.

“김용국의 변호인인 저는 이 사건을 맡으면서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건 김용국이나 그의 처가 진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호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호사의 임무역시 실체적 진실발견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변호사 윤리상 의뢰인의 만족이 먼저인가 진실이 먼저인가의 선택문제가 있었다. 개인사업인 이상 고객을 만족시키고 높은 보수를 받는 것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경우 교활한 공작이 진행되기도 했다. 머리 좋은 변호사들이 모여 치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증인들을 매수하고 검사의 칼날을 무디게 했다. 담당 재판장과 절친한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판사의 시선을 죄인에서 친구 쪽으로 바꾸는 최면술을 걸기도 했다. 악마의 힘은 돈에서 나왔다. 대법원판례 하나를 만드는데 24억원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난 그런 것들을 깨고 싶었다. 그들의 위선을 벗기고 싶었다.

“이 사건에서 회장부인인 김귀숙은 절대로 살인을 교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부름했던 김용국은 회장부인이 시켜서 살인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철저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변호사인 저는 김용국 피고인을 여러번 구치소에서 만나면서 관찰을 한 바 있습니다. 김용국은 치밀하게 살인을 계획하거나 실행할 만한 대담성이 없습니다. 그의 처나 친척을 통해 성격이나 살아온 행적을 살폈습니다. 친한 친구를 찾아가 만나 김용국 그가 어떤 성격의 소지자인가도 알아봤습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상황에 적당히 반응하는 성질입니다. 법정에서 검사나 상대방 변호사가 날카롭게 던지는 질문에 대항할 지능도 없습니다. 증인신문들을 통해 보신 그대로 그는 자기모순의 논리에 당황하고 대답을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몰아치면 판단도 없이 그대로 긍정해 버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회장부인인 김귀숙 측은 논리적으로 완벽합니다. 사회지도층 고상한 부인으로서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란 상식이 아닙니다. 김귀숙과 김용국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철저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고 변호사를 속이고 대한민국 사법부를 속이고 있습니다. 저는 구태어 누가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재판부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완벽한 논리 속에 진실은 없었다. 한 방울의 눈물 속에 분해서 더듬는 말속에 그리고 절망한 눈 속에 진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세요”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명령했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다리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갑 나이에 살인죄에 연루되어 고모와 조카가 재판정에서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판사사위를 미행하다가 이렇게 나와 피고인이 됨으로써 판사 사위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법조계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제 옆에 있는 살인범 김용국과 마기룡 때문에 수감생활을 하느라고 병을 얻고 가족들까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지 어떨지 회한만 가슴에 사무칩니다. 저또한 딸을 가진 부모로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는 저주받을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제2의 피해자가 되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재판장님께서는 검사가 쓴 소설을 보지 마시고 현명한 판단으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음은 김용국 차례였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냥 죄송하죠.”
김용국이 한마디로 끝냈다. 다음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마기룡이 종이 한 장을 품속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의 잘못이 꽃다운 생명을 없애고 그 가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저 역시 힘든 가정에서 태어나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고생하면서 자랐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저는 죽는 것만이 속죄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망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싶습니다. 정말 뼈저린 반성으로 살고 싶습니다.”
결국 그는 재판장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면 2월5일 오후 2시에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재판이 모두 끝났다. 판사들이 퇴정을 하자 회장부인이 고개를 돌려 방청석의 가족을 보며 말했다.

“내일 면회와”
그녀는 사형구형을 받은 피고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미무죄를 약속받은 듯 미소 짓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17
사형과 무죄의 판결이 교차될 것 같았다. 살인범 김용국의 물귀신작전 같은 증언은 신뢰성이 없었다. 유일한 증언이 효력이 없다면 회장부인은 무죄였다. 대형 로펌의 거물변호사들이 로비에 전력투구할 것이다. 대법관을 지낸 선배가 내게 법원장시절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재판초기에 분명 중형을 선고해야지 하고 속으로 결심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이 되자 그의 마음은 어떻게 풀어 줄까로 자신도 모르게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다. 제일 친한 친구가 변호사로활동을 한 게 그런 변화를 만든지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먼저 증언이라는 버팀목을 없애 판사가 봐줄 수 있는 명분을 만든다. 다음으로는 강한 로비였다.

그렇다면 물귀신 같이 살인을 지시받았다고 진술한 김용국은? 그는 사형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뒤에서 총 지휘를 하는 회장이 그런 작전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는 김용국을 계속 유혹해 그 담당변호사인 나를 배제해야 했다. 진실을 말하는 나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목에 걸린 가시이기 때문이다. 또 회장은 어떤 방법을 택하든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를 진정시켜야 했다.

자신이 직접 구속도 되어본 노련한 회장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회유해야 할 인물들을 자극하고 있었다.재판장이 강한 소신파라면 어쩌면 회장부인은 영원히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위험성도 있었다. 나의 뇌리에 죽은 여대생의 빽빽하게 적힌 삶의 스케줄이 떠올랐다. 순간순간을 밀도 있게 살려고 애썼다. 오전시간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나갔다가 그녀는 인생전부를 도난당했다. 차디찬 이른 봄의 산기슭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금은 공원묘지의 납골당에서 사건과는 무관한 한줌의 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자의 세계는 치열했다.

범인들은 모두 자기만 살려고 교활한 꾀를 부리고 있었다. 여대생의 아버지는 재판장에게 저 사람들도 꼭 죽여 달라고 절규했다. 악인들은 자기의 피해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후 1시30분. 나는 법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법원로비에회장 측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나를 보는 그들의 눈길에 적대감이 가득했다. 그 중에 외딴 섬처럼 김용국의 처가 보였다. 진실을 얘기하게 해서 남편의 정상참작을 바라는 그녀는 친척들에게 배신자였다. 이기적인 그들에게는 회장부인의 석방만 보였다. 그들은 정말 인간적으로 회장부인을 동정할까.

이윽고 나는 괴괴한 기운이 도는 법정에 들어섰다. 법정을 지키는 정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늘 다른 심리가 있나요?”

“아니요. 그냥 선고장면을 보기 위해 왔어요.”
나는 선고 순간 재판장의 숨소리까지 그리고 살인자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표정을 놓치지 않고 싶었다. 재판은 최대의 쑈일 수 있었다. 거짓말 하고 가짜눈물을 흘리고 위증을 하게했다. 돈을 받고 변호사는 머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차라리 범인들에게 거짓말과 한판의 쑈를 할 자격을 부여한다는 권리장전을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더욱 흥미를 느끼는 것은 쑈가 끝난 후 배우들의 진면목이었다. 진실은 항상 무대 뒤에 숨어있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정리의 외침이 들렸다. 넓적한 흰 얼굴에 콧등이 높은 재판장이 배석판사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섰다. 코의 중간쯤에 걸친 돋보기를 보면서 25년 전 군인시절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그와 같은 연병장을 기고 있었다.누런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몸에 허연 소금이 붙을 정도의 훈련 중에도 그는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눈빛만 얼마 교환 했을 뿐 말을 나눈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의 선고를 기다리는 몇 명의 잡범들이 먼저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얼굴이 길쭉한 삼십대의 남자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재판장인 그의 앞에 섰다.

“아침마다 여자만 있는 집에 들어가 강도강간을 해서 징역 7년을 받고 깍아 달라고 항소했군요. 생각해 봤는데 그 형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깍아줄게 없어요. 그래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합니다. 들어가요.”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굴하던 눈초리가 재판장을 노려보는 눈이 되었다. 다음은 작달막하고 눈이 째진 남자였다. 양손을 앞으로 하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당신은 검침원을 가장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강도강간을 했는데 일심의 징역10년이 무겁다고 항소했어요. 재판장으로서는 그 형이 적당하다는 의견이었어요. 항소를 기각합니다. 들어가세요. 다음”
그 사내역시 순간 절망과 분노의 표정으로 변했다. 다음번 남자가 등장했다. 어떤 범인도 판결에 승복하지 않았다.

“남의 차를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차와 숨바꼭질을 했네? 징역2년을 선고받고 깍아 달라고 항소했는데 그 정도 형이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소를 기각하니까 들어가세요.”
재판장의 선고 속에서 그의 단호한 일면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인정상 조금의 형이라도 깍아 주는 판사도 있었다. 험상궂은 청년 세 사람이 건들거리며 나와 섰다. 버릇이 된 깡패걸음은 법정에서도 버리지 못했다. 차라리 그들은 당당했다.

“당신네들은 차를 몰고 다니면서 길 가는 여자를 납치하고 강간하고 돈을 뺐었네? 모두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억울하다고 항소했는 모양인데 저는 오히려 그 형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형을 받아야 마땅하죠. 그렇지만 검사가 항소를 하지 않아 더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항소를 기각합니다.”

그중 한명이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아! 씨팔”하고 소리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이 그들의 욕대로 X같은 판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선고를 받기 위해 나왔다. 다른 사람과 달리 눈에 독기가 없었다.

“이건 강도긴 강도인데 먹을 것이 없어 저지른 생계형 강도라고 판단했어요. 일심에서 징역1년이 선고됐는데 우리 항소심은 정상이 딱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월에 처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벌써 그 이상 살았는데요. 그럼 오늘 나갑니까?”
영감이 얼굴이 환해지면서 재판장에게 물었다.

“그럼요. 오늘 저녁 당장 나가실 겁니다.”
재판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선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판장의 성향을 보다 확실히 알았다. 그는 참회하는 인간에게 한없이 관대할 수 있는 판사였다. 그렇다면 회장의 변호전략은 잘못됐을 수 있었다. 자기시각으로 보지 말고 재판장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오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방청석 뒤에 있는 회장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손에 수첩을 들고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부인의 선고를 들으러 온 남편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담담한 분위기였다. 선고받은 잡범들이 모두 일어나서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때 살짝 열린 대기실의 문틈으로 회장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무의자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대고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귀숙! 김용국! 마기룡!”
재판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회장부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이어서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김용국이 나타나고 그 뒤로 마기룡이 고개를 숙인채 곁눈질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따라 나왔다. 재판장이 조용한 눈길로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먼저 판결이유를 말했다.

“회장부인인 김귀숙은 자신의 가정과 딸만을 위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봅니다. 죽은 여대생 정혜경과 판사사위의 관계를 의심해 미행을 시키다가 오히려 그 여대생측으로부터 고소까지 당하자 위신이 실추된 것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김귀숙은 속에서 끓는 복수심과 의심만으로 살해지시를 한 것으로 재판부는 봅니다. 사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판사직에 있는 사위는 장모가 의심을 하고 있는 걸 알았음에도 그 오해를 풀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 김귀숙은 이 법정에서도 지금까지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범행을 전면부인하면서 다른 두 명에게 그 죄를 미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재판장은 거기까지 말하고 김용국과 마기룡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괄해서 세 사람의 판결이유를 먼저 말할 모양이었다.

“또한 재판부는 김용국과 마기룡에게서도 돈에 눈이 어둡고 아직도 뭔가 진실을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았습니다. 김용국의 경우 살해지시가 있은 지 다섯 달 후에 살인을 했는데 그 긴 시간동안 비극적인 사태를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김용국과 마기룡은 서로 자신들의 책임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납치한 이후의 살해과정과 방법등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피고인들은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으면서 오직 물질을 위해 여대생을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보여 집니다. 특히 좌측 상완골이 분쇄골절이 된 것을 보면 여대생에 대한 상당한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므로 그 책임이 배후에서 지시한 회장부인 김귀숙보다 가볍지 않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공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재판부에서는 일심에서 피고인들에게 내린 징역 20년은 너무 가벼워서 부당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피고인들은 사형을 받아야마땅하다는 의견입니다.”
세 명의 얼굴이 검은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재판장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사형을 꺼리는 게 요즈음의 추세입니다. 재판부 역시 그렇습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고심 끝에 피고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습니다.”
재판장이 세 사람을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피고인들을 각 무기징역에 처한다.”
결론이 났다. 재판장과 판사들은 앞에 놓여있던 서류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회장부인은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들면서 소리쳤다.

“저 재판장님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재판장은 그녀를 흘낏 보더니 소리 없이 문을 빠져 나갔다. 


#18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어요”
김용국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의 계산은 진실을 고백했는데 판사가 형을 더 올린 것이다.

“이럴 거면 말이죠 차라리 회장부인이 부탁한 대로 말을 맞춰 줄 걸 그랬어요. 솔직히 자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뭐가 있어요?” 재판부는 그의 말을 계산된 정직으로 파악했다. 사실 그랬다. 그는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은 사실대로 또 어떤 점은 우물쭈물했다. 검사나 다른 변호사에게 공격받고 털어놓은 것도 있었다. 모두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자신만 보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비난하면서 따지는 눈길을 보냈다.

“모두가 변호사인 내 탓입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그의 심정일 것이다.

“왜 변호사님의 탓입니까?”
그가 정곡을 찔린 듯 순간 움찔했다.

“일심에서 징역20년이 나왔으면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확 깍아야 하는데 무기징역이 나왔으니 능력 없는 변호사의 실수가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이기적인 범죄자들의 심리였다. 돈을 받았으니까 살인을 하고 돈을 줬으니까 형이 깍여야 했다. 법과 도덕보다는 돈이 우선인 생각이 범죄의 근원이다.

판결이유를 그가 이해한다면 그는 참회하는 인간일 것이다. 나의 뒤틀린 대답에 그는 자기코드와 맞다고 느꼈는지 씩 웃으며 동조를 구하듯 털어놓았다.

“하여튼 판사란 사람 이해하기 힘들어요.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날 보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다는 건지 말이죠.”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아직 비밀이 남았다고 속삭였다.

“저한테 말하지 않았던 다른 건 없어요?”
나는 막이 내린 후의 진실을 기대하면서 물었다.

“여태까지가 다지 더 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그가 짜증스런 어조로 부인했다.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절망의 빛이 감돌았다.

“변호사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죠? 이제부터라도 제가 회장부인에게 맞추어 진술하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어요?”
또 흔들리는 그는 궤도수정에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이제 단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제 배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진실하자는 전제하에이 재판에 참여했었죠. 그렇게 시나리오를 바꾸려면 저는 이쯤 연극무대에서 사라져드리는 게 좋겠네요.”

“하긴 그러시겠죠.”
그가 심드렁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가 심경변화를 일으킨 뒤에는 아직 뭔가 원격조정의 손길이 있는 것 같았다.

“회장부인 측에서 사람을 보내 왔었죠?”
내가 정곡을 찔러 단정하듯 물었다.

“네 사실은 회장부인 담당변호사가 왔었어요.”

“그가 뭐라고 했는지 내게 솔직히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막연히 짐작을 하면서 물었다. 그들은 대법원에서 사건을 파기 환송시키고 다시 심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이 엄 변호사님이 법원에 써낸 서류들을 봤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모두 물을 먹었다는 겁니다.”
난 취재한 진실을 그대로 써 냈었다. 김용국이 계속했다.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이 전체적으로 작전을 잘못 짜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그 변호사는 선고 다음날 판사실에 갔었대요. 가서 살펴보니까 판사들이 회장 부인 측에서 낸 서류들을 하나도 보지 않았더래요. 그래서 자기네들은 다시 재판할 거래요. 그리고 나중에는 재심까지 할 거 랍니다. 이제부터는 회장부인에게 잘하라는 거예요. 엄마 같은 분이 아니냐는 거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게 핏줄이고 집안 아니냐는 거예요. 만약 지금까지 돈을 대던 회장님이 이제 손을 들어버리면 모두 어떻게 되겠느냐는 거죠.”

나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김용국이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변호사는 아주 교묘하게 김용국의 위증을 유도하는 것이다.잠시 말을 쉬던 김용국이 계속했다.

“그 변호사님이 말하길 자기는 내가 혼자 죽여 놓고 고모에게 뒤집어씌우는 걸로 알고 있대요. 나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말이 수시로 달라지고 거짓말을 해서 자기가 법정에서 그렇게 했었대요.”

정말 그럴까. 속으로 진실을 알면서 그 변호사는 빠져나갈 길을 만든 건 아닐까. 회장부인을 맡은 로펌 측의 변호전략은 내가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형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펌의 변호사들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회장부인은 재판장에게까지 조금도 기가 죽는 여자가 아니었다. 회장의 부와 사위가 판사라는 의식이 그녀의 머리에 꽉 차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돈만 있으면 뭉갤 수 있었다는 경험을 그녀는 등뼈같이 주체성 같이 맹신하는 것 같았다. 회장이나 그녀의 의식 속에 로펌의 변호사들 역시 돈 주고 산 용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조언이 귀에 들어갈 여지가 없다.

김용국의 입에서 마침내 그걸 뒷받침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회장부인 고모가 변호사들을 가만 놔둘 사람이 아니예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민 변호사 그 사람도 고모가 하도 난리를 쳐서 몇 번 손을 들라고 그랬대요. 너무 힘이 든답니다.”
내 짐작이 맞았다. 결국은 스스로들 자초한 결과였다.

“이 사건 말이죠. 차라리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으면 정상참작을 받아서 모두 좋은 결과를 맞이했을 텐데 그런 방향으로 변호사가 제안을 하지 않았어요?”
기록을 읽어본 변호사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며 물었다.

“고모를 처음 맡았던 변호사가 그렇게 제의했다가 단칼에 잘렸어요. 고모는 무죄가 나와야지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거죠.”
장부인 그녀는 세상을 너무 깔보는 것 같았다.

“참 그 변호사는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간다고 합디까?”
내가 그들의 전략을 궁금해 하며 물었다.

“죽은 여대생의 팔뼈가 부러진 걸로 봐서 이 사건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우발적이라는 심증이 간대요. 그런 사건인데 검찰이나 경찰의 회유로 내가 고모 쪽을 걸고넘어진 거라는 얘기죠. 자기는 그렇게 믿고 싶고 실추된 회장님 집안의 명예를 바로 잡아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도 회장부인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부자들에게 세상은 한판의 연극인지도 모른다. 김용국은 이제부터 꾸며지는무대에서 또 다른 삐에로가 될 것이다. 나의 역할은 끝이 났다. 그 며칠 후 아침신문에 조그만 보도가 나왔다. 민사법원은 회장측이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에게 위자료로 6억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이 나라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는 판사들이었다.

유난히 폭설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법원의 계수나무 가지에 난 작은 이파리가 연두색물감을 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김용국의 처로부터 핸드폰이 왔다.

“변호사님 남편이 급히 접견을 와 달라는데요.”
김용국의 처가 숨넘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가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또 ‘늑대와 소년’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들을라구요? 이제는 더 이상 안 속겠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며 거절했다.

“이번에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면회 가서 또 변호사님을 보기위해 별 일 없으면서 가벼운 거짓말 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정말 아니랬어요.”
이틀 후 나는 구치소로 가서 김용국을 만났다.

“제 나름대로 풀건 풀고 가기로 했어요. 내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말을 해도 변호사님 도와주실 거죠?”
그가 먼저 다짐하면서 물었다. 그는 폭탄선언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들어보고 진실이면 돕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 회장부인이 여대생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었어요. 마기룡과 둘이서 미행을 하는데 하루는 기룡이가 이렇게 힘들게 미행하지 말고 아예 잡아서 발가벗기고 비디오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그게 먹히지 않으면 그때 가서 약물을 쓰자는 거예요. 사채꾼들은 겁을 주는 방법으로 사람을 납치한 후에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독이 든 주사를 고양이한테 놔요. 고양이가 바로 뒤집어 지면서 즉사하는 걸 보게 하면서 그 사람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기겁을 해서 대개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거죠. 여대생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사실은 기룡이가 청산가리를 항상 가지고 다녔거든요.”

나는 불쾌감이 치솟고 있었다. 그 내용이 그동안 회장 측에서 구상한 시나리오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제 나까지 연극에 몰래 동원하려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속아주면서 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여대생을 죽이기 전 마지막 장면을 한번 얘기해 봐요. 법정에서 말한 거 엉터리죠?” 내가 따지듯 물었다. 그는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조합해서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사실의 편린만을 추출해 재조립하면 숨겨졌던 진실을 엿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말이 내게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활기차게 또 다른 사실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가 나오고 있었다. 

#19
김용국은전에 없던 새로운 사실들을 폭탄같이 터뜨렸다.

“체포될 때를 가상해서 사실 시나리오를 세 개 짰었죠. 제1단계의 안은 정 사장이란 전혀 다른 제3의 인물을 만들어 우리가 살인을 의뢰했었다고 하는 거죠. 잡힌 첫날 그렇게 불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형사들이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데정 사장의 정체에 대해 빈틈없이 다 댈 수가 없었어요.”

수사란 범인들과의 머리싸움이었다. 처음에는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손들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허탈하게 자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그런 수사심리상태를 상정하고 계획을 짠 것 같았다.

“형사가 마기룡이가 마침내 다 불었는데 무슨 소리하느냐고 했어요. 그건 제2단계 씨나리오로 넘어가자는 기룡이의 간접적인 신호였죠. 우리가 형사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허탈한 상태에서 자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제2안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죠.”

베트남에 있을 때 그들은 대학노트에 잡혔을 때 진술할 시나리오를 꼼꼼히 써서 서로 대본같이 익히고 연습했다. 그들은 치밀했다. 양파껍질같이 까면 또 거짓말들이 나오곤 했다.

“시나리오의 제2안은 회장부인이 살인교사를 했다고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당시 매스컴에서 그렇게 보도를 할 때니까 사회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지는 거죠. 어차피 회장부인은 사위가 판사고 돈도 많았죠. 나이도 있으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물어도 충분히 법망을 빠져 나갈 거라고 우리는 계산했죠. 회장부인이 시켰다고 말했더니 수사가 급진전되더라구요. 형사나 검사가 한건 했다 싶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우리 진술대로 조서를 작성하더라구요.”

그의 얼굴에는 얼핏 승리감마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시나리오의 제3안은 뭐였어요?”
나는 그의 반짝이는 교활한 눈을 보면서 물었다.

“그건 여대생을 납치할 때 동원했던 건달들에게 덮어씌우는 거였어요. 그런데 거기까지 가지도 않고 일이 끝난 거예요. 형사나 검사가 내가 한 진술에 퍽 만족했어요.”

“왜 집안 어른이고 고모인 회장부인을 굳이 그렇게 했죠?”

“그 양반은 사람이 아니예요. 제가 도망가 있으면서 도움을 많이 청했어요. 그런데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거기다가 우리 집사람을 때리고 해서 감정이 생겼죠. 집사람을 달래고 위로해 줘야 할 사람이 그게 뭡니까? 그래서 오기로 덮어씌웠죠.”

“그러면 회장부인이주겠다고 약속한 살인청부자금 1억7천5백만원은 사실이 아니었어요?”

“그거 다 제 거짓말이예요. 처음에 미행자금 5천만원 받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여대생을 죽이고 나서 내가 협박해서 더 받은 거죠. 회장부인이 법정에서 나한테 협박당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말이 사실은 맞아요.”
이상했다. 그의 말은 법정에서 회장 부인 측 변호사들의 추정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부품처럼 맞아 들어갔다.

“그러면 회장부인이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을 죽여 달라고 청부한 사실은요? 그리고 회사임원인 시동생까지 죽여 달라고 했다고 진술들도 거짓입니까?”

“그것도 다 사실 제가 꾸며댄 거예요. 여대생 살인청부 하나만 얘기하면 신빙성이 없잖아요? 우리가 다 믿게하기 위해 덤으로 만든 얘기였어요.”
회장부인은 검사와 그들이 소설을 썼다고 외쳤었다.

“그러면 이제 와서 밝히겠다는 진실은 뭐죠?”
내가 속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분노를 자제하며 물었다.

“살인청부의 점만 틀리고 나머지는 대충 맞아요. 또 사실 우리가 여대생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한 건 아니구요.”
그의 번복한 말대로라면 회장 부인은 이제 무죄고 그들 역시 과실치사정도였다. 사실인지 그의 희망인지 정확지 않았다.

“하루는 미행을 하던 마기룡이가 이렇게 힘들게 미행하지 말고 아예 그 여대생을 잡아다가 발가벗기고 비디오를 찍어 인터넷에 올려버리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기룡이한테 그래도 우리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죠. 기룡이는 그러면 그때 가서 약물을 쓰자고 했어요.”

그들은 여대생에게 어떤 걸 강요했을까. 풀리지 않은 영원한 수수께끼였다. 소송에서 패소해 자존심이 상한 회장부인은 여대생 부녀에 대한 증오가 폭발직전까지 갔었다.

“약물을 쓰다뇨? 죽이자는 거였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사채꾼들이 겁주는 방법인데 납치한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양이한테 독주사를 한방 놓는 거예요. 고양이가 뒤집어 지면서 즉사하는 걸 보게 하면서 그 주사를 사람에게 찌르려고 하면 기겁을 해서 어떤 인간도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예요. 여대생에게도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그 독약의 정체가 뭐죠?”
수사기록을 보면 그 독극물이 살인청부의 유혹요소가 됐다. 돈이 궁했던 마기룡은 먹으면 일주일 후부터 내장이 서서히 썩어 들어가기 때문에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마기룡은 체포되자 그건 시골장터에서 산 쥐약에 불과했다고 둘러댔었다. 병리학교수들은 마기룡의 말처럼 그런 독극물은 없다고 웃었다.

“사실은 청산가리였어요. 마기룡이가 항상 그걸 가지고 다니면서 나한테도 겁을 줬어요.”
은폐 세부적인 사실이 조금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살인 후에 깊이 매장을 하지 않은 이유는 뭐죠?”
난 그들이 낙엽만 덮은 채 황급히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다.

프로살인자라면 철저히 매장을 했을 것이다. 마기룡은 프로인체 했지만 사실 그는 초보자 같기도 했다. 또 표독스런 회장부인의 닦달로 그들은 정신이 빠졌을 지도 몰랐다.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왜 삽을 가지고 가지 않았겠어요? 데리고 가서 겁주고 사진 찍으려고 했으니까 가지고 가지 않은 거죠.”
김용국은 ‘그것 봐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여대생을 산기슭에 데려가 바로 쏴 죽였다는 여태까지의 진술은 어때요?그것도 사실과 얼마간은 틀리죠?”

“그렇습니다. 사실 납치해 가자마자 죽인 게 아니고 좀 시간이 길었어요. 산에서 뒤집어 씌웠던 쌀푸대를 벗기고 얼굴에 온통 감아놨던 청 테이프를 뗐었죠. 꽉 붙어있던 테이프를 확 떼어내니까 털이 붙어 나오고 꽤 아파하더라구요. 그런데 우리가 실수해서 그만 눈에 붙은 테이프까지 떼어낸 거예요. 그 여대생이 우리 얼굴을 봤어요.”

난 비로서 쌀 푸대 하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건 그때 없어진 것이다.

“그때 여대생이 뭐라고 했어요?”

“팔이 너무 아파요라고 소리치면서 울었어요. 마기룡이 그 자식이 실수해서 여대생 팔을 부러뜨린 거죠. 여대생이 울면서돈은 요구하는 대로 줄 테니까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저희는 당황해서 다시 테이프로 여대생의 입과 눈을 감았어요.차라리 죽여 버리자고 기룡이가 그러더라구요. 제가 안 된다고 했더니 기룡이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무서워서 내가 산에서 먼저 내려와 차에 있는데 5분후에 기룡이가 왔어요. 뺨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이제 김용국의 주장은 회장부인뿐 아니라 자기도 무죄였다.

“말씀대로라면 총이 아니라 먼저 비디오카메라와 주사기를 가지고 올라갔어요 했는데 증거물을 보면 총만 있고 주사기하고 비디오카메라가 없던데 어떻게 된 거죠?”
총은 살인의 고의를 증명하고 비디오카메라는 그걸 부인하는 증거물일 수 있었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총만 가지고 올라갔는데 그것들을 가지러 다시 차로 내려온 사이에 마기룡이가 여대생을 죽여 버린 거예요.”
그게 김용국의 한계였다. 누군가 원격 조정하는 얘기들을 열심히 얘기하다가 엉뚱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당황한 것이다.

난처해진 그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물고 늘어지다가 사실 항소심에서는 회장부인을 풀어줄려고 했어요. 그래서 교도소 이송버스 안에서 마기룡이에게 항소심에서는 사실대로 말해풀어주자고 했더니 나보고 빨리 회장 측에서 피해자부모와 합의나 보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합의가 되지 않았죠?”
내가 물었다.

“회장님이 합의를 하지 않고 변호사들을 시켜 그냥 무죄라고 내뻗어 버렸어요. 나도 이상하죠.”
회장은 교사부분을 무턱대고 부인만 할 뿐 전혀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여대생의 아버지를 자극하고 내게도 적의를 보여 더 회장부인을 공격하게 만든 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겠다고 위장하고 변호사인 내게 접근해서 거짓말을 입력시키고 철저히 이용한 거네요?”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재판이란 연극에서 그런 소도구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회장부인 담당 변호사가 나를 조용히 찾아와서 한번 그런 식으로 계속 가보라고 했어요. 형이 더 올라 갈 테니 두고 보라는 거죠. 사실 그때 제가 겁이 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그 사람은 말을 또 번복하면 불리하니까 그대로 뻗으라고 가르쳐주더라구요. 그래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죠.”
결국 그의 머릿속은 회장부인측 변호사의 판단이 맞다는 계산이 생겼을 것이다.

“김용국씨! 최근에는교도소로 누가 면회 왔죠?”
내가 속으로 짐작을 하면서 한번 확인했다.

“처하고 형수하고 왔어요. 내가 진술을 잘못해서 다 죽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제부터라도 말을 다시 바꾸겠다고 선언 했어요. 그랬더니 제 처가 펄쩍 뛰면서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회장부인이 나오면 자기를 꼭 죽일 거래요. 그런데 옆에 있던 형수는 그러지 말고 말을 바꾸라고 시키구요. 지금도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니까요.”

다시 강한 시도가 꿈틀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하려면 마기룡이 관건이었다. 무기징역을 받은 그가 과연 협상에 응할까?나는 마지막으로 마기룡을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20
구치소 안은 음습한 동굴 같았다. 축축하고 비릿한 공기가 가득 찼다. 그 속에서 온갖 음모가 곰팡이처럼 자라났다. 나는 마기룡을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만났다. 턱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창백한 얼굴이었다.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시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뭘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의 방문목적을 살폈다.

“이미 재판은 끝났습니다. 제가 정확히 모르고 마기룡씨를 공격한 점은 없었나요? 변호사는 더러 그런 실수를 합니다.”
그는 내가 찾아온 목적이 순수한 걸 이제 알아챈 표정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아시다 시피 전 사회에 나와서는 거칠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살았죠. 배운 것 없고 기술도 없는 놈이 세상에서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살다 보니까 사채꾼들의 세상에 들어갔고 쓰레기 같은 삶이었죠.” 의외로 솔직했다.

“정말 여대생 아버지 정의택씨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김용국은 나를 다시 불러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번복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정말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기룡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아직 김용국과 말을 맞춘 단계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발 빠르게 온 게 다행이었다.

“그러면 굳이 그걸 자백했던 이유는 뭐죠?”
시나리오까지 짜고 연습을 했던 치밀한 그들이었다.

“제가 스스로 자백한 건 아니고 다른 부분하고 연결이 되다 보니까 그렇게 한 겁니다. 왜 형사들은 물은 걸 또 묻고 사람 진을 빼잖아요? 그런 속에서 다른 부분하고 관련이 되서 제가 빠져나가지 못했어요.”
일리가 있었다. 계산상 그럴 땐 털어놔 버리는 게 유리했다.

“재판도중 심정이 어땠어요?”

“죽은 여대생 아버지 정의택씨를 부르는 게 정말 싫었어요. 회장측에서 합의도 안하고 사죄도 하지 않는데 나와서 무슨 좋은 소리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형만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회장은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을 계속 자극하는 셈이었다. 사죄도 안하고 모른다는 식이었다. 하기야 무죄라고 하면서 합의하자는 건 모순이었다. 마기룡이 계속했다.

“그런데도 재판 받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 김용국을 보면천하태평 이예요. 그 표정에서 자기는 빨리 석방되고 나는 사형 당한다는 걸 읽었어요. 김용국이와 저는 동창이고 친구지만 이제는 그 인간 정말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싫어요. 판결문을 읽어보면 판사도 제가 우발적인 살인범이고 프로는 아닌 것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친구였다는 그 새끼는 뭐라고 하는지 아시죠? 나를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라고 노골적으로 씹는 거예요. 정말 언젠가 살아서 만나면 서로 꼭 풀어야 할 것들이 있어요.”

흥분해서 말하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회장부인측은 50억을 제시하면서 김용국에게 총대를 메달라고 제의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도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김용국에게 회장부인측 변호사를 물리치고 진실을 말해 준다면 그에게만은 합의서를 써 주어 석방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김용국은 돈이냐 생명이냐를 놓고 저울질 했을 것이다. 일단 나를 선임해서 양심선언의 형식을 취한 그는 자유를 선택했다. 마기룡은 그걸 읽었던 것이다. 무기징역이 선고된 지금 더 이상 나는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다. 김용국의 말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김용국의 말로는 마기룡씨는 재판부의 동정을 받기 위해 고도의 심리작전으로 국선변호사를 선택했다는데 어떻습니까?” 마기룡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변했다. 그가 참느라고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이렇게 내뱉었다.

“저는 형제들조차 면회를 안 올 정돕니다. 그런 사람이예요. 그런데 누가 예쁘다고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습니까? 이 사건도 돈이 없어 쫓기다가 마지막에 맡은 겁니다.”
나는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체포된 이후를 대비해서 시나리오를 만드셨던데 그 내용을 말해 줄 수 있어요?”
김용국은 이제와서 갑자기 사실은 시나리오가 제3안까지 있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중 회장부인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것은 두 번째 시나리오일 뿐이라고 했다.

“해외로 도피하고 나서 인터넷을 통해 수사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6일에 납치를 하고 10일 살해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더라구요. 전 죽였다고 하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쪽으로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습니다.”

“시나리오 제2안은요?”

“제2안이라뇨?”
마기룡의 눈이 커지면서 되물었다.

“김용국씨가 이제야 진실을 털어놓겠다면서 시나리오의 제2안은 회장부인을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 작전이라고 했어요. 사실 회장부인은 미행만 시켰는데 마기룡씨와 김용국이 실수로 여대생을 죽였다면서요? 그 점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마기룡의 얼굴이 흉측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미친놈 정말 개새끼네.”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내가 계속했다.

“제3의 시나리오는 동원했던 건달에게 살인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 제2안 제3안은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묘한 비웃음이 일었다.

“변호사님 제가 한가지 만 말씀드릴까요?”
그가 이제야 뭔가 눈치 챘다는 듯 씩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얼마 전 김용국이한테서 비밀쪽지가 왔습니다. 회장부인 변호사하고 엄변호사님이 우리를 구하려고 뭔가 새로이 일을 꾸미고 있으니까 식사나 잘 하고 있으라고 써 있더라구요.”
나는 비로소 김용국이 나를 다시 부른 이유를 알았다. 그는나를 이용하려고 장난했던 것이다.

“다시 물읍시다. 회장부인이 살인교사를 지시한 게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그들의 교활성이 싫었다.

“사실입니다. 회장부인이 살인을 시켰어요. 그 여자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살인 후 잔금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어요. 해외에 도피해 있을 때 김용국이를 이용해서 나까지 죽이려고 했어요. 어떻게 한지 아세요? 용국이가 북한사람에게서 마약을 사고 나보고 거기 이틀만 있으라고 했어요. 마약이 진품인지 확인하는 동안 인질을 잡게 돼 있거든요. 거래가 뒤틀리면 인질은 바로 죽어요. 정말 난 그때 김용국에게 속아서 죽을 뻔 했죠. 그래도 난 중국에서 도망 다니면서 용국이를 보호했어요. 그런데 회장부인과 용국이는 나까지 죽여서 이 사건을 영원히 미궁에 빠뜨리려고 공작한 거예요. 난 칼 한자루 가지고 도망 나왔었어요. 그런 인간들하곤 더 이상 거래 안해요.”

마기룡이 협조안하면 그들의 계획은 실패다. 그가 덧붙였다.

“중국에 도망해 있을 때 같이 아파트에 있어보면 용국이 그 게으른 새끼는 하주종일 방안에 누워 뒹굴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어요. 더러 조선족 계집애를 끼고 헬스클럽이나 다니구요. 그리고 무슨 일이나 저를 머슴같이 부렸어요. 난 담배 값도 없어서 헤매는데 말이죠.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 감추어진 건 별로 없어요. 제 생각으로는 회장부인 측에서 뭔가 신호가 다시 온 거예요. 우리가 다 덤텡이를 쓰고 회장부인을 빼내자는 수작이겠지요. 변호사님이 왜 오셨는지 이제 알겠는데 사실대로 털어놓죠 뭐. 얼마 전 이송버스 안에서 김용국이가 나보고 어차피 이렇게 됐는데 돈이나 받아야 할 거 아니냐고 했어요. 전 싫다고 그랬습니다. 평생 감옥에서 살 텐데 돈이 있으면 뭘 합니까? 그리고 그 인간들한테 한번 더 속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한이 맺히겠어요?재판을 받을 때는 고모 조카간 서로 죽일 것 같이 으르렁대더니 지금 모습 보세요. 이제는 나만 살인범으로 몰고 자기네들은 다 빠져나가려고 하잖아요?”

양파껍질 같은 그들의 교활한 꾀는 어디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악마들의 블랙홀로 착하던 김용국의 처도 빨려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진실하게 하려고 애썼다. 증인으로 나와 직접 50억원의 제의를 폭로했었다. 마기룡은 김용국보다 먼저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김용국의 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 여자가 사무원으로 있을 때 제가 알고 지내다 용국이에게 소개했어요. 아주 착한 여자죠. 중국에 도망가 있을 때 도 용국이에게 자수해서 진실을 말하라고 호소했었어요.”

“지금의 그 여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죠?”
그는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대답 했다.

“이제는 뭐라고 말 못하겠습니다.”
내가 이 사건에서 해야 할 역할은 다 끝난 것 같았다.

회색 구름이 구치소 담장까지 내려와 있었다. 내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타려고 할 때였다.

“변호사님”
누가 불렀다. 김용국의 처였다. 남편 김용국을 면회하러 왔다가 나를 본 것 같았다.

“남편이 다시 말을 바꾼 거 아시죠?”
내가 그녀에게 확인했다.

“대충은 알아요”
그녀의 얼굴에 묘한 우수가 스쳐지나갔다.

“사실입니까?”
난 속으로 그녀가 마지막까지 버텨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진실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투도 자신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앞으로 재심 때 남편만 사형 당하는 모험을 다시 감행하시겠어요?세상이 모두 바보는 아닌데.”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표정이었다.

“회장 측에서 얼마나 주겠다고 하던가요?”
“아니 절대 그런 적 없어요.”
그녀가 과잉반응을 보이며 부인했다. 그게 끝이었다. 며칠 후 그녀는앞으로 이 사건에서 손을 떼 달라고 전화했다.

그리고 일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죽은 여대생 아버지 정의택씨 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는 생명이 붙어있는 날까지 그 악마들과 싸울 겁니다.대법원에서 뇌물 주고 장난칠까봐 지켜봤죠. 또 교도관을 매수해서 형 집행정지로 나오려는 것도 감시하고 있어요. 참 제가 변호사님에게 한 가지 사과할 게 있어요. 제가 진실을 말하면 합의서를 써 주겠다고 약속한 걸 지키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제는 아시죠? 악마에게는 나도 뱀처럼 교활해 질 필요가 있더라구요.” (끝)

(펌 : http://blog.naver.com/eomsan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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