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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13세 빈센트 1853년 3. 30.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 흐르트 츤데르트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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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소도록

고흐전을 보고 나서 뭔가 고흐에 대해서 한번쯤은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다시 한번 또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고 또 지식면에서도 많이 떨어지니 감안해서 읽어주시길 바란다. 뭔가 대단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 염두에 두면 좋을 거 같네요.

ㅜ.ㅜ 어흑 그리고 방금 알아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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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의 일대기를 보면서 그 시기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1863년 살롱 낙선전 열림.
1865년 프로빌의 기숙 학교에 입학, 69년까지 다님.
1869년 7월 30일, 헤이그에 있는 구필 상회에 취직, 나중에는 브뤽셀서 근무.
1873년 5월 구필 상회 런던 지점으로 전임.
1876년 구필 상회에서 해고.
1877년 1월~4월 서점에 근무. 고호의 신앙심이 한층 돈독해져 목사가 되기로 결심.
1879년 바스메스에서 부목사, 정신적 물질적으로 곤궁한 생활.

◆ 고흐의 삶 - 첫번째 이야기 ◆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을 때 생각해보건데 고흐는 마음적으로는 사람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자신의 친절로 사람들이 등을돌리게 되는 쓴맛을 본다면 누구라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 없을 거 같다. 천성적으로 고흐는 소심하고 마음이 약하고 여린사람이었던 거 같다. 그게 몇 번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에게 남들과 잘지내는 법을 잊게 만들고 더욱 신경적으로 날카롭게 만든 거 같다.

1882년 1월 거리에 창부 시엥을 만나 20개월 동안 모델로 씀.
1882년 석탄짐을 진 탄광의 여인들(Femmes de mineurs portant de sacsde charbon), 7월 지붕들(Les Toitures).
1883년 황무지와 석탄 구덩이의 작은 집, 마을과 일하는 농부 등을 그림 루스 두이넨부근의 길들 (Routes pres de Loosduinen).
1884년 니넨신부의 겨울정원(Le jardin de presbytere de Nienen enhiver),
1885년 4월~5월 정물, 농부, 직물기계, 두부 등 습작. <감자먹는 사람들> 제작. 6월 <농부의 얼굴>을 제작.


◆ 고흐의 삶 - 두번째 이야기 ◆
고흐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누에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 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과 '감자먹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누에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 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워프로 갑자기 떠났다.

고흐에게는 사는동안 여자가 다섯명정도 있는데..뭐 창부가 비정상적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창부하고는 좀 살긴했지만 좀 제대로 된 여성하고 어떤 정신적 교감은 잘 없었다. 자신의 성적욕구 충족과, 그림의 모델을 삼기위해 살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고 따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곤궁한 생활속에서 여자가 계속 있다는 건 고흐에게는 압박감이었던 거 같다.

1886년 셍트마리의 풍경, 해변의 배들, 채소밭들.
1887년 인상파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6월 빙그 화랑에서 본 일본 그림에 충격을 받아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한다.

◆ 고흐의 삶 - 세번째 이야기 ◆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 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구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피사로와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매우 사람들과 어울려지내기가 어렵던 사람인 건 분명하다. 그는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꼭 어떤 룰에 따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이 강했던 사람으로 어떤 단체에 속해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무척 어려웠던 사람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그 외로움이 더욱 그를..그림에 빠지게 했던 것은 아닌지..

1888년 3월「예술가의 공동체」를 입안, 4월 꽃피는 나무, 모브의 회상을 제작.
1888년 7월 일본처녀(La Mousme) , 8월, 해바라기(Tournesols), 알제리 보명
Le Zouave ), 9월 아를르 벵상의 집(La Maison de Vincent a Arles),아를르 반고호의 침실(Chambre a coucher de Van Gogh a Arles),밤의카페(Le Cafe,le soir), 정수리를 면도한 자화상(Autoportrait au crane rase).
1888년 10월 씨뿌리는 남자(Le Semeur).
1888년 11월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아르망 룰렝의 초상(Portrait d'Armand Roulin), 카미유 룰렝의 초상(Portrait de Camille Roulin).
1889년 아를르에 수용됨,생애에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200점의 그림을 그림.
1889년 셍레미의 셍폴 정신병원(L'Asile Saint-Paul a Saint-Remy).
1889년 1~3월 목부(La Berceuse), 파이프를 문 자화상(Autoportrait a la pipe), 화판과 양파가 있는 정물 (Nature morte a la planche a dessin et auxoignons), 우편배달원 룰렝(Le Facteur Roulin).

◆ 고흐의 삶 - 네번째 이야기 ◆
그후 12개월 동안 (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혼자는 역시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고흐는 사람과의 접속을 시도하고 또 그 무리에 끼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싶어하지만, 사람사이엔 궁합이라는 것이 있어서..그와 고갱이 함께하는 동안 예술적인 부분은 영향을 받았지만 어떤 인간으로서의 교감은 실패한 듯 하다. 그는 자기의 귀를 잘랐고, 그것은 미쳤다라기보다는 뭔가 이 귀를 자르면서 자신이 외롭다는 걸, 혹은 어떤 몸부림을 보여주고자 했던 거 같다. 하지만 고갱은 결국 그를 떠나고 그는 2주후엔 아무렇지 않은 척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것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라 결국 그는 정신병원으로 간다.

근데 너무 신기한 건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왠지 생기있어 보이고 활기차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편으론 자신이 그림작업을 꼭 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강박관념도 일조했겠지만 어떤 보호막 아래서의 고흐는 좀 더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던 사람은 아닐까, 혹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과 같은 색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속에서 좀 더 안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는 생레미에서 그린 작품은 대체적으로 다 따뜻해 보인다.

1889년 5~6셍폴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Saint-Paul), 황금빛 밀밭(Les Bles jaunes). 자화상
1890년 붓꽃(Les Iris), 오베르 쉬르 와즈의 길(Rue a Auvers-sur-Oise).
1890년 1월 낮잠(La Sieste), 밀레의 모작으로 잘 알려짐.
1890년 5월 셍 레미를 떠나 파리로 옮김. 미술 애화가인 정신신경과 의사 가세의환자이자 친구가 됨. 5월 의사 가세의 정원(Le Jardin du docteur Gac het), 6월 의사 가세(Le Docteur Gachet), 오베르 성당(L'Eglise d'Au vers).
1890년 6~7월 천둥치는 하늘밑의 들판(Champs sous un ciel d'orage),까마귀나는 밀밭(Les Champs de ble aux corbeaux).
1890년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붉은 포도밭>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임.
1890년 7월 27일 리볼베 권총을 가슴에 발사,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29일 세상을 떠남.(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1891년 고호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월 25일, 동생 테오 사망. 오베르의 조그마한 묘에 고호와 함께 합장.

◆ 고흐의 삶 - 다섯번째 이야기 ◆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로 갔다.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엔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 1. 25) 만성 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출처 : 글내용의 일부 지식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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