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흐전을 다녀와서

from sundry note 2008. 1. 25. 00:38
친구 정은이랑 지난 주 화요일에 반고흐전을 다녀왔다.
포스팅이 매우 늦은 이유는...게으름이다.
그 전시회를 보러가던 그 날은 정말 정말 추웠다..누가 와서 뺨만 만져도 깨져버렸을지도 ㅡ.ㅡ;
아이들을 견제해 오전 10시반에 갔지만 대실패 ㅡ.ㅡ; 방학중이라 애들이 바글바글...어흑
초딩이 싫어요가 절로 나오는..순간이었다. 뛰고 떠들고..사실 도무지 전시관을 천천히 돌만한
어떤 여유자체가 없다고 해야하나 암튼 머리가 복잡했다.

반고흐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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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2007. 11. 24 (토) ~ 2008. 3. 16 (일)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찾아가는 길
전시내용 : 관람정보, 프로그램 및 서비스, 사이버미술관
관련정보 : 공식홈페이지
티켓정보 : 12,000원(성인) 할인을 받으려면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회원들에게 천원할인을 해준다. 프린트는 딱 한 번 할 수 있으니 프린트가 준비된 곳에서 프린트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1인1회지급


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길은 위에 링크를 보고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나올정도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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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화가
출생 - 사망 :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 1890년 7월 30일
학력 : 암스테르담대학교 신학부
경력 : 1890년 1월 브뤼셀 그림 전시
1889년 정신병원 입원
1880년 브뤼셀 미술학교 입학
1879년 바스메스 부목사
 
글을 쓰려니 갑자기 두렵다 좀전에 장문의 글을 잃어버린 후라..아까와 같은 감정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휴...가다듬고 ㅜ.ㅜ 티스토리의 임시저장도 못미덥다 이젠; 암튼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아마 죽고 난 후에 이렇게 유명하게 백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아마 잘 없을거 같다. 근데 사실 나는 순수미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사실은 오바라고 생각은한다. 어떻게 감상을 남겨야 하는지 실제로 내가 보고 느끼는 감정은 어떤지 그걸 말하는 게 더 솔직한 거 같다. 난 이상한 점 하나 찍어두고 이게 명화라느니, 너무 멋진 그림이라느니..사실 잘 모르겠다. 뭘 보고 대체 명화라는 거냐? 라는 생각..고등학교 미술선생님에 대한 죄송함으로 순수미술..쪽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반고흐전을 다녀 와서 부쩍 더 고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던 거 같다.

고흐는 왜 그렇게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진듯한 그런 미세한 신경세포를 가지고 살아야 했는지 사실은 난 잘 모르겠다. 그에게는 어린시절이 크게 불행하지도 않았는데..그에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동생 테오가 있었다. 사실은 테오가 없었더라면 아마 고흐는 지금 남긴 그림의 반도..아니 어쩌면 한점도 남기지 못했을것이다. 테오는 그만큼 자기 형에겐 아낌없는 후원자였다. 일하고 번돈을 형에게 보내주고 그 형인 고흐는 테오덕분에 사실은 조금 편하게 예술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테오는 안타깝게도 형이 죽은지 반년 후에 죽게 되었다. 정말 불행했는지 행복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만..마음이 안타깝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또 얼마나 참담한 마음이었을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남편이 형을 건사한다는 건 부인에게는 어쩌면 매우 스트레스였는지도..

이제 어줍잖겠지만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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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걸작으로는 수많은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출처 : 네이버지식인

사실 위에 글을 읽어보면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불행한 어린시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이름은 1년 전에 태어났던 형의 이름이었는데 그 아이가 죽자 고흐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런 경우 인생에 안좋은 기미라고 그렇게 이름을 바로 주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동생 테오의 권유와 딱히 할일이 없었던 연유로 시작하게 됐다. 재능이 잠재되어 있음을 후에 알게 된 케이스라고 해야하나? 그렇다고해서 고흐가 무작정 자기가 그림을 그리다가 화풍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았고 또 여러가지를 많이 접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슬픔 (1882)>

<슬픔 (1882)>

반 고흐의 활동시기
① 1873~85년의 첫번째 시기
잇따른 실패와 진로의 전환이 있었던 수습기로 자신의 까다로운 기질과 씨름하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찾으려 애쓴 시기였다.

② 1886~90년의 2번째 시기
그림에 몰두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시기였지만, 1889년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잇따랐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출처 : 네이버지식인

사람이라는 건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도 많지만 엄청난 양의 상처를 떠안기도 하는데 고흐에게 사랑은 그 엄청난 양의 상처를 떠안는 결과만 가져다 주었다. 아마 그의 사랑이 잘 되어서 누군가가 그를 보듬어 주었다면 그에게는 어쩌면 엄청난 고통이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그만큼의 그림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위에처럼 슬픔이라는 작품은 아마 보기 힘들지 않았을까?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좀 어두운 일상을 보여주지만 그래서 더욱 그 사람의 그림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이 느낀 슬픔을 그림을 통해서 위로받는 다는 생각으로..더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나의 개인생각.

그의 작품들 감상 링크  클릭

그가 생레비 정신병원에 있는동안 그림 그림은 오히려 다른 그림보다 밝아보인다. 약간의 정신적안정과 또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그렇게 만든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을 전시관에서 보는내내 그의 지난 기록과 그림은 되게 안스럽고..차갑고 안타깝고..또 한편으론 화도나고 그런 만감이 교차했다. 그의 그림은 여자가 많이 등장하지만 밝고 행복한 여자그림은 없었다. 얼굴이 생략 되어있고 삶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재미있게도 감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 글 하나로 전체를 아우르기엔 너무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므로 우선적으로 이 글은 마치고 2번글을 하나 더 써야겠다. 이 글을 지금 세시간째 잡고 있자니 엉덩이에 쥐가난다.

그럼 2편에서 만나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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